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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뜻밖의 제안 11
2. 이야기와 집과 사람들 29 3. 진짜 이야기의 시작 47 4. 몇 가지 수수께끼 69 5. 흩고 나누고 모았을 때 81 6. 여름 모임 105 7. 무언가 벌어지고 있다 125 8. 두 사람이 쓰는 이야기 149 9. 비밀, 변명, 그리고 보물 169 10. 소리가 모이는 방에서 183 11. 들은 말들과 한 말들 197 12. 벽은 곧 세상 215 작가의 말 231 |
김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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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이도 책 읽는 거 좋아하니? 세아야, 담이랑 말 좀 해.”
운전석에서 세아 엄마가 말했다. 담이는 움찔하며 옆자리의 세아를 곁눈질했다. 세아는 엄마 말은 들은 척도 안 하고 휴대전화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야 하나?’ 아까 차에 탈 때 인사를 주고받은 것 말고는 아직 세아와 한마디도 안 했다. 입안에서는 어젯밤부터 생각해 둔 말들이 맴돌았다. ‘진짜 덥지 않니? 방학 때 어디 놀러 가? 어제 티브이에서 그거 봤어……?’ “담이가 엄마 닮아서 말이 없구나?” 아까부터 말하는 사람은 세아 엄마뿐이었다. 담이는 조수석에 앉은 엄마 뒤통수를 쳐다보았다. --- p.12~13 선택적 함구증. 이것이 담이에게 주어진 병명이었지만, 담이는 ‘선택’이라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을 안 하길 선택했다고? 아니, 절대 그렇지 않았다. 담이는 정말 말을 하고 싶은데 말이 담이를 배신하는 것이다. 연못 속의 붉고 하얀 잉어들처럼, 분명히 거기 있다는 걸 아는데, 해야 할 때가 되면 말은 쏜살같이 사라져 버렸다. --- p.18 벽을 따라 며칠을 꼬박 걸은 끝에 그는 마침내 저 멀리 까만 점을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보니 챙 넓은 모자를 쓴 사람이 벽에 기대어 앉아 있었다. “이 벽을 넘어가려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그가 묻자 모자 밑에서 지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법은 하나뿐이야. 이 벽에, 자네의 일부를 두고 가는 것일세.” “나를 두고 간다고요? 어떻게요?” “벽이 스스로 자네의 일부를 가져갈 걸세. 벽을 속이려 든다면 자네는 벽 안에 갇히고 말 거야. 자네에게 더 이상 남기고 갈 것이 없다면 벽을 넘지도 못하게 되겠지.” --- p.36 담이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길을 잃으면 차라리 좋았겠지만, 걸을 기운조차 나지 않아서 담이는 세번째 방에서 멈췄다. 창문이 없는 방이었다. 문을 닫자 그 방은 방문 밑으로 새어 들어오는 흐린 불빛 빼고는 완전히 어두워졌다. 약간은 위로가 되고, 조금은 더 외롭게 하는 고요한 어둠 속에서 담이는 한참을 서 있었다. 말이 차오르고 끓어올라 넘칠 때까지, 입 밖으로 튀어나올 때까지. 담이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소리를 질렀다. “이 바보야!” “넌 진짜 바보 멍청이야! 제대로 하는 일이 없어!” 두 눈에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담이는 눈앞에 주먹 쥔 손을 대고 흑흑 울었다. 이건 비밀이지만 담이는 가끔 이렇게 울었다. 가슴에 쌓이고 쌓인 것들이 목까지 차오르면, 울음은 말보다 쉽게 나왔다. --- p.42~43 괴상한 집과, 그 집에 틀어박혀 놀라운 글을 써내는 작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아내기 충분했다. 정 교수는 이 집을 더욱 비밀스럽게 만들었다. 일 년에 딱 한 번, 여름에만 사람들이 집에 올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때가 되면 정 교수와 친분이 있는 학자와 작가는 이 집에 와서 몇 주간 머무르며 각자의 연구와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정 교수는 그런 부분에 있어서는 아주 너그러워서, 무료로 방과 식사를 제공하며 마음 편히 머물도록 해 주었다. ‘여름 캠프 같은 거네.’ 담이는 여름 캠프 따윈 질색이었지만, 이 집에서 열린다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그 모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 바로 게시판이었다. 그 시절 정 교수는 직접 글을 써서 게시판에 붙였다. 짧은 논문이기도 했고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이거나, 원고의 한 부분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정 교수의 뜻에 따라 그에 대해 토론을 했다. “그 토론에서 아주 의미 있고 중요한 결과물이 나오기도 했어. 그때가 이 집의 황금기였을 거야. 그런데 갑자기 여름 모임을 안 하시겠다고 한 거야. 그게 10년쯤 됐나.” 정 교수는 홀로 이 집에 머물렀다. 아무런 글도 쓰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죽음과 같은 침묵 속에서. --- p.52~53 “잘못 쓴 건 없겠지. 어물쩡 넘어가지 말고 제대로 확인해라.” 이야기를 마치고 정 교수가 말했다. 아픈 손을 주무르며 방금 자기가 쓴 글을 내려다보던 담이는, 우물쭈물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은 딱 하나였다. ‘왜 저를 다시 부르신 거예요?’ 