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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전화
센시니 앙리 시몽 르프랭스 엔리케 마르틴 문학적 모험 전화 제2부. 형사들 굼벵이 아저씨 눈 또 다른 러시아 이야기 윌리엄 번즈 형사들 제3부. 앤 무어의 삶 감방 친구 클라라 조안나 실베스트리 앤 무어의 삶 |
Roberto Bol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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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시니의 답장은 명확하고 상세했다. 적어도 창작과 공모전에 관해서는 말이다. A4 크기 종이의 양면에 줄 간격 없이 쓴 글에는 일종의 지방 문학상 응모 전략이 담겨 있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니까 새겨들으라는 것이었다. 그는 생계유지에 도움이 되는 수입원이라고 지방 문학상에 경배를 올리며 허두를 뗐다(진담인지 농담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지방 관청이나 은행 등 후원자들을 가리켜 문학을 믿는 선량한 사람들이나 약간의 의무감에 찬 순수한 독자들이라고 일컬었다. 하지만 그림자 같은 책들의 유일한 독자(어쩌면 읽지도 않았겠지만)일 선량한 사람들의 교양 수준에는 일말의 기대도 품지 않았다. 그는 되도록이면 많은 공모전에 참여하라고 충고했다. 그렇지만 미리 조심해야 할 부분도 있다고 덧붙였다. 예컨대, 하나의 단편으로 비슷한 시기에 수상작이 결정되는 세 개의 공모전에 응모하려면 각기 제목을 바꿔서 보내라는 것이었다.---「센시니」 중에서
B는 X를 사랑한다. 물론, 불행한 사랑이다. B는 한때 X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흔히들 생각하고 말하듯이 말이다. 하지만 X는 B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그것도 전화로 이별을 알린다. 당연한 일이지만 처음에 B는 괴로워한다. 그러나 언제나 그런 것처럼 점차 마음을 추스른다. 드라마 대사처럼 삶은 지속되는 법이다. 그리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하릴없던 어느 날 밤에 B는 두 통의 전화를 거쳐 X와 통화하는 데 성공한다. 스페인 땅의 끝과 끝을 오가는 목소리에서 둘 다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느낀다. 다시금 우정이 싹트고 며칠 뒤에는 서로 만나기로 약속한다. 두 사람은 모두 이혼하고 새로운 병에 걸리고 몇 번의 좌절을 겪은 처지였다. X의 도시로 향하는 기차를 탈 때까지만 해도, B는 아직 X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전화」 중에서 - 그런데 우리 경찰서에 있던 그 고등학교 동창 기억나? - 기억나고말고. 이름이 뭐였더라? - 수감자 틈에 녀석이 있는 걸 내가 발견했지. 직접 얼굴을 보지 못했는데도 말이야. 자네는 두 눈으로 직접 보고도 못 알아봤잖아. - 그때 우리는 벌써 스무 살이었어, 이 친구야. 그 괴짜의 얼굴을 못 본 지 적어도 5년은 지났을 때라고. 그 친구 이름이 아르투로였던 듯싶어. 녀석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기는 매한가지였어. - 그래, 아르투로가 맞아. 열다섯에 멕시코로 건너갔다가 스무 살 때 칠레로 돌아왔지. - 지지리도 재수가 없었지. - 지지리도 재수가 좋았지. 우리 경찰서에 떡하니 떨어졌잖아. ---「형사들」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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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전화
