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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더 시대의 유럽 | 왕가 가계도 | 차례 | 튜더 가의 5대 왕 | 화보 | 연표| 머리말 | 프롤로그_ 보스워스 전투
1부 지나친 튜더 가의 행운 1485~1532 Chapter 01 헨리 튜더의 행운 헨리 7세의 위대한 유산 · 헨리 8세의 등장 · 첫 번째 전쟁과 토머스 울지 역사적 배경 - 튜더왕조의 기원 Chapter 02 왕의 중대사 앤 불린의 치명적 매력 · 결혼 무효화를 향한 헨리의 집념 역사적 배경 - 스페인과의 관계 Chapter 03 좌절과 혼란 결혼 무효화 공판 역사적 배경 - 당시의 잉글랜드 Chapter 04 근본적인 변화 토머스 울지의 몰락 · 헨리 8세, 교회보다 우위에 서다 역사적 배경 - 전통 교회 Chapter 05 또 다른 방책 돌이킬 수 없는 교회와의 갈등 역사적 배경 - 입궁과 출세 - 불린 가의 야망 Chapter 06 혁명의 징조 위기의 토머스 모어 역사적 배경 - 기회의 창 Chapter 07 청천벽력 왕의 남자들, 그들의 숙명 · 헨리의 최후통첩 역사적 배경 - 튜더 왕조 통치하의 의회 Chapter 08 항복 성직자들의 항복 역사적 배경 - 헨리 8세와 마르틴 루터의 다른 종교 개혁 Chapter 09 완성 토머스 크랜머의 출현 · 헨리와 앤 불린의 비밀 결혼 ·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선언 2부 몬스터 1533~1547 Chapter 10 첫 번째 희생자 왕위 계승법과 성직자 복종법 역사적 배경 - 런던탑의 희생자들 Chapter 11 지상권 회칙파의 수난 · 반역법 공표 역사적 배경 - 수도사들과 수녀들 Chapter 12“우리 모두 죽게 될 것이오” 거룩한 은둔자, 존 휴턴의 순교 · 왕권에 의해 처형된 최초의 주교, 존 피셔 역사적 배경 - 베스트셀러 Chapter 13 “내 친구들이 그런 배려를 받지 않기를” 토머스 모어의 죽음 · 헨리, 마침내 교회를 지배하다 역사적 배경 - 교황 Chapter 14 거의 신과 같은 지위 캐서린의 죽음 · 앤 불린의 몰락과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 · 수도원 폐쇄 · ‘주님 아래 오직 그 분’ 역사적 배경 - 먹는 것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 Chapter 15 반란과 배반 은총의 순례 · 헨리의 두 얼굴 · 에드워드의 탄생과 제인 시모어의 죽음 역사적 배경 - 왕들의 경쟁 Chapter 16 헨리의 최후 헨리 치세 말기의 폭정 · 폭군의 최후 3부 너무 일찍 즉위한 왕과 너무 늦게 즉위한 여왕 1547~1558 Chapter 17 새로운 시작 헨리 사후의 새로운 권력 · 에드워드 6세와 서머셋 공작의 섭정 역사적 배경 - 권력기구 Chapter 18 잉글랜드의 두 번째 종교개혁 두 번째 종교개혁 · 서머셋 정부의 혼란 · 존 더들리, 권력을 잡다 역사적 배경 - 칼뱅 Chapter 19 혁명과 쿠데타 에드워드 6세 사후의 후계 구도 · 존 더들리의 몰락과 여왕 메리의 등극 역사적 배경 - 메리의 성장과정 Chapter 20 또 다른 시작 여왕 메리의 신랑 후보군 · 메리 여왕 시대의 최초의 반란 역사적 배경 - 학교와 교육 Chapter 21 때 이른 최후 여왕 메리의 결혼 · ‘피의 메리’ 여왕의 죽음과 반(反)종교개혁의 최후 4부 생존자 1588~1603 Chapter 22 또 한 번의 새로운 시작 엘리자베스 시대의 개막 · 구교와 신교 사이에서의 여왕의 선택 역사적 배경 - 트렌트 공회의 Chapter 23 다시, 후계자 문제 폭풍의 핵, 여왕의 혼인문제 · 더들리 가문의 부상 역사적 배경 - 잉글랜드 연극의 흥망성쇠 Chapter 24 재앙의 연속 비운의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 백작들의 반란과 교회의 분할 역사적 배경 - 오스만 제국 Chapter 25 공격, 대응, 도발 윌리엄 세실의 오판 · 종교분쟁의 소용돌이 역사적 배경 - 고문 Chapter 26 혼란,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전쟁 네덜란드의 반란과 전쟁의 시작 · 엘리자베스의 승리 역사적 배경 - 무전유죄 유전무죄 Chapter 27 마지막 총신 새로운 총아 에식스 백작, 로베르트 데브뢰 역사적 배경 - 세실 가의 대승리 Chapter 28 총신들의 권력 투쟁 권력 투쟁의 전조 · 에식스 백작의 운명 Chapter 29 종막 튜더 드디어 막을 내리다 찾아보기 |
