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소득공제
시의 눈, 벌레의 눈
베스트
비평/창작/이론 top100 13주
가격
17,000
10 15,300
YES포인트?
850원 (5%)
5만원 이상 구매 시 2천원 추가 적립
결제혜택
카드/간편결제 혜택을 확인하세요
배송안내
서울특별시 영등포구 은행로 11(여의도동, 일신빌딩) 변경
배송비?
무료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해외배송 가능?
  •  문화비소득공제 가능

이 분야의 이벤트

책소개

목차

책을 내며 - 5

제1부
백무산 : 시간을 혁명하다 - 15
육봉수 : 희망 없음을 희망 있음으로 - 41
황규관 : 어둠에 보내는 찬사 - 59
김정환 : 세계의 시신을 떠메고 나아가는 시 - 81
송경동 : 삶은 부활해야 한다 - 109
박영근 : 행려의 시, 결핍의 시, 흰 빛의 시 - 130

제2부
칠곡 할매들 : 시 안 쓰는 시인들 - 161
권선희 : 고통과 죽음을 넘어서는 축제와 제의로서의 말 - 188
이명희 : 모호성과 단순성의 공존으로서의 사랑 - 214
이민숙 : 타인의 얼굴과 생명, 그 소소한 그물 - 239
이 섬 : 아줌마들의 시인공화국을 꿈꾸다 - 263

제3부
정희성 :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모두 시인 되기 - 289
이정록 :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목록들이 전부 시였다 - 317
이시영 :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보아 - 346
안상학 : 처음인 양 재생되는 오래된 사랑 - 371
도종환 : 다시 길 위에서 - 390
김민기 : 우리 시대의 가객, 김민기의 노래에 부쳐 - 413

저자 소개 1

전남 신안에서 태어나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무화과는 없다』 『집에 가자』 『해자네 점집』 『니들의 시간』 , 산문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등을 펴냈다. 만해문학상, 구상문학상, 육사시문학상,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김해자의 다른 상품

관련 분류

수상내역 및 미디어 추천 분류
카테고리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17년 12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427쪽 | 580g | 145*210*30mm
ISBN13
9788966550920

책 속으로

‘문학(literature)’의 어원은 세계를 읽고 다시 또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책만이 텍스트인가? 아니다. 사람들의 몸뚱이와 대지와 물과 우주와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것이 텍스트다. 어디에다 무엇으로 쓸 것인가? 종이와 컴퓨터 속에? 이 기록들만을 문학이라 부른다면, 암흑 에너지와 암흑 물질을 빼면 4%밖에 안 되는 원자가 우주의 모든 것이라 주장하는 것과 같다. 안 보여도 존재하는, 말 안 하고 글 안 써도 실재하는 “전체가 기억인” 내 몸, “시간을 담아내는 호수”에 우리는 써야 한다. 내 몸의 혁명이 새로운 언어를 만들고 새로운 세상을 생성하는 종이다. 그것은 바로 시간 혁명이며, 광야의 길과 인간의 시간을 결합하는 유일한 길인지도 모른다. 좁은 방에 갇힌 ‘나’만의 속삭임을 지나, 저 넓은 지평선을 향해 허리를 펴고 두 다리를 대지에 굳건히 디디고 있는, 혁명의 언어는 기쁨과 화해와 생명과 야생의 노래이기도 하겠다. 저 평등한 수평선을
가득 채운 출렁거리는 생명들의 말, 물속의 말, 온 세계에 촛불처럼 타오르나 아직 태어나지 않은 어두운 숲속의 나무 한 그루와 풀 한 포기, 그리고 그들이 시시각각 새기고 있는 시.
---「백무산 : 시간을 혁명하다」중에서

모든 존재는 자기 안에 있는 것만 본다. 그림자 형태로라도 존재하지 않거나, 경험이 부재하거나 사유해본 적 없는 것은 모두 비밀 속에 갇힌 난해 부호다. 잘난 척인가? 아니다. 진실성이다. 고도의 핍진함과 사실성이 난해라는 이름으로 당대에 죄 없이 배척당하고 미움 받는 이유는, 사방팔방 돌아다녀도 속살은 못 만지고 돌아오는 독자 혹은 타자의 게으름과 안이함 때문이다. 희미한 한 점의 어떤 물질화된 사유가 언어를 통해 육박해오면 그 점은 점점 선이 되고 도형이 된다. ‘환영’ 같지만 그 속엔 “깊이의 실제”가 있다. “읽으면 그대 속으로 그대가 있는” 이 속으로, 위로와 편안함과 달콤함과 행복만이 문학과 예술과 삶의 존재 이유라면 구태여 들어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화석과 먼지와 짐승과 인간과 예술이 한 몸, 한 점으로 존재하는 거대한 하나를 잠시 살아보다 가는 것이 생이라면 이 “빛, 색, 선, 우주의 공중파” 속, 바늘구멍만 한 점을 통과해야 하지 않겠나. “읽으면 그대 속으로 그대가 있는/ 속, 환영의 깊이의 실제인” 점, 뿐 속으로.(「점, 뿐, 속」)
---「김정환 : 세계의 시신을 떠메고 나아가는 시」중에서