센시니 바르셀로나의 야영장에서 야간 경비를 보다 잘린, 쥐 새끼보다 가난한 20대 청년이 한 문학 공모전을 통해 스페인에서 망명 생활을 하던 아르헨티나 작가 루이스 안토니오 센시니와 연이 닿는다. (글쓰기가 아닌) 공모전에 정진하라는 다소 이상한 편지로 시작하는 이들의 서신 교환을 둘러싼 두 작가의 인연은 과연 어디까지 지속될까. 「공모전 사나이」로 거듭나는 이 문학 청년은 센시니를 쫓고, 우리는 이 청년을 쫓는다. 실제로 쿳사 재단이 후원하는 산세바스티안 단편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 앙리 시몽 르프랭스 제2차 세계 대전 직후 일어난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실패한 작가이다. 파리의 저속한 신문에 글을 기고하고 지방 잡지에 시나 단편 나부랭이를 발표하며 근근이 생계를 이어 가는 작가라는 말씀이다. 원고를 보낼 때마다 퇴짜를 맞는 이 작가는 1940년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이후 자신의 영토(조국)가 어디인지 깨닫는다. 그가 발을 디뎌야 할 곳은 엉터리 작가들과 원한에 사무친 작가들, 곧 삼류 작가들의 땅인 것이다. 레지스탕스에 가담한 르프랭스는 단순한 운반이나 소규모 테러 등을 감행하며 글쟁이들을 돕지만, 이상하게도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정의할 수도 없는 거부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르프랭스는 마음속으로 자신이 삼류 작가라는 것을 끝내 인정한다. 동시에 일류 작가들도 삼류 작가들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엔리케 마르틴 시인은 무슨 일이든 견뎌 낼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파멸과 광기와 죽음으로 이어지는 길이다. 엔리케 마르틴은 1953년생으로 카스티야어와 카탈루냐어로 시를 쓴 시인이다. 전력투구로 모든 의지와 노력을 쏟아 부으며 간절하게 시인이 되기를 열망했던 남자다. 고집스러운 집념, 까짓 거 다 덤비라는 기세로 친구에게 암호문을 작성해 보내곤 하던 그는 벽을 가득 채운 숫자들, 해독 불가능한 수식, 이어 다음의 한 마디를 남긴 채 자살한다. 「아는 자들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리고 소포 하나. 소포 안에는 2절지 크기의 종이 50장이 들어 있었다. 모두 손으로 직접 쓴 시 뭉텅이였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다. 문학적 모험 작가 B는 알아볼 수 없게 가면을 덧씌워서 작가들을 조롱하는 책을 쓴다. A와 같은 특정한 유형의 작가들을 조롱하는 단편집이다. 그는 어떤 단편에서 동갑내기 작가 A와 엇비슷한 인물을 그려낸다. 무엇보다 명성을 얻었고, 다음으로 돈까지 쥐었고, 심지어 독자층도 두터운 작가 말이다. 명성이나 돈과는 거리가 멀고 삼류 문예지에 시를 발표하는 B와 천양지차인, 성인군자인 양 점잔을 빼는 A의 글을 그악스런 독자인 B는 도저히 참아 줄 수 없다. B는 단편 중 하나에서 A를 이름을 바꿔 조롱하는데, A는 신문에 이 작품을 열렬히 칭찬하는 글을 발표한다. B의 책은 소리 없는 베스트셀러의 반열에 오르고, B는 A를 만나러 간다. 전화 B는 X를 사랑한다. 물론 불행한 사랑이다. X는 B에게 전화로 이별을 통보하고, 몇 년의 시간이 흐른다. 어느 날 밤 B는 두 통의 전화를 거쳐 X와 통화하는 데 성공한다. 스페인 땅의 끝과 끝. B는 X의 도시로 향하는 기차를 탄다. 그리고 도착해서 사랑을 나누고, 돌보고, 떠나 달라고 요구받고, 떠나고, 다시 전화한다. 그리고 B가 앞으로 다시는 전화하면 안 된다는 것을 확실히 깨달을 즈음, 어느 날 누군가 B의 집 문을 두드린다. 사흘 전에 스페인 땅 한쪽 끝에서 누군가 X를 살해했다고 한다. B는 다시 X의 도시로 향한다. X의 오빠를 만나고, 바르셀로나로 돌아오고, 일주일 뒤 범인을 알리는 전화를 받는다. B는 덩그러니 홀로 남는다. 제2부. 형사들 굼벵이 아저씨 크리스탈 서점과 소타노 서점을 오가며 책을 훔치고, 오전 10시면 시내 영화관에서 조조 영화를 보곤 하던 내 이름은 아르투로 벨라노이다. 나는 아침이면 크리스탈 서점에 처박혀 책을 되작이다가 알라메다 공원의 벤치에 앉아 있는 아저씨를 보았다.