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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권]
≪중론(中論)≫ [제2권] ≪회쟁론(回諍論)≫ ≪세마론(細磨論)≫ ≪육십송여리론(六十訟如理論)≫ ≪칠십공성론(七十空性論)≫ [제3권] ≪보행왕정론(寶行王正論)≫ |
龍樹,龍樹菩薩, 용맹보살, 150~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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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히 알려져 있다시피 중관사상은 용수의 대표 저작인 ≪중론≫을 제외하고는 논의할 수 없어 산스끄리뜨어와 한역, 영역 등이 우리말로 옮겨진 적은 있으나 티벳역을 옮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것은 앞으로 옮길 ≪중론≫ 티벳 주석서들을 위한 사전 포석에 해당한다.
이 책이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1999년 이후 이 길로 들어선 역자가 중관사상을 공부한 시간과 겹친다. 역자의 스승이신 빠탁(S. K. Pathak) 교수님께서는 “우빠니샤드부터 읽어라!”며 불교뿐만 아니라 인도 사상사 전체를 조명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셨다. 올해 아흔다섯의 나이에도 전법을 이어가시는 사부님을 생각할 때면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느낄 뿐이다. 샨띠니께딴의 ‘타고르 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던 시절 세계 각국의 다양한 중관학자들과 교류할 기회 또한 있었다. 그 가운데 한 명이 이 책의 추천사를 써준 바라나시 인근의 초전법륜지인 녹야원으로 널리 알려진 사르나스에 위치한 고등 티벳 연구소(CIHTS, Central Institute of Higher Tibetan Studies)의 철학과 학과장인 따쉬 체링(Tashi Tsering) 교수였다. 예전처럼 중관사상에 대한 각자의 견해를 논의하기에는 힘든 처지가 되었으나 월칭의 ≪입중론(入中論)≫을 해석하는 데 빠질 수 없는 고람빠(go rams pa)의 주석서인 ≪Gorampa’s Removal of Wrong Views≫의 영역자인 그의 기대처럼 한국에서도 중관사상이 선양될 수 있기를 빌어본다. 지난 2011년 대구에서 열린 ‘고려대장경 천년학회’에 참석했을 때 만난 김성철 선생님께 ≪중론(中論)≫을 원래의 운문 형태, 시가 형태의 게송을 원래 그 형태로 옮기겠다고 말씀을 드린 적이 있다. 한국의 중관사상은 ‘김성철 선생님이 ≪중론≫을 옮기기 전과 후로 나뉜다’라고 할 만큼 한 획을 그은 선생님께서 이 책의 추천사를 써주신 점에 대해서 이 자리를 빌려 무한 감사를 드린다. --- 옮긴이의 서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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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론≫
역사적으로 모든 중관학자들은 ≪중론≫을 통해서 중관사상을 이해하려고 했다. 이 때문에 다수의 주석서들이 남아 있으며 현대의 중관학자들 또한 중관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중론≫을 연구하고 있다. 각기 다른 전통을 낳았던 주석서들과 현대의 여러 역본들에 관통하고 있는 ≪중론≫ 원문에서 제일 중요한 주제는 ‘일체 무자성’이다. 사태들은 무자성이다. 왜냐하면 다른 것으로 변하는 것이 (사태들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무자성인 사태(들)은 (자성을 띈 것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사태들은 공하기 때문이다. ―제13품. 형성 작용[行]에 대한 고찰, [173. (13-3)]번 게송 바로 이 일체 무자성의 ‘0의 법칙’으로 인해 연기실상의 세계를 고정하려는 모든 형이상학적인 시도, 개념, 정의로 된 언설의 세계는 오직 가설의 세계가 되는 것이다. 연기실상의 세계를 설명하려는 이 희론의 세계는 곧 언설의 세계다. 용수는 ≪중론≫의 귀경게에서 연기를 설명하는 것은 8불로만 가능하고 그리고 이것이 곧 희론이고 자기 자신이 붓다를 경배하는 ‘희론이 적멸하여 적정한 상태에 머물 수 있는 가르침을 베풀어 준 것’이라고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연기가 곧 공성이고 그것을 설명한 것이 중도임을 명확하게 언급하고 있다. 