노동자들 언저리에서 청춘을 다 보냈지만 그는 촌놈이었던 겁니다. 삶이 가파른 빙벽만큼이나 고독하고 아찔하고 춥고 외로웠을 때 그는 의식이나 이데올로기로부터 자유로운, 어떤 새로운 해방의 원초적 모습을 발견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일만 하고 살기에도 버거운데, 그즈음 공장 안에선 노조를 깨기 위한 전략 중 하나로 자본가의 사주에 의한 노노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가장 괴롭고 아픈 건, 한솥밥 먹는 사람들과의 대립이자 분열이자 불신일 겁니다. 적에 대한 증오가 아니라 내 옆에서 같이 일하던 사람들을 미워할 수밖에 없는 상황, 이것이 『김미순傳』의 동기가 되었을 겁니다.
저는 공단 프락치가 된 여성 노동자의 비극적인 운명을 담은 이 장시는 자꾸 피하고 싶었습니다. 읽다 말다 읽다 말다 하는 저 자신을 보며 노동자들을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자기에게 너무 가까이 있는 것들은 멀리하려는 심리를 지니나 봅니다. 마치 노동자들이 노동자 글들을 더 멀리하고 대중적인 연애시나 고상한 에세이집을 사서 읽는 것처럼 말이죠. 지긋지긋하니까요. 싸움과 가난과 고통이 가득한 자신의 이야기를 책에서조차 들춰 본다는 일은.
---「박영근 : 행려의 시, 결핍의 시, 흰 빛의 시」중에서

노동할 수 없는 채 살아가야 하는 비극과, 인간적으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드는 노동을 해야 하는 희비극 사이에, 발이 묶여 있는 현대인에게 이 시는(의도하지 않았겠지만) 새로운 지평을 선사합니다. 이 시에는 노동과 비노동 구분이 없고, 고용과 은퇴의 개념도 없죠. 젊음이 끝나기도 전에 노인 취급을 받는 작금의 추세는 4차 산업혁명으로 그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습니다. 이 풍요한 지구에 만연된 빈곤은 여전히 삶의 질을 가장 강력하게 위협하는 현실이지만, 지구상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과 더불어 절제된 소유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절대빈곤이 아니라는 전제에서, 이런 반백수의 삶, 즉 창조적 실업이야말로 우리가 가야할 가장 ‘오래된 미래’일지도 모릅니다. 현대 사회가 겪고 있는 최악의 ‘도덕적 질병’인 가난에 대한 공포가 적어도 여기엔 없으니까요.
---「칠곡 할매들 : 시 안 쓰는 시인들」중에서

이반 일리치는 강자의 흥망성쇠를 주로 기록한, 거의 전쟁사가 되어버린 역사 서술 대신, 일상의 세밀한 세속사가 진정으로 기록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강자가 되어보지 못한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하는 자들 또한 노예와 농민, 소수자, 소외 계층의 저항과 폭동, 반란의 역사를 주로 기술합니다. 더 근래에 와서는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투쟁이나 성차별에 맞서는 여성의 싸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새로운 역사도 전쟁과 투쟁에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으며, “약자가 자신을 지켜내기 위해 상대와 충돌하는 모습을 통해 약자를 그리는 것”일 뿐, 저항의 이야기를 나열하면서 과거의 평화에 대해서는 넌지시 서술할 뿐입니다. 「정님이」나 「후꾸도」나 「일만이 형」 같은 시를 읽게 되면, 이 모든 인류사에서 민중이란 구제와 구원의 대상이 아닐뿐더러, 교화하거나 계몽하거나 부추겨, 무슨 무슨 전선에 동원할 대상이 전혀 아님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이시영 :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보아」중에서