G.J. Mey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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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는 운명이 가져다준 커다란 기회를 포착해 성공으로 이끌었고, 남은 인생을 바쳐 그 동안 자신이 이룬 것들을 조심스럽게 통합해 나갔다. 그는 군사적인 영광을 조금도 중시하지 않았으며, 유럽의 유력 가문들로부터 존경을 받았지만 그들에게 특별히 좋은 인상을 주고 싶어 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거의 명성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의 통치 기간도 다른 유명한 왕들의 통치 기간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가 무대를 세운 덕분에 그의 아들과 그의 손녀가 거의 1세기 동안 차례차례 활약을 보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왕위에 오른 후 헨리는 자신의 입지를 확고히 다졌다. 이 업적은 결코 작은 것이 아니다. 보스워스 전투가 일어나기 전 백 년 동안 플랜태저넷 왕가의 왕위 계승 후보들이 서로 충돌하며 죽고 죽이던 모습을 되새겨보면 그 대단함을 짐작할 수 있다.
서자로서 왕가의 피를 완전히 물려받지 못한 헨리는 적자로 인정된 후에도 법적으로 왕위 계승 후보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왕이 되고 나서 그 왕권을 오랫동안 유지할 가능성이 낮았다. 그러나 그는 차근차근 체계적으로 자신이 진정한 왕이며 결코 얕볼 수 없는 강한 인물임을 잉글랜드와 세계에 알려나갔다. 그는 오랜 측근들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고, 반응을 유발하기 위해 너무 서두르지 않고, 경쟁자들을 제거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가 포착하는 등 신중하게 행동했다. --- p.49 「헨리 튜더의 행운」중에서 "폐하, 믿을 수 있는 친구도, 평범한 의논 상대도 없는 이방인인 저를 불쌍히 여겨주시길 간청 드립니다. 주님께 맹세코 저는 언제나 폐하의 충실한 아내였고, 폐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을 변함없는 제 의무로 삼아왔고, 폐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저의 친구이든 적이든 이유를 불문하고 좋아했습니다. 저는 수년간 폐하의 아내였고, 많은 아이들을 안겨드렸습니다. 제가 폐하의 침소에 들었을 때 처녀였다는 사실은 주님께서 알고 계시니 부디 양심을 걸고 진실을 말씀해주십시오. 제게 죄가 있다면 오명을 안고 떠나겠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를 공정하게 대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애원인 동시에 도전이기도 했다. 캐서린은 대답을 기다렸지만 헨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키 작고 살찌고 나이 들어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전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녀가 이렇게 품위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잉글랜드 왕들의 후손이며 강력한 왕과 위대한 왕비의 딸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캐서린은 헨리가 있는 쪽을 향해 깊게 허리 숙여 절한 뒤 출구로 걸어갔다. 수행원이 그녀를 부르려 하자 그녀는 멈춰 서서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남편의 뜻을 거스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조용한 법정을 향해 그녀는 말했다. ??