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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모를 파일이 인터넷 안에서 자신이 눌러앉을 장소를 정하자 먼저 위치를 확인하고 자신에게 주어진 일정한 패턴으로 스스로를 복제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일종의 생명체가 행하는 생장과 비슷한 형태의 증식이었으며 부족한 부분은 네트워크에서 불러들였다. 그리고 그 자리에 맞게 자신을 정리하고 조용히 기다리는 자세를 취했다.
--- p.10 거대한 파랑, 거대한 생명, 지구와 서로 얼굴을 맞댈 때 가장 먼저 숨 막히게 덮치는 느낌이다. 온 영혼을 꽉 채운 파랑 위에 잠시 아침 안개에 숨어서 낮게 호흡하던 호수 하나가 오버랩 되었다가 사라진다. 스페이스셔틀을 벗어나 지구와 서로 알몸으로 마주서면 다음은 이겨낼 수 없는 공포가 스며들었다. --- p.12 아마도 나는 죽음과 화해했나봐. 문득 죽음이 찾아온다고 해도 이제 똑바로 쳐다볼 수 있을 것 같아. 바라보면 무섭지 않아. 그에게 말을 걸어보고 싶어. 그러면 분명 뭔가 대답해줄 것 같아. 죽음이 대답해준다면 모두가 진실이겠지? 삶과는 다르게 거짓말할 이유가 없으니까. 지금은 죽음이 저기 앞에 펼쳐진 호수 같아. 다가가 발 담글 수 있는. --- p.105 돌아오지 말라고 내 두발 가지런히 묶던 냉기 사이로 하나씩 하나씩 신경을 잘라내며 다가오는 저 맨발의 굽소리가 나를 겨눈 것이라면 죽음은 옳은 쪽에서 온다 --- p.111 눈의 궤적을 거꾸로 추적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이 다 채우지 못한 하늘, 그곳에는 오로라가 있었다. 연한 초록으로 발광하는 휘장이 하늘 한편에서 천천히 흔들렸다. 천국에 문이 있다면 반드시 저런 형상이어야 했다. 에우리디케가 뒤를 따르고 있는지 돌아봐서는 안 되는 오르페우스의 눈앞에도 저렇게 죽음에서 벗어나는 오로라의 문이 있었을 것이다. --- p.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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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음직한 이야기’라는 소설의 정의를 그대로 따른다면, 『폴픽 Polar Fix Project』라는 쉽게 파악하기 어려운 제목을 가진 이 이야기는 충실한 소설이다. 그러나 소설의 화자는 실제 일어난 일이며 일어날 일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닐 수도 있다. 현재의 일상에서 한걸음도 벗어나지 못하고 사는 한 무명작가가 우연하게 30여 년 후 미래에 일어날 일을 눈으로 보게 된다. 누구도 믿지 않을 이 상황에 갈등하던 화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글로 옮기는 일뿐이라고 다잡으며 소설의 형식을 가진 이 글을 쓴다. 그렇다면 다시 소설이다.
이 소설의 작가 김병호는 원래 시를 쓰는 사람이다. 대학에서 물리학을 전공하였지만 문학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겨 1998년 『작가세계로』로 등단하였다. 이후 과학이 품고 있는 아름다움을 독특한 문장미학으로 풀어내고 있는 그의 시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려운 자신만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다. 그간 출간한 시집 『과속방지턱을 베고 눕다』와 『포이톨로기』에서 독특한 시적 형식과 새로운 내용, 그리고 낯선 미학을 만나볼 수 있다. 또 현대과학이 보여주는 깊은 내용들을 쉬운 문학적 비유와 푸근한 일상으로 풀어낸 과학 에세이 『과학인문학』을 읽어보며 다시 작가의 새로운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2013년 아르코문학창작기금을 수상하면서 우리가 흔히 SF라고 부르는 과학소설을 내놓았다. 『폴픽 Polar Fix Project』는 미래를 배경으로 하는 과학소설의 형식을 띠고 있다. 보통 과학소설은 과학에 비중을 두면 문학이 약하고 문학을 그 시작으로 하면 과학적 사실과 상상력이 빈약해지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 한국작가의 과학소설은 과학과 문학 모두를 탄탄한 기반으로 하면서 과학소설이라는 장르로 써낸 『죽음의 한 연구』라고 할 만한 내용을 선보이고 있다. 탐욕을 버리지 못한 인간 군상과 그를 막으려는 일군의 사람들,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지구와 세포 차원의 자살까지 우리가 생각하지 않았던 많은 죽음들이 등장한다. 또 이런 죽음들은 단순히 등장에 그치지 않고 모두 유기적으로 얽혀있으며 이를 통해 우리가 속해있는 더 큰 세계와 우리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어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 소설은 형식 또한 일반적인 소설의 것이 아니고 이야기 또한 전형을 따르지 않는다. 무겁고 암울한 분위기를 카펫처럼 깔아놓고 그 위에서 과학적 사실을 토대로 가까운 미래의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면서 죽음을 통찰하고 있는 것이다. 통찰은 철학적이고 과학은 미학을 가지고 있으며 문학으로도 묵직하다. 소설로 들어가는 순간 읽는 이는 지구궤도에서 우주유영을 하며 지구와 얼굴을 맞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고 다시 죽음과 눈 맞추고 있다는 자신을 발견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