도종환 시인은 초월을 꿈꾸지 않는다. 나쁜 것과 미움의 위험성이 자신에게 있다는 걸 아는 자만이 그것을 잊거나 없앨 수 있는 완전한 세계로 떠나고픈 충동을 느낀다. 어쩌다 힘들어서 잠깐 들어갔더라도 그는 다시 저잣거리로, 지금 바로 그의 처지로 돌아온다. 어느 시대나 악한 것은 강한 욕망을 낳고 그 욕망은 권세를 갖는다. 그래서 무욕의 선한 인간이 권좌를 차지하는 일은 역사에는 없다고 보아도 좋다. 그런 세상에 염증을 내어 그런 꿈조차도 폐기하고 싶어지지만, 그래서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나도 역사를 짝사랑할 만큼 했어’, 하고 돌아서지만, 시인은 무용(無用)의 꿈을 앓는다. 그것은 꿈이 권력의 폭력적 질서를 없앨 수는 없지만, 적어도 줄일 수는 있으리라는 믿음 때문이겠다. 꿈이 그를 사랑하고 있기에, 상처만 남길지언정 그 꿈이 저와 같은 인간의 몸을 빌어 육화시키고자 하기에.
---「도종환 : 다시 길 위에서」중에서

한 시대의 희생자요 피해자였지만, 피해 의식도 없이 엄청난 강도의 노동과 생활을 묵묵히 견디는 그들이야말로 말 없는 영웅들이었는지 모릅니다. 그 뒤 오랫동안 전 미싱사였습니다. 때로 굽힐 수도 펼 수도 없는 허리를 비틀며 미싱 앞에서 내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그리고 때로 시를 끄적대기도 했죠. 임금 체불에 이어 위장폐업하게 된 공장에서 몇 달간 물미역과 오이짠지로 점심 한 끼 얻어먹으며 일을 하는 기숙사 친구들과 호박과 감자와 밀가루를 가져다 부침개와 수제비를 해먹으며 공장을 지키고 노동청을 걸어 다녔어요. 그런 제게 특별히 [공장의 불빛]을 들을 때면 먹먹해집니다. 수없이 들어도 소름끼치는 “돈 벌어 돈만 벌어”를 들을 때나(이 노래는 꼭 젓가락으로 술상을 두드리면서 불러서 더 겁이 났습니다), “두어라 가자 몹쓸 세상”을 들을 때 저는 바다 밑으로 잠겨 부서진 공장 잔해 사이를 헤엄칩니다. 김민기는 아래서(under) 함께 서 있었던(stand) 게 분명합니다. 그래서 이해(understand)한 거죠. 가난과 날마다 계속되는 노동과 “밤바람 찬 새벽에 교대”하러 가는 여공들의 무섬증과 피로와 병들어가는 몸을.

---「김민기 : 우리 시대의 가객, 김민기의 노래에 부쳐」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것

김수영은 “시인을 발견하는 것은 시인이다. 시인의 자격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 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이 말의 뜻은 단순히 ‘새로운’ 시인을 발굴하는 일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사회적 이름으로 불리는 ‘시인’ 말고 그 안에 숨어 있는 ‘시인됨’을 읽어내는 역량을 말하기도 한다. 시인이 뛰어난 비평가일 수 있는 것은 시인의 눈으로 ‘시인됨’을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 『시의 눈, 벌레의 눈』은 “시인을 발견하는 데”에 바쳐졌다.

김해자 시인은 이 책에서 많은 시인들을 불러내, 오늘날 시가 무엇이어야 하는지 묻고 있다. 책의 구성 양식으로는 16명의 시인과 1명의 가객으로 보이지만, ‘칠곡 할매들’이 있기 때문에 그보다 많은 복수의 시인을 발견한 셈이다. 김민기는 통념적으로 불리는 ‘시인’은 아니지만, 저자는 김민기에게서 ‘시인됨’을 찾아낸다.