처음으로 이 같은 불복종에 대해 용서를 구하고자 합니다.?? 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문을 나섰다. 자리로 돌아가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무시했다. 이때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때도 헨리는 결혼 당시 처녀였다는 캐서린의 주장에 반박하지 않았다. --- p.115 「좌절과 혼란」중에서 이 모든 혼란의 한가운데에는 작고 고독한 에드워드 6세가 있었다. 그는 어머니를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세상에서 가장 위대해 보이는 멀기만 한 아버지를 숭배하면서 자랐으며, 아버지와 두 이복누나와 다른 집에서 일생의 대부분을 보냈다. 캐서린 파는 세심하고 다정한 새어머니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헨리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는 그녀의 관심도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에드워드는 그의 일부 가정교사나 신하들이 주장했던 것처럼 굉장한 천재는 아니었을지 몰라도 평균 이상의 지성을 갖추고 있었다. 또한 그는 매우 성실해서, 엄격한 교육 과정과 위대한 왕의 상속자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에 너무나 진지하게 임했다. 에드워드가 그를 아버지 못지않은 위대하고 훌륭한 통치자로 성장시키려 한 학자들에게 조금 덜 순종적이었다면, 그가 아이로 있을 수 있는 시간과 공간이 더 많았다면, 아마도 그의 삶은 조금 더 나아졌을 것이다. 약 40년 만에 열린 잉글랜드 왕의 대관식은 성대했지만 어린 소년이 혼자 감당하기에는 너무 압도적이었다. 헨리가 죽고 3주 후, 그리고 방부 처리된 그의 시신이 윈저 성의 세인트 조지 교회St. George s Chapel 지하실에 매장된 며칠 후, 대관식에 앞서 4시간 동안 행렬이 이어졌다. 새로운 왕은 금과 은으로 장식된 옷을 입고 공단과 진주를 걸친 말을 타고 수도의 시민들 앞을 행진했다. 다음날인 2월 20일, 에드워드는 어마어마한 행렬에 둘러싸여 웨스트민스터 대성당으로 들어갔다. 그의 한쪽 옆에는 주교가, 다른 한쪽 옆에는 백작이 있었고, 진?색 예복의 긴 옷자락은 존 더들리와 윌리엄 파, 그리고 외숙부 토머스 시모어가 잡고 있었다. 이곳에서 그는 성유를 바르고 왕이 되었다. --- pp.447~448 「새로운 시작」중에서 "백성들은 들으라. 나는 이 결혼과 관련하여 추밀원의 조언 없이는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또한 나 개인의 즐거움을 위해 남편을 맞이하는 일도 결코 없을 것이다. 나는 지금까지 처녀로 살아왔고 주님의 은총이 있기에 지금도 그렇게 살 수 있음을 의심치 않는다. 이 결혼이 백성들에게 해가 되거나 나의 위신을 떨어뜨린다고 생각했다면 나는 결코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왕의 이름을 걸고 약속하건대, 상원과 하원이 판단하기에 나의 결혼이 왕국 전체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평생 결혼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 백성들의 적이자 나의 적인 이 반란자들에게 굳건히 맞서라. 나는 조금도 그들이 두렵지 않으니 너희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잉글랜드 왕족 역사에서 그 어느 때보다 가장 멋진 순간이었다. 메리는 군중의 환호를 받았고 몇 시간 만에 2만 명 이상이 그녀와 도시를 지키겠다고 자원했다. 다음 날 아침 와이엇은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지지자들은 여왕을 옹호하는 이들의 저항에 부딪혀 조금씩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그는 계속 진군하여 세인트제임스 궁전을 통과했다. 메리의 결단력이 없었다면 궁중 신하들 전체가 겁에 질려 허둥지둥 달아났을 것이다. 마침내 2월 7일 아침 나머지 봉기군이 모두 해산했다. 와이엇은 칼을 버리고 항복했다. 