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나무 틈에 앉아 조용히 허공을 응시하는 아저씨의 모습은 하얀 굼벵이 같았다. 특별히 하는 일도 없이 눈을 계속 뜬 채 담배만 뻐금뻐금 빨면서 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서점 근처 공원 안쪽에서 영화를 촬영하는 사람들을 발견한다. 볼라뇨가 실제로 멕시코시티에 살 때 자주 들렀던 서점들, 그리고 단편의 화자처럼 손버릇이 나빴던 청년 볼라뇨를 둘러싼 추억. 눈 나는 5년 전에 바르셀로나 타예르스 거리의 술집에서 그 친구를 처음 알게 되었다. 그 친구도 이역만리 땅 칠레에서 태어났던 것이다. 깡마른데다 키는 똥자루만 하고 피부는 가무잡잡한 사내, 로헬리오 에스트라다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칠레 공산당의 핵심 지도자 중 한 사람을 아버지로 둔 그는 1974년 정초에 가족과 함께 모스크바에 도착. 체육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체육 교사가 됨. 로저 스트라다라는 이름 아래 끊임없이 사고를 치고 다닌 그는 어떤 운동선수 코치의 조수로 일하며 뒷돈으로 월급을 불렸다. 스포츠 도박, 마약과 매춘 알선에 몸담고 암시장과 유흥업소를 오가던 그는 모스크바 갱들과 어울리다가 보스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결국 보스를 죽인다. 우여곡절 끝에 바르셀로나로 건너와 사립학교에서 체육 교사로 근무하게 된 그는 다시 창녀들과 몸을 섞고 술집을 드나든다. 그리고 밤이 되면, 러시아와 모스크바를 그리워한다. 또 다른 러시아 이야기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러시아 전선에서 싸웠던 청색 사단 소속의 병사 이야기. 세비야 출신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러시아 땅까지 이르게 된 그는 자신을 일컫는 「코르체(신병)」이라는 단어를 「찬트레(성가대 지휘자)」라는 단어로 받아들이는 바람에 정말로 성가대 지휘자가 된다. 이어 부상을 당해 군 병원에 입원했다가 엉뚱한 기차표를 지급받고 나치 친위대 파병 대대에 도착한 그는 러시아 병사들의 습격을 받는다. 그런데 고문 중에 그가 내뱉은 「코뇨(씨발)」이라는 단어가 「쿤스트(예술)」로 둔갑해 그들 귀에 들어가고, 병사는 살아남는다. 윌리엄 번즈 캘리포니아 주 벤투라 출신의 윌리엄 번즈가 소노라 주 산타테레사의 경찰 판초 몬헤에게, 몬헤가 다시 화자에게 들려준 이야기. 인생의 암울했던 시기에 윌리엄 번즈는 두 명의 여자를 따라나선다. 또래의 나이 지긋한 여자, 그리고 새파랗게 젊은 여자. 윌리엄 번즈는 산동네 변두리로 휴가를 떠나는 그녀들을 한 살인자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길을 따라나선다. 그녀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자를 피해 다니고, 이 남자로부터 그녀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윌리엄 번즈는 우여곡절 끝에 살인자가 되고, 결국 여섯 달 뒤 신원 불명의 사람들에게 살해당한다. 형사들 칠레 형사 두 명이 나누는 대화 형식의 단편. 선호하는 무기 이야기부터 시작해 그들 손을 거쳐 간 여러 범죄자들 이야기, 그리고 1973년 「그날」에 그들이 「이 나라의 진정한 남자들」을 죽인 이야기에 이어 열다섯에 멕시코로 건너갔다가 스무 살 때 칠레로 돌아온, 볼라뇨를 모델로 한 인물인 고등학교 동창 아르투로 벨라노를 만났던 이야기까지 주절주절 늘어놓는 두 형사의 잡담. 「칠흑 같은 암흑의 순간에도 한 줌의 희망은 있다.」 「희망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지.」 「희망만이라도 소중히 지켜 내야지.」 제3부. 앤 무어의 삶 감방 친구 우리는 같은 해 같은 달에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진 서로 다른 감옥에 있었다. 1950년에 빌바오에서 태어난 소피아는 갈색 피부에 키가 작달막하고 매우 아름다운 여자였다. 1973년 11월에 내가 칠레에서 체포되었을 때, 소피아는 아라곤의 감옥에 수감된 상태였다. 