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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새긴 것
당신은 무슨 꿈을 꾸면서 잠에서 깨어나나요? 나는 깊은 바다 속 한 마리 게로 살고 싶다 눈의 여왕이 붉은 여왕에게 ● ‘세상에서 제일 잘 생긴 익사체’에게 아버지처럼 당신도 다윈 상을 수상하시겠습니까? ● 자신과의 단절 마피아 오퍼에서 벗어나는 법 간지러움의 형벌 나는 대장장이로소이다 ● 내 편이 필요해 나는 기러기 아빠 ● 사랑, 그 이상의 것 어떤 만남 ● 보잘 것 없는 사랑 탁구 치는 여자 ● 평범한 죽음을 위하여 손금을 봤어 ● 괴로움과 고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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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덤 스미스의 [도덕 감정론] 제1부에 나오는 말이다. “인간이 아무리 이기적인 존재라 하더라도, 그 천성에는 분명히 이와 상반되는 몇 가지가 존재한다. 이 천성으로 인해 인간은 타인의 운명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단지 그것을 바라보는 즐거움밖에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고 하더라도 타인의 행복을 필요로 한다. 연민과 동정심이 이런 종류의 천성에 속한다. 이것은 타인의 고통을 보거나 또는 그것을 아주 생생하게 느낄 때 우리가 느끼는 종류의 감정이다. 우리가 평소 타인의 슬픔을 보고 그 슬픔을 느낀다는 것은, 굳이 이를 증명하기 위해 따로 예를 들 필요조차 없는 명백한 사실이다.”
타인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조건이다. 가족을 필요로 한다. 이것은 인간의 이차적 조건이다. 가족을 필요로 한다는 것은 자기를 확장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나는 하나일 때보다 둘일 때 힘이 세어질 것이고 셋일 때 더욱 세어질 것이다. 대체로 그러하니 내 경우에도 그러면 조금 더 세어질 것이라 믿는다. 그러나 어느 하나를 취한다고 다 순전한 둘이 되겠는가. 때로는 자기를 반쪽 내야 할 때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전부를 내주고도 하나도 얻지 못하는, 전혀 승산 없는 과정을 밟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낱말을 만들어낸 것이 바로 우리 인간 아니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결혼을 하고 누군가를 부양하고 자기를 바친다. 그렇게 해서 1.5만 되어도 남몰래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인류는 40억년의 역사를 안고 태어난다. 우리는 타인의 경험도 자기 것으로 할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주위 사람들의 모습이 거울이 되어 그들의 불안감마저 내재화하여 지금의 지위나 인정을 잃고 전락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시달리고 존재감이 없어지는 것에 대해 고통 받는다. 그래서 자신이 그런 상태가 될지 모르거나 그런 상태에 놓였을 때조차 존중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발전시킨 감정이 연민이다. 우리는 연민이라는 조금 더 큰 공감의 형식을 발달시켜 우리가 어떤 상태에 떨어져도 타인으로부터 존중받을 수 있다는 안정감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타인의 삶을 응시하는 것은, 나의 삶을 응시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타인의 삶에는 내가 걸어온 길이 겹쳐져 있기도 하고, 타인이 먼저 간 길을 뒤따라가기도 할 것이며, 내가 먼저 길을 내고 갔다면 타인에게 이정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인생에 마땅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하는 지금, 가까운 타인과 따뜻하고도 깊은 응시로 결속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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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남편들의 애환을 아내의 눈으로 깊이 있게 들여다보고 위로해주고자 하는 산문들이다. 이 작업을 하면서 말도 못하게 힘들었다. 한국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한국에서의 삶이 얼마나 힘든지 누구나 동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가족을 짊어진 남편들의 힘든 삶을 한번 들여다보자 했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자기의 삶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를 이야기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렇게 얻은 이야기로 한 사람 당 한 꼭지씩 쓰고 사이사이에 내 생각을 담은 독립된 산문을 끼워넣었다.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 어려웠다. 가장 큰 문제는 산문은 소설과 달리 답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었고 대체로 따뜻하고 긍정적인 답을 주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나는 태생이 소설적인 인간이라, 답을 마련하고, 그것을 긍정적인 시각으로만 보여줘야 한다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사람의 삶이란 어떻게도 결론 내릴 수가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기 때문이다. 산문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생각으로 작업을 그만두고 싶었다. 그런데 또 그만 두어지지 않았다. 내가 인터뷰한 사람들의 삶에 내가 깊이 개입해버렸기 때문에 빠져나올 수도 없었다. 소설은 개인의 삶이라기보다는 한 개인으로 표징되는 '어떤 삶의 형태'를 보여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 소설의 모델이 된 사람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산문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들여다본 남편들의 삶에 무슨 책임을 진 모양새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내게는 맞지 않는 작업이라는 것을 확인하며, 가슴 아프고, 고통스럽고, 힘든 작업을 마쳤다. 그런데 다 쓰고 보니 또 그렇게 애정이 갈 수가 없었다. 내게 너무 가까운 이들의 삶이고, 곧 나의 삶이 아니던가.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힘겨운 삶의 도정에 놓여있고, 어디론지 죽을 힘을 다해 걷고 있지 않은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