메리는 아슬아슬한 위기에 처해 있었지만 상황이 종료되고 나자 그녀의 위치는 더욱 강화되었다. 와이엇의 초반 성공이 봉기의 확산으로 이어지지 않았다는 사실과 여왕이 다시금 보여준 용기는 그녀의 지지자들에게 용기를 북돋워주고 반대자들의 추가적인 모의를 단념시키기에 충분했다. 반 년 사이에 메리는 두 번째 시험을 치렀고 백성들의 충성심 역시 시험대에 올랐다. 결과적으로 어느 쪽에서도 부족함이 발견되지 않았다. --- pp.544~545 「또 다른 시작」중에서 1580년대 초의 엘리자베스의 불명확하고 우유부단한 행동과 애매모호한 정책들은 그녀를 정치적, 군사적, 종교적 갈등에 휘말리게 했다. 이런 갈등이 모여 1585년에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은 너무 길어 보였던 그녀의 재위기간 마지막 18년 동안 계속되었다. 대부분의 문제는 정부의 가장 영향력 있고 호전적인 신교도들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들은 엘리자베스로 하여금 잉글랜드에 가톨릭이 살아남으면 국내 평화뿐만 아니라 여왕의 생명까지 위험해진다고 믿게 만들기 위해 애썼다. 1581년에 월싱엄은 백작들의 반란 이후 북부 지역 관리를 맡고 있는 엘리자베스의 사촌 헌스던 경에게, 이 지역에 많이 남아 있는 가톨릭 신자들의 충성심을 더 나쁘게 평가하는 내용으로 보고서를 수정해달라고 부탁했다. 같은 해에 의회는, 가톨릭 사제의 미사 집전을 대역죄로 규정하고 누구든 미사에 참석하면 평생 감옥에 가두고 재산을 몰수한다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당시 세실은 버흘리 남작Baron Burghley이 되어 상원을 지배하고 부하들을 통해 하원도 조종하고 있었다. 이 법안은 엘리자베스가 승인하려 했던 것 이상이었다. 또한 ??국교 기피??에 대한 처벌은 재산 몰수 대신 매달 20파운드의 벌금으로 축소되었는데, 이 액수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낼 수 없는 큰돈이었기 때문에 결국 재산 몰수와 다를 바가 없었다. 여왕은 구교도들을 너무 관대하게 대해 복음주의자들을 분노케 하거나 가톨릭 신자들을 너무 잔인하게 박해하여 파멸시키는 일을 피하려 애썼다. 이런 그녀의 노력 때문에 정책은 때때로 일관성이 없었다. 여왕은 새로운 방식을 도입해 가톨릭 신자들로 하여금 돈으로 면허를 산 후 신앙 활동을 함으로써 법적인 처벌을 피할 수 있게 해주었다. 뒤이어 그녀는, 잉글랜드에 들어오는 모든 사제들은 무슨 일을 하든 반역자로 간주한다고 선포했다. 가톨릭 신자들의 삶은 점점 더 힘들어졌다. --- pp.692~693 「혼란, 그리고 마침내 시작된 전쟁」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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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를 바꾼 튜더 왕조의 흥망사
천년의 스캔들, 튜더 왕조의 실체를 밝힌다. - 수십 년 만에 튜더 왕조를 한 권에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한 책 - 튜더 왕조가 잉글랜드를 통치한 기간은 3대(5명의 왕)에 걸쳐 총 118년에 지나지 않는다. 전후의 다른 왕조들에 비하면 매우 짧은 기간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른 군주들과 비교하기 어려울 만큼 세계사를 바꿔 놓았으며, 지금까지도 학자들의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학자들이 그들의 치세에 대한 평가를 내릴 때는 늘 신앙에 관한 문제가 거론되고 있으며, 실제로 튜더 가의 모든 왕이 국민들의 종교적인 합의를 원했고 그 합의가 자신들이 원하는 조건으로 이뤄지길 바랐다. 튜더 왕조의 시조 헨리 7세는 25년의 재위 기간 중 탁월한 지도력으로 튜더 왕조의 기틀을 다졌으며, '피의 메리'로 악명을 떨쳤던 메리 1세는, 그녀의 재위 기간이 좀 더 길었더라면 세계사를 다시 썼을 것이라는 평가를 받는 탁월한 통치자였다. 튜더 왕조의 핵심인물인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는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업적을 남겼지만, 단순한 통치자를 넘어 정치적 선전과 연기의 달인이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하다. 