당시에 소피아는 사라고사 대학에서 생물학인가 화학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몇 명을 제하고 동기생 전부가 감옥에 가게 되었다. 이 두 잠자리 친구, 그리고 그녀의 또 다른 잠자리 친구인 공산당 친구, 전남편 에밀리오와 그의 애인 누리아를 둘러싼 이야기. 어느 날, 소피아는 작별 쪽지를 남긴 채 훌쩍 떠난다. 그리고 그녀가 새 애인과 함께 에밀리오를 죽이려 들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나는 알 수 없는 충동에 이끌려 소피아를 만나러 간다. 클라라 클라라는 풍만한 가슴에 다리가 가느다란 푸른 눈의 여자였다. 나는 미친 듯이 그녀를 사랑했지만, 그녀가 스페인 남부 도시로 돌아가자 모든 것이 어긋나기 시작했다. 당시 클라라는 열여덟이었고 고등학교를 그만둔 뒤에 학원에서 음악을 공부하며 은퇴한 풍경화가에게 그림을 배우는 중이었다. 어느 날, 그녀가 미인 대회에 참가한다는 편지가 왔다. 나는 2등으로 입상한 클라라를 만나러 갔지만 결국 클라라는 시집을 간다. 그리고 1년인가 2년 후에 이혼을 하고, 다른 남자와 동거했다 바람을 피워 헤어지고, 그 사이사이 우울증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혼남 파코를 만나 재혼해 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암에 걸린 클라라는 어느 날 돌연 사라진다. 조안나 실베스트리 서른일곱 살의 포르노 배우, 조안나 실베스트리가 지금 님므의 레트라페즈 병원 침대에 누워 있다. 침대 맡을 지키는 어떤 칠레 형사의 이야기를 듣는 참이다. 이 남자는 누구를 찾는 것일까? 조안나 실베스트리는 1990년 즈음 자신이 인생의 정점을 달렸던 기억을 되짚어 본다. 로스앤젤레스에서 영화를 촬영했던 기억. 그 기억 가운데 캘리포니아 최고의 포르노 스타였던, 그러나 지금은 병마와 싸우고 있는 잭 홈스가 있다. 이제 조안나는 병든 잭을 만나러 간다. 볼라뇨의 장편소설 『먼 별』의 한 부분을 확장한 작품. 앤 무어의 삶 앤 무어라는 한 여성, 그 일기와도 같은 이야기. 1948년 시카고에서 태어나고 3년 뒤 몬타나 주로 이사해 그곳에서 성장한 앤은 언니 수전의 남자 친구가 부모님을 살해한 사건과 얽힌, 평탄하면서도 기묘한 어린 시절을 보낸다. 열일곱 때 학업을 위해 샌프란시스코로 떠난 앤은 화가인 폴을 만나 동거하다 멕시코로 여행을 떠나고, 루벤이라는 한 남자와 친하게 지내게 되고, 결국 앤은 루벤과 함께 머문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샌프란시스코로 돌아가 찰스라는 흑인과 사귀고, 금세 헤어진다. 그리고 한국인 토니를 만난다. 토니와는 결혼까지 했지만 또다시 헤어지고, 토니는 자살한다. 그 소식을 들은 다음 날 아침 앤은 멕시코시티로 향한다. 너무 많은 남자를 만나고 너무 많은 직업을 전전했던 앤은 불현듯 스페인으로 향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앤을 만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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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시한폭탄」, 로베르토 볼라뇨Roberto Bolano의 단편소설집 『전화』가 열린책들에서 출간되었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단편집 3권 중 첫 권에 해당하는 『전화』는 볼라뇨가 자신의 초기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펴내기 1년 전인 1997년 출간해 칠레의 산티아고 시상 및 스페인의 에랄데 소설상을 휩쓴 작품이다. 시인, 작가, 탐정, 군인, 낙제한 학생, 러시아 여자 육상 선수, 미국의 전직 포르노 배우와 그 외의 수수께끼 같은 인물들이 등장하는 14편의 이야기들은 작가의 삶(1부), 폭력(2부), 그리고 여성의 일생(3부)에 대한 볼라뇨만의 독특한 목소리를 들려준다. 또한 이 단편들은 작품 『전화』의 틀을 넘어 볼라뇨의 또 다른 단편소설 및 장편소설들과 각기 짝을 지음으로써 로베르토 볼라뇨 작품 세계의 특징 중 하나인 상호텍스트성을 완성한다.
