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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주와 함께하는 시간 여행
당뇨로 고생하는 할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와 민제네 집에서 지내기로 한다. 할아버지와 함께 도착한 것은 이불로 겹겹이 둘러싼 낡은 뒤주. 할아버지와 한방을 쓰게 된 민제는 우연히 한밤중에 등산용 배낭을 메고 뒤주에서 나오는 할아버지를 목격한다. 이런 이상한 행동을 비밀로 간직해 달라는 할아버지의 부탁을 민제는 들어주지만 호기심까지 억누를 수는 없다. 할아버지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피던 민제는 새벽 두 시 오십 분만 되면 할아버지가 뒤주 속으로 들어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민제 역시 할아버지가 잠든 틈을 타서 뒤주 속에 들어가는 기회를 얻게 된다. 거기서 민제는 사도세자를 만나고 배비장도 만나게 된다. 또한 임진왜란과 1980년 광주항쟁의 현장도 경험한다. 곡식을 담아두는 데 쓰던 평범한 뒤주인 줄 알았던 할아버지의 뒤주는 과거의 다른 시간과 공간으로 연결되는 통로였던 것이다. 할아버지의 비밀 민제는 뒤주에 얽힌 사연을 할아버지로부터 전해 듣는다. 육이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지금의 민제 나이인 열한 살이었던 할아버지의 실수로 뒤주 속에 숨어 있는 큰형님을 인민군이 찾아내 끌려가게 한 것이다. 그 뒤로 할아버지는 평생 큰형님에 대한 죄책감과 그리움을 안고 살아왔고, 이 때문에 할아버지는 뒤주와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된다. 적십자사에 수시로 연락을 하는 한편 대부분의 시간을 뒤주에서 보내던 할아버지는 뒤주 안에서 큰형님이 제기 만들 때 썼던 엽전을 발견하고, 엽전을 집어 들자 뒤주 벽이 사라지며 과거로 갈 수 있게 된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그리고 새벽 두 시 오십 분이 할아버지가 살아온 시간으로 연결된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할아버지와 비밀을 공유하게 된 민제는 할아버지를 따라 뒤주 속으로 들어가 큰할아버지를 인민군에게 잡혀가지 않게 하는 데 힘쓴다. 할아버지가 가고자 하는 시간으로 가까이 갈수록 위험은 점차 커지고, 결국 할아버지는 다쳐서 병원에 입원하고 만다. 이제 민제가 할아버지를 대신해 뒤주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것이다. 민제는 과거로 가서 뒤주 속에 숨어든 미군 비행사에게 자기 이름을 적은 쪽지를 남기고 온다. 그런데 놀랄 만한 일이 벌어진다. 얼마 뒤 신문에 할아버지가 된 그 참전 미국인이 자신을 도운 한국 소년을 찾는다는 기사가 난 것이다. 이처럼 과거로 가서 벌인 일의 결과는 ‘그렇게 예정되어 있는 일’로 나중에 다가오는 것이다. 인과율의 법칙 작가는 과거 역사를 나중 사람이 멋대로 바꿀 때 발생할 수 있는 위험성에 대해 엄중히 경고한다. 할아버지가 병원에 있으면서 생각한 것은 누구나 돌이키고픈 과거가 있을지라도 과거로 가서 미래에 일어날 일을 일어나지 못하게 한다거나 일어나선 안 되는 일을 만들면 현재가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이다. 시간의 인과율에 묶여 있는 이상, 나중 사람이 과거를 간섭하는 일은 매우 복잡하고도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게 된다. 이 작품의 판타지는 과거 역사를 눈앞에서 겪게끔 하는 장치로만 작용하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가 어떻게 관계하고 있는지, 역사를 대하는 인식과 태도의 문제까지도 판타지를 통해서 깨닫게 해준다. 민제는 드디어 제사를 지내러 산에서 내려가는 열일곱의 큰할아버지를 만나게 되고, 집에 가지 말라고 알려줄까 하다가 할아버지의 말을 떠올리고는 과거의 일에 간섭하지 않기로 한다. 즉 큰할아버지가 잡혀가게 내버려 둔 채 그 뒤에 구할 방법을 찾기로 한 것이다. 인민군에게 끌려가는 큰할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민제는 그 시각 잠들어 있을 미군 비행사의 권총으로 인민군들을 유인한다. 그 과정에서 민제는 자신이 과거로 가서 벌인 일이 그렇게 되도록 예정되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 일이 있은 다음 우연의 일치인지는 모르지만 다행히 적십자사로부터 북녘에 있는 큰할아버지의 소식을 전해주는 연락이 온다. 민제는 옛날 할아버지가 자신의 나이만 했을 때 그랬던 것처럼 뒤주 속으로 들어가 보지만 이제 과거로 가는 문은 닫혔다. 만약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이 가능하다면 누구나 다 되돌리고픈 순간이 있을 것이다. 그 시간대로 가서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과거의 상황을 바꿔놓는다면 현재는 어떻게 변할까? 하지만 우리가 벌이는 모든 행위는 인과율에 따른 무거운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분단현실의 아픔을 어루만지는 이 작품은 시간 여행이라는 초자연의 상상력으로 즐거움을 주지만, 인과율의 법칙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의 엄중함을 강조하고 있다. 사도세자를 만나고 임진왜란을 겪고, 광주항쟁의 현장에 놓이는 것이 민제에게는 배비장을 만난 것처럼 허구 같은 세상이지만 우리 역사가 걸어온 과거인 것이다. 또한 민제가 할아버지를 대신해 찾아 나선 할아버지의 과거는 민제 자신에게는 낯선 세계일지라도, 할아버지는 실제로 겪은 세계이다. 『할아버지의 뒤주』는 뒤주를 통해 연결되는 판타지 법칙을 치밀하게 직조하면서도 우리 아이들에게 자연스레 역사의 한 갈피들을 펼쳐 보여준다. 그러면서도 타임머신이 됐든 뒤주가 됐든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의 시간 여행은 인과율의 법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대전제를 흔들지 않으면서 과거와 현재의 관계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