두 사람은 실제와 거의 연관성이 없는 허구의 자신을 만들어 놓고 그 뒤에 숨어 살았지만, 그럼에도 당대의 집단적인 생각에 성공적인 인상을 남겼다. 그들이 만들어낸 페르소나가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 그 페르소나가 고유의 매력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대를 초월하는 정치적 유용성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통치자의 개인적인 야망이 그 나라의 국민들과 나아가 역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으며, 그 야망이 역사의 흐름과 맞물려 긍정적인 부분으로 작용할 때도 있지만 국민적 합의를 외면한 정책은 필연적으로 국민들에게 참혹한 고통을 남길 수밖에 없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제시해주고 있다. 또한 튜더 왕조 외에도 계층 구조와 중세 가톨릭교회, 프랑스와 스페인과의 관계, 오스만 제국, 정치, 문화, 종교, 사회, 교육, 연극, 생활상 등 당시 잉글랜드를 포함한 유럽의 역사적 배경을 비중 있게 다룸으로써 책의 가치를 더 한층 돋보이게 한다. **튜더 왕조의 기원** 웨일스의 대지주였던 오언 튜더가 헨리 5세의 미망인 왕비 캐서린(발루아의 카트린)과 결혼해서 낳은 에드먼드 튜더가 플랜태저넷 왕가의 분가인 랭커스터 가문의 마거릿 보퍼트와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 헨리 튜더이다. 1470~1471년 군사적 격변의 와중에 헨리 6세와 그의 아들의 죽음으로 랭커스터 가문의 부계혈통은 완전히 끊어지게 되고, 플랜태저넷의 또 다른 분가인 요크 가문의 리처드 3세가 왕위를 쟁취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가 보스워스 전투에서 헨리 튜더에 의해 목숨을 잃음으로써 약 450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했던 플랜태저넷 왕조는 끝이 나고 랭커스터 가문의 모계혈통인 헨리 튜더가 1485년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헨리 7세이며, 튜더 왕조의 시조이다. 1대 왕; 헨리 7세 (재위 1485∼1509) 잉글랜드의 왕권을 과거 수대에 비해 훨씬 더 확고하고 강력하게 만들었다. 스스로를 엄격하게 통제했으며 언제나 베일에 쌓여있었다. 그는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귀족들의 자치권을 없애기 위한 장기적인 활동을 펼쳤는데, 새로운 귀족의 탄생을 막아 그의 치세 초기 55개였던 귀족 가문의 수는 말기에 이르러 42개로 줄였으며, 사법위원회를 설치하여 그에게 재산을 압수당한 귀족은 138명에 달했다. 또 그는 교회의 권력도 빼앗았으며 잉글랜드에서 주교직은 왕실에 공헌한 이들에게 주어지는 보상이 되었다. 이렇듯 헨리 7세는 재위 기간 25년 동안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들의 득세를 잠재우고, 왕실의 수입을 늘려 국고를 튼튼히 하였으며, 전쟁을 피하고 국내의 안정을 이뤄 튜더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2대 왕; 헨리 8세 (재위 1509∼1547) 헨리 7세와 요크의 엘리자베스 사이에 4남매 중 셋째로 태어났다. 잉글랜드에서 그보다 더 깊은 인상을 남긴 왕은 거의 없을 정도로 그가 이룬 업적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왕권신수설 사상이 퍼지고 있을 때 왕위에 올라 예술과 종교라는 수단을 통해 왕권의 존엄성에 관한 이론을 조직화했다. 캐서린 왕비와의 결혼무효 소송으로 인해 로마 교회와의 갈등으로 야기된 그의 종교 개혁은 마르틴 루터의 개혁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더불어 개신교의 확장을 앞당겼고, 장로교회의 탄생을 촉발시켰다. 더 나아가 그는 지상권, 취임세폐지법, 성직자 복종법 등을 시행하여 교황을 배척하고 자신이 지배하는 영국의 국교를 만들어 수장(잉글랜드 교황)을 자처했다. 