이렇듯 볼라뇨 세계를 구축하는 등장인물들은 대개 서로 멀리 떨어져 있거나 한쪽이 실종된 상태다. 이렇게 물리적인 거리가 만들어 내는 여러 가지 상황들 가운데 심리적 거리가 생기고, 이러한 사람들의 상황과 관계가 만들어 내는 거리감과 그에서 비롯되는 정체를 알 수 없는 공포가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전화나 편지 정도로만 간간이 소통하는 이들의 삶을 볼라뇨는 철저히 제3자의 입장에서 기술해 나간다. 상황 자체를 보여주는 데 주력하는 볼라뇨의 이러한 태도는 왜 그가 『칠레의 밤』, 『부적』, 『먼 별』 등 그간 자신의 작품 가운데 칠레와 멕시코 등의 정치적 현실을, 쿠데타 주위를 직접적으로 파고들기 보다는 맴도는 쪽을 택했는지 깨닫게 한다. 즉 당시 쿠데타의 실제 공포를 직접 전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 아래, 독자인 우리로 하여금 간접적인 공포 정도를 감지하고 경험할 수 있게끔 한 작가적 선택인 것이다. 이렇듯 볼라뇨의 단편들은 볼라뇨의 또 다른 장편들을, 나아가 볼라뇨의 작품 세계 전체를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놓여 있는 징검다리와도 같다. 볼라뇨의 자전적 이야기 『전화』의 각 이야기에는 작가 볼라뇨의 실제 삶이 어른거린다. 『전화』의 제1부 첫 단편으로 수록되었으며 출간 당시 단행본으로 따로 선보이기도 했던 작품 「센시니」에서는 온갖 문학상 공모전에 응모하며 이로써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생계를 간신히 유지해 나가는 아르헨티나 작가 센시니가 등장하는데, 이는 볼라뇨가 작가로 인정받기 전의 젊은 시절 모습이기도 하다. 실존 인물이었던 아르헨티나 소설가 안토니오 디 베네데토(1922~1986)를 모델로 삼은 이 소설은 1983년 발렌시아 시가 주관한 알팜브라 단편 경연 대회에서 그와 알게 된 볼라뇨가 이후 서신을 교환하며 친분을 유지했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소설 말미에 수록되었듯 실제로 쿳사 재단이 후원하는 산세바스티안 시 소설상을 수상하며 볼라뇨식 정점을 찍은 이 작품은 1980년대 초 중남미 역사가 독재에 의해 파괴된 가운데 오히려 문화는 태동하던 시절, 중남미 붐 세대를 대표하는 작가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노벨 문학상을 받던 시절, 실제 중남미 작가들의 서글픈 삶을 그리고 있다. 제2부를 여는 단편 「굼벵이 아저씨」에서는 「책 도둑」 볼라뇨가 등장한다. 볼라뇨가 멕시코시티에 살 때 자주 들렀던 서점 두 곳, 「크리스탈(유리) 서점」과 「소타노(지하) 서점」을 둘러싼 이 이야기는 카뮈의 『전락』을 비롯해 프랑스 문학에 집착했던 볼라뇨가 어떻게 책을 훔치며 하루하루를 보냈는지를 들려준다. 아침 8시 반쯤 크리스탈 서점에 도착해 책을 되작이다 10시쯤 조조 영화를 보고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던 젊은 시절 볼라뇨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한편 2부의 마지막 단편 「형사들」에서는 이후 스무 살의 볼라뇨를 만날 수 있다. 멕시코에서 조국 칠레로 돌아가 아옌데의 사회주의 혁명을 지지하는 좌파 진영에 가담했다가 쿠데타가 일어나자 콘셉시온 근처에서 체포되어 투옥되고, 마침 어릴 적 친구였던 간수의 도움으로 8일 만에 석방되었던 행적을 형사들의 대화 가운데 녹여 쓴 작품이다. 볼라뇨는 이렇듯 자신의 실제 삶을 각각의 이야기 속에 녹이는 가운데 중요한 인물을 등장시킨다. 로베르토 볼라뇨의 이름을 닮은 「아르투로 벨라노」가 바로 그 인물로, 그는 전작 『먼 별』에서 처음 등장한 바 있는 볼라뇨의 얼터 에고로 볼라뇨의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에서는 주인공 역할을 한다. 