책의 맨 처음에 백무산을 배치한 것에서부터 저자가 강조하고 싶은 ‘시인됨’의 모습을 눈치 챌 수 있다. 저자는 백무산의 시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시인은 지금까지 걸어왔던 길이 길 밖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길들을 부정하는 것이었음을 발견한다. 유용성의 몫만큼 도려내고 그 나머지를 배제하는 죽은 사유요 뼈만 남은 언어라는 거다. 그것은 “죽은 관념의 덫에 걸려 사는” 시간이었다. 백무산은 과거의 길에 대한 부정으로 ‘살아 있는 길’을 찾는다. 길의 탐색은 자신의 몸과 기억, 그리고 인간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과 성찰을 통해서 나타난다. 그 길은 존엄하게 살다 존엄하게 죽어야 할 인간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생명과 무기물조차 아우르는 길이다.(18)

저자는 이 책에서 다룬 시인‘들’을 통해 새로운 문명에 대한 사유를 펼치고 있는 것이다. 김해자 시인이 강조하는 것은 바로 몸에 새겨진 기억이다. 그것은 물질의 세계이면서 또한 영혼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시간의 문제이다. 백무산 시인에게서 ‘발견’한 것은 “살아 있는 시간”이고 황규관 시인에게서는 선형적인 구조가 깨진 “오고 있는 시간”이다. 그런데 이 시간은 몸을 통해서 오고, 몸을 통해서 다시 살아나는 시간이다.

벌레의 눈!

고인이 된 육봉수 시인과 송경동 시인에게는 끝나지 않은 노동 착취와 억압을 읽어내고 있다. 육봉수 시인의 시세계에 대해 말하면서 저자는 과연 우리가 사는 현실이 과거와 얼마나 달라졌느냐고 묻는다. 다른 말로 하면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존재하는 한 과연 노동자의 현실이 달라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일상의 삶조차 누리지 못한 채,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는 노동자들이 넘쳐나는 시대에, 자기 몫을 받고 노동자들이 자기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는 행위가 어찌 지난 시대 관념일 수 있느냐고. 자기 시대 고통의 심연으로부터 흘러나오는 삶을 건져 올리고, 소외된 자의 해방과 이해를 위해 봉사하고자 하는 의지와 노력이 과연 낡을 수 있느냐고. 이어 시간을 착취하는 것이 존재를 소멸시키는 일이라는 걸 육봉수 시인은 ‘교대근무’를 통해 처참하게 보여줍니다.(46)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착취하는 것도 바로 “시간”이다. 삶의 시간을 노동의 시간으로 전환시킨 다음에야 착취가 가능한 것이니 자본주의는 노동자의 노동력으로 외화된 삶의 시간을 착취하는 꼴이다.

저자가 송경동 시인의 시집 『꿀잠』에 대한 글 제목으로 ‘삶은 부활해야 한다’로 했을 때도 아마 이 삶의 시간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양극화된 사회, 계약직과 파견직 등으로 몸값 차이가 제도적으로 정당화된 작금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는 존재의 불안을 안고 살아간다. 삶이 치욕이고 매 순간이 벼랑이다.” 시가 삶의 시간을 노래하는 것이 곧 ‘시의 눈’이고 세상을 하늘 위에서 조감하는 게 아니라 땅에서 바라볼 때 ‘벌레의 눈’이 된다. 저자는 ‘벌레의 눈’이라는 개념을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에게서 얻었다고 고백하고 있지만 이미 저자의 존재가 새가 아니라 벌레였을 것이다. 삶을 초월의 시각으로 보지 않고 대지적 관점에서 바라보자는 것이 저자의 한결같은 주장인데 이럴 때만이 시는 벌레의 것이 된다.

‘칠곡 할매들’의 시를 말하면서 그 주장이 더더욱 확실하게 내면화된 것임을 읽을 수 있다.

흙과 만물을 먹여 살리는 지상의 존재들과 가난한 농부들이 권력과 기업과 유전자조작과 생명복제의 실험실에 갇힌 과학자의 눈에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상상해보려면, 지금 우리가 딛고 있는 땅과 이웃들의 주름진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는 일로부터 시작해야겠습니다.(182)

시 읽기와 상상하기

이러한 문명비판적 관점은 이시영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과거의 거울에 비추어’ 본다는 것은 그런 의미이다. 저자는 이시영 시인의 시에서 “자본의 위력과 개발 앞에서 다수의 평화는 사라지고” 있는 현상을 본다. 시는 “사라져가는 사람 냄새와 얼굴을 기록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가난했어도, 못 배웠어도, 고생스러웠어도 함께 일하고 목욕하고 웃던 농촌 공동체가 살아 있던 세계”를 떠올린다. 물론 저자 근대 이전의 시간을 맹목적으로 추구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폭력적인 근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맥락에서 이 같은 주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농촌이 근대화되고(아니 파괴되고) 도시에 값싼 노동력을 대주는 처지로 전락했을 때 정님이와 후꾸도 같은 사람들은 도시에 나가 루핑집을 짓거나 천막을 치고 살면서 날품팔이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펜대와 도장을 쥔 머리들에게 살과 뼈와 근육과 손발을 대주었습니다”라는 문장은 그 증거이다.