항상 성공적은 아니었지만 그는 유럽 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며 스페인과 프랑스 사이의 적대적인 경쟁 속에서 국가의 안전을 위해 신중한 길을 걸었다. 또한 그는 상류 귀족의 개혁을 단행하는 과정에서 지방 신사계급 등의 신흥 상류계급을 탄생시킴으로써 훗날(찰스 1세) 이들의 세력에 의해 군주제가 전복되는 계기를 제공했다. 그러나 그는 어떤 군주도 꿈꾸지 못했던 왕권을 확립하기위해 공포정치를 시행해서 왕국을 수 세대에 걸친 분열과 혼란에 빠뜨렸고, 자신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백성들의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토머스 울지 등 최고의 측근들을 차례차례 죽였으며, 영국 국교회의 수립을 위해 토머스 모어, 존 피셔 등 당대의 최고의 학자 및 주교 등을 처형했다. 또 여섯 부인 중 두 명을 처형했다. 이렇듯 그는 잉글랜드 천년 역사에 유래 없는 피와 배신의 유산을 남겼다. 3대 왕; 에드워드 6세 (재위 1547∼1553) 헨리 8세와 세 번째 왕비 제인 시모어 사이에서 태어났다. 9세에 왕위에 올라 16세에 짧은 생을 마감했다. 어린 나이에 왕에 올라 당시 최고 실세인 어머니 오빠 서머셋 공작, 에드워드 시모어의 섭정을 받았다. 급진적인 종교 개혁가였으며, 언제나 그의 목표는 복음주의 개혁을 가속화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혁에 저항하는 구교의 보수주의자들을 한명도 죽이지 않았다. 구교 신봉자인 누나 메리와의 관계도 원만했으나 죽기 전에 잉글랜드를 구교에 넘길 수 없다는 신념으로 아버지 헨리 8세의 유언을 수정하여 신교 신봉자인 요크가의 상속인이자, 존 더들리의 며느리인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계승하고자 했다. 4대 왕; 여왕 메리 1세 (재위 1553∼1558) 헨리 8세와 첫 번째 왕비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잉글랜드 최초의 여성 통치자로서, 제인 그레이의 여왕 옹립을 위한 신교 세력의 반란을 잠재우고 극적으로 등극했다. 등극 6개월 후 다시 발생한 복음주의 세력의 반란을 물리치고 왕권을 굳건히 했다. 정략결혼의 일환으로 조카인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결혼했다. 그녀는 전통교회로 돌아가려는 정부에 저항하는 각계각층의 복음주의 신도 300명을 이단 혐의로 화형에 처해 '피의 메리'로 불렸다. 그러나 신앙 문제를 제외하고는 메리는 소통을 중요시 여겼고, 백성들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성과 열을 다한 통치자로 남아있다. 메리가 재위 5년만인 42세에 죽지 않고 더 오래 살았더라면 헨리나 엘리자베스를 뛰어 넘는 탁월한 통치자가 되었을 거라는 학자들의 견해가 지배적이다. 5대 왕; 엘리자베스 1세 (재위 1558∼1603) 헨리 8세와 두 번째 왕비 앤 불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지난 천년 동안 가장 뛰어났던 통치자로 평가 받는다. 그녀는 즉위 한 후 구교와 신교를 적절히 통제해가며 아버지가 설립한 잉글랜드 국교회의 확립과 국내적 안정을 위해 힘을 기울였다. 45년 재위기간 동안 대내외적으로 막강한 세력들이 잉글랜드를 압박하는 동안 계속 정권을 유지함으로써 근대 민족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으며, 1588년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물리침으로써 잉글랜드가 해상 강국으로 떠오르게 되고, 해외 식민지 개척에 대한 초석을 다지게 되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기틀이 이 때 부터 만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601년 구민법을 제정, 부랑자들의 구제에 힘쓰는 등 내치에 힘을 쏟았고,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문학과, 프랜시스 베이컨의 경험철학 등 인본주의를 장려해 국민 문학의 황금기를 이끌었다. 