『전화』 속 1인칭 화자들은 거의 대부분 아르투로 벨라노인데, 과연 그가 한 사람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볼라뇨의 각 작품마다 등장하는 이 인물이 경험한 삶의 내용들이 각기 다 다르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는 볼라뇨 자신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전하는 인물인 동시에 소설 속 등장인물로서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인물인 아르투로 벨라노는 볼라뇨 작품을 상징하는 이이다. 자전적 요소와 픽션적 요소가 결합한 창조물인 볼라뇨의 작품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나 볼라뇨는 이를테면 일기와도 같은 사변적인 작품을 쓰고자 했던 것은 아니다. 어느 인터뷰에서 밝힌 바 단순히 기억을 되살린다는 차원에서 자전적 요소를 불러내 픽션을 만들어 내기 위한 하나의 기능으로 활용하는 것, 이것이 바로 볼라뇨식 창작 기법이다. 변방의 삶 - 방랑자들, 그들의 어긋난 세계를 찾아서 Q : 작가가 되지 않았다면 무엇이 되고 싶습니까? A : 작가가 되는 것보다는 살인 사건을 담당하는 형사가 되는 편이 훨씬 좋을 것 같습니다. 정말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밤중에 혼자 범죄 현장을 다시 찾아가고, 귀신을 보고도 겁먹지 않는 형사 말입니다. 아마 그렇게 된다면 정말 미쳐 버릴지도 모르겠지요. 하지만 경찰이기 때문에 자기 입에다 한 방 먹이면 그만입니다. - 『플레이보이』지 인터뷰 중에서(볼라뇨 에세이집 『괄호 치고』에 수록) 대표작 『야만스러운 탐정들』을 읽고 난 후라면 더욱 확실해 질 사실이지만, 볼라뇨는 자신의 작품을 읽는 독자들을 결국 탐정으로 만들고 마는 수법으로 독자들을 매혹한다. 이는 볼라뇨의 모든 작품에 드리워진 탐정 소설의 기운에 기인한 것으로, 단편집 『전화』에서도 이러한 매력적인 요소는 어김없이 드러난다. 볼라뇨의 사람들은 결국 멀리 떨어진 사람들, 실종된 사람들, 망명자들이다. 서로 줄곧 편지만 주고받다 결국 화자와 얼굴을 대면하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떠난 가난한 작가(단편 「센시니」), 모스크바와 스페인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칠레인(「눈」), 자신의 부대에 머물지 못하는 군인(「또 다른 러시아 이야기」), 여러 남자에게 몸을 맡기는 포르노 여배우(「조안나 실베스트리」) 등 볼라뇨의 사람들은 「정착」과는 거리가 멀다. 볼라뇨는 이렇듯 대개 세상의 주인공이라 여기기 어려운 이들, 변두리의 삶을 사는 이들을 찾아 자신의 주인공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방랑자들의 삶을 우리 앞에 던져 놓고, 읽는 이로 하여금 그들의 삶을 따라 나서도록 한다. 그 과정 가운데 우리는 등장인물을 끝내 발견하지 못하기도 하고,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어렴풋한 실루엣 정도만 감지해 내기도 한다. 우리가 이들의 삶을 꿰뚫지 못하는 이유는 이들의 일생이 일반적인 세계에 자리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언가 뒤틀리고 어긋난 세계, 그곳이 바로 이 방랑자들이자 망명자들이 머무는 곳이며, 볼라뇨가 우리를 부르는 곳이다. 이러한 로베르토 볼라뇨식 「탐정 놀이」는 이제 시작이다. 볼라뇨가 여기 던져 놓은 14가지 짤막한 단서들은 볼라뇨의 보다 긴 이야기들을 통해 다채롭게 변주될 예정이다. 그 수수께끼를 푸는 것은 물론 읽는 이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