시를 읽는 일은 저자에게 일종의 ‘해방’이라는 사건이다. 저자가 말하는 ‘해방’은 그러나 소극적으로 읽힐 수 있다. 이런 대목 때문이다. “그냥 그들이 있는 자리에 그냥 내버려두기만 해도 그들은 이미 평화이고 사랑입니다.” 하지만 “그냥 그들이 있는 자리에 그냥 내버려두기만” 하는 것은 많은 투쟁을 필요로 한다. 왜냐면 “서로의 목에 총칼을 겨누는 전쟁에 끌어들이거나, 이래라저래라 간섭하거나 억울하게 끌고 가거나, 억지로 배제하지만 않“아야 하는 가능한 일이니까.

여기서 저자의 비판적 인식은 상당히 급진적인 것임을 알게 된다. 급진적 정치의식을 시를 읽으면서 펼치는 사례는 그리 많지 않다. 또 어지러운 이론과 학문을 통해 논리를 전개시키는 것도 아니다. 이 책에 수록된 시인들의 시를 읽으면서, 우리의 일상이 얼마나 폭력과 배제, 그리고 억압과 수탈로 뒤덮여 있는가를 말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시를 자신의 정치적 급진성을 위해 동원하고 있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난해한 김정환 시인의 시를 읽으면서 남긴 아래와 같은 문장은 김해자 시인의 시 읽기가 그야말로 얼마나 시적인지 알려준다.

시와 음악은 시간을 공간화하고 풍경을 시간화하고, “생의 전면화인 무의식과 생각보다 더 많이 관계하는 의식”이 공조해 만들어가는 협주곡. 죽음과 삶사이, 진폭이 큰 상념과 사유 사이, 어딘가에 닿을지 모르는 곳으로 흘러가는 시인의 노래를 ‘리퀴드(Liquid)시’라 부르겠다.(84)
책을 내며

과거 독재 정권하의 국민교육헌장처럼 강제로 외우는 대신, 실체도 모른 채 우리를 붙드는 이미지가 명멸하는 광고처럼, 옴짝달싹 못 하게 하는 각자도생의 국민교육헌장으로 우리의 미래인 청년들이 구금되고 닦달당하고 있습니다. 물신과 우월함을 조장하는 신흥종교의 우산 아래 내던져지는 동안, 땅과 대기와 바다가 몸부림치고 일상의 모든 부문에서 그 끝의 징후를 드러내고 있는 독생대 인류세(獨生代 人類世)를 우리는 통과하고 있습니다. 외따로 떨어져 점으로 존재하는 고독한 인간들의 군상과, 스스로 멸절을 택하는(강요당한) 사람들과 날마다 멸종되고 있는 생명체들이 마지막으로 두드리는 절박한 요청 앞에서,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용하기까지 한 하찮은 시가 과연 무엇인지 질문합니다. 호모사피엔스는 언어와 뒷담화 때문에 강력해지고 지구를 지배하는 무소불위의 독불장군이 되었지만, 바로 그것 때문에 스스로를 죽이고 이 행성을 파괴하고 멸종시키는 주범이 되어왔던 것은 아닌가, 새삼 언어의 의미와 의무를 떠올리게 됩니다.

시는 언어의 에센스라고들 말합니다. 저자가 따로 없던 역사 이전 시대에, 시는 공동으로 창조하고 같이 향유하는 둥근 원의 노래였습니다. 오랫동안 시는 상처를 받고 기진맥진해서 일어설 힘조차 없는 사람들을 일으켜 세우는 위로와 치유의 소리였으며, 염원과 발원의 기도이자 응답이었습니다. 발화하며 나오는 소리가 공기를 통과하고 모든 원자를 춤추게 하며 세상 끝까지 도달하는 사라지지 않는 음악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심장처럼 박동하는 시구 속 리듬에 귀를 기울이며 우주와 미물과 나와 내 옆의 사람들과 통했습니다. 이미지의 범람으로 실감과 생물의 펄떡거리는 감각이 실종된 이 너무나도 문명화된 세상에서 시는 과연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리뷰/한줄평3

리뷰

7.0 리뷰 총점

한줄평

10.0 한줄평 총점

클린봇이 부적절한 글을 감지 중입니다.

설정
15,300
1 15,3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