그러나 그녀는 잉글랜드의 처녀 여왕Virgin Queen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놓고 그 뒤에 숨어 자신의 인생과 통치기간 내 생존을 위해 개인적인 행복의 모든 기회를 희생한 불우한 인물로 평가된다. **저자와의 인터뷰** 왜 튜더 인가? 이 질문은 튜더 왕조에 관한 새 책이 등장할 때마다 거의 어김없이 나올 법한 질문이다.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 1세를 낳은 왕조에 관해 아직도 더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과연 있을까? 이 두 사람은 이미 잉글랜드 역사상 가장 많이 글 속에 언급된 군주들이며, 너무도 많은 영화, 소설, TV 드라마에서 다뤄진 탓에 때로는 과거의 인물이 아니라 현존하는 유명 연예인처럼 느껴질 정도다. 그런 그들에 관한 책을 굳이 또 읽어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두 가지 답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 튜더 왕조의 가장 유명한 인물들에 관한 책들은 실제로 무수히 많이 출판되었지만, 한 권 안에 왕조 전체를 다루면서 일반 독자들을 대상으로 한 책은 언제나 드물었다. 이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다. 튜더 왕조의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제대로 된 맥락에서 읽을 수 있는 기회가 좀처럼 없기 때문이다. 무일푼의 도망자였다가 갑자기 왕관을 쟁취한 헨리 7세의 위업이 없었다면 헨리 8세의 전설적인 행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엘리자베스는 헨리 8세의 자식들 중 세 번째로 그의 왕위를 물려받고 피에 젖은 유산을 처리하기 위해 분투했을 뿐이다. 그녀에게는 남동생(에드워드 6세)과 언니(여왕 메리)가 있었고, 두 사람 모두 헨리의 유산들을 되돌리려 애썼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녀의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의 이야기에 비춰 보아야만 온전히 생명력을 얻는다. 튜더 왕가는 3세대에 걸쳐 118년 동안 잉글랜드를 통치했다. 그런데 잉글랜드와 유럽, 심지어는 세계의 역사를 점증적으로 바꿔놓은 5명의 통치 기간을 하나의 연속체로 다루어 원인과 결과를 살피는 작업은 아직 많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둘째, 마지막 튜더 사망 후 4세기 이상이 흐르는 동안, 튜더 왕가 사람들의 실제 모습과 대부분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그들의 모습 사이에는 줄곧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실제 헨리 8세는 6명의 부인을 거느린 전설 속의 헨리 왕보다 더 나은 사람이기도 했고 더 못한 사람이기도 했다. 엘리자베스는 화려한 겉모습에 비해 훨씬 더 복잡했고, 애처로웠고, 덜 위대했다. 그토록 유명하지 않은 헨리 7세와 에드워드 6세, 메리 1세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중요한 통치자들이었고 매력적인 사람들이었다. 튜더 왕조에 관한 진실한 이야기는 종교적인 논쟁과 정치적인 이념의 차이 때문에 오랫동안 주요 역사학자들에게조차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튜더 왕조의 진실이 제대로 다뤄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2세대 사이의 일이며, 그런 이야기들은 대개 역사학자들만 접할 수 있었다. 일반 대중은 좀처럼 진실을 접하지 못하고, 사실에 깊이 근거하지 않은 오랜 전설들만을 들어 왔다. 《튜더스》를 출판하면서 내가 바라는 점은, 역사상 가장 유명한 왕조들 중 하나인 튜더 왕조에 관해 대중의 이해가 현실과 좀 더 일치할 수 있도록 이 책이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 G.J. 마이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