그 질문은 꿀꺽 삼키고, 담이는 제법 용기를 내어 물어봤다. “음…… 이 사람은 이름이 없나요?” 정 교수는 흥 콧방귀를 뀌더니 되물었다. “그러는 넌 이름이 뭐냐?” 그러고 보니 정 교수는 담이의 이름조차 물어본 적이 없었다. 담이라 대답하자 정 교수는 무신경한 태도로 이야기 속 사람 이름을 람이라 했다. 그렇게 대충 이름을 지어도 되는지 담이는 미심쩍었지만 정 교수는 고집스러웠다. “됐어, 이름 같은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아. 아무리 가볍게 지었어도 곧 의미가 덕지덕지 붙어 무거워지고 말지. 다른 이름으로 하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라. 너 또한, 이 글을 받아 적는 이로서 권리가 있으니.” --- p.55~56 “근데 도시에 뭐가 있는데요?” “뭐라고?” “아니…… 도시로 간다고 하셨잖아요. 그래서…… 왜 가는지 궁금해서…….” 담이는 머쓱해서 말끝을 흐렸다. 예전엔 람이 벽을 넘어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오늘 드디어 ‘도시’라는 단서가 나온 것이다. “궁금해할 것도 없다. 말도 안 되는 얘기니까. 나오는 대로 뱉을 뿐이야.” 정 교수는 불퉁하니 말했다. 담이는 혼란스러웠다. “다들, 다들 중요하다고 그러던데요. 교수님의 마지막 작품이고, 되게 의미 있는 거라고…….” “하! 그 말을 아직도 믿고 있단 말이냐?” “그럼 거짓말을 하셨단 말이에요?” 담이가 놀라 묻자 정 교수가 되물었다. “거짓말? 거짓말이 뭐지?” “틀린 걸…… 말하는 거요.” “그럼 맞는 걸 말할 수도 있단 말이냐? 말은 언제나 틀려. 말은 언제나 어긋나지. 모두 자기가 모르는 것을 아는 것처럼 말하고, 느끼지 못한 것을 느낀 것처럼 말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옳을 거야.” 정말 이상한 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말을 하지 못하는 담이가 차라리 나은 것이다, 아무 말이나 막 하는 애들보다. 하지만 그래도 담이는……. “……그래도 전 말을 제대로 하고 싶어요.” 담이는 입을 막았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뜬금없는 소리를 해 버렸다. 그러나 정 교수는 말꼬투리를 잡지도, 무슨 소리냐고 묻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거짓말이 될지언정 말을 만들어 내려고 시도해야 해.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에…… 진실에 닿을 수도 있을 테니. 그러한 이유로 나 또한 말을 이어 가는 거다.” --- p.64~65 정 교수는 손끝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그에 맞춰 램프의 불꽃이 일렁였다. “답이 정해져 있다고 생각했다면 이런 집을 짓지도 않았겠지. 아주 어리석은 생각이다.” 담이는 움츠러들면서도, 답이 없다는 정 교수의 말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든 될 수 있어. 그 낱말에서 이야기는 천 갈래 만 갈래로 갈라져. 알겠니? 바로 그런 낱말 하나에서, 문 하나에서 모든 게 시작된다고.” “하지만 낱말 하나로는 이야기를 만들 수 없잖아요. 언제나 다른 낱말이 필요하고요.” 정 교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담이는 자기가 뭘 잘못 말했나 싶어 마음이 아주 작아졌다. “그래, 맞다. 말이 섞여야 하지. 바로 그런 걸 듣기 원했고, 그래서 사람들을 이 집에 불렀어. 방들은 말을 서로 나누지 못하지만, 사람은 대화할 수 있으니까. 서로의 낱말을 섞이게 할 수 있으니까. 말이 이 집을 가득 채웠지……. 하지만 그것도 옛날 일이야.” --- p.6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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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말을 타고 강을 건넜다. 어떤 모습이 떠올라?
그 말이 네 발 달린 말이 아니라 말하는 말인 거야.” 말과 진실을 둘러싸고 펼쳐지는 공감 백배 미스터리 판타지 언제나 어긋나는 말로 마침내 진실에 가닿으려면 작가는 작품 속 현실에서 어려움을 겪는 담이의 마음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동시에 신비로운 집에 얽힌 판타지 세계로 독자들을 데려간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마음의 치유를 경험할 수도 있다.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크고 작은 상처들을 감추고 있는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격려와 지혜가 자연스럽게 담겨 있다. 이야기를 통해 말과 진실의 어긋난 간극을 보면서, 우리는 여러 생각을 하게 된다. 뒤에서 당사자 모르게 하는 악한 말이 누군가의 삶을 뒤흔들 수 있음을. 말을 안 한다고 해서 이상하다고 성급하게 판단하는 것이 일으키는 심각한 문제에 대해서도. 가벼운 말이 아니라 시간을 함께 보내면서 마음과 마음이 만날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야기에서는 아이들이 결국 비밀의 방을 찾는다. 우리 역시 이야기를 읽으면서, 점차 현실에서도 사람 사이의 벽이든 진실을 감춘 벽이든 진심을 가지고 열심히 찾다 보면 세상에 하나뿐인 진실의 열쇠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