연기(緣起)인 그것 바로 그것을 공성(空性)이라고 말한다. 바로 그것에 의지하여[緣] 시설(施設)된 것[=假名] 그 자체가 바로 중도(中道)이다. ― 제24품.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고찰 , [362. (24-18)]번 게송 한역 경전권에서 ‘중도(中道)’로 통용되는 이것의 정확한 의미는 가운데 것[中], 즉 상견, 단견의 양견을 여읜 것이지만, 한번 굳어진 전통은 쉽게 바꾸지 않는 것이라 오늘날에도 중도와 중관은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용수는 반야부의 공(또는 공성)의 주장을 논파를 통하여 논리적으로 설명하는 중관학파의 사조답게 공성을 강조하며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논박자를 맹비난한다. 그것[공성]에 대해서 (그렇게) 말하는 바로 그대는 공성(空性)의 목적과 공성(空性)과 바로 (그) 공성(空性)의 의미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그와 같이 (공성을) 훼손하는 것이다. ― 제24품. (사)성제(四聖諦)에 대한 고찰 , [351. (24-7)]번 게송 ≪회쟁론≫과 ≪세마론≫ ≪회쟁론≫은 ≪중론≫에 편재되어 있는 여러 논파들 가운데 “소리내지 마!”의 비유 대신에 ‘환술사가 만든 것을 환술로 논파하는 것’으로, 일체 무자성에서 비롯된 연기실상의 세계와 언설의 세계에 대한 ‘나의 주장은 없다’고 선언한 매우 중요한 저작이다. 또한 이 ≪회쟁론≫의 확장판인 ≪세마론≫에는 오늘날의 중관학자들이 용수의 중관사상을 월칭이 귀류논증 중관학파라고 보는 관점을 내놓고 논파하듯 ‘귀류논증에 대한 논파’가 연이어 나온다. ‘(논박자인 그대가) “왜 그런가?” (하고 그 이유를 묻는다면,) ‘(이미) 인식된[知] 대상을 관찰하거나 (아직) 인식되지 않은 대상을 관찰한다.’는 것을 일컫기 (때문이다.) 그것에서, (즉) 만약 (이미) 인식된 대상이라면, (그것에서) 무엇을 관찰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또한) 바로 그 세 번째 관찰하는 것[分別]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귀류논증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 중관학파에서 니야야 학파의 ‘올바른 논리의 16범주’ 가운데 하나인 ‘귀류논증’을 논파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다.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인도의 논리학에서는 ‘귀류논증 자체’를 비논리로 간주하며 매우 제한된 범위 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인도의 전통적인 논리학의 흐름은 ‘존재하는 것만 다룰 수 있는’ 언어학적 특징에서 기인한다. 또한 자띠(j?ti) 논법에 대한 논파 또한 눈여겨볼 부분이다. ≪중론≫에 등장하는 다음의 두 게송은 대표적인 자띠 논법의 예로 알려져 있다. 만약 이 모든 것들이 공(空)하다면 생겨나는 것[生]도 존재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滅]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것의 제거[斷]나 소멸[滅]로부터 (누가) 열반을 바랄 수 있겠는가? 만약 이 모든 것들이 공(空)하지 않다면 생겨나는 것[生]도 존재하지 않고 사라지는 것[滅]도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그렇다면) 어떤 것의 제거[斷]나 소멸[滅]로부터 (누가) 열반을 바랄 수 있겠는가? ― 제25품. 열반(涅槃)에 대한 고찰 , [385. (25-1)], [386. (25-2)]번 게송 산스끄리뜨어 게송의 ‘순야(??nya)’가 ‘아순야(a??nya)’로 바뀐 것 하나 때문에 그 의미가 정반대로 된 이것을 자띠 논법으로 볼 수 있을까? 용수는 니야야 학파의 ‘올바른 논리의 16범주’에 따라 자띠 논법을 사용한 것일까? 아니면 이것이 정립되기 이전에 논파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사용하였던 ‘자유사상가’ 용수의 기질이 드러난 것일까? 이런 의문을 담고 있는 이것은 앞으로도 계속 논의되어야 할 것이다. ≪육십송여리론≫과 ≪칠십공성론≫ ‘60, 70’이라고 아예 그 게송 숫자를 붙여놓고 있는 이 두 저작은 ≪중론≫의 특징을 간추린 핵심판 또는 축약판에 해당한다. 이 때문에 ≪중론≫에서 다루었던 다양한 주제에 대한 논파보다 그 논파법의 근간을 이루는 일체 무자성을 더욱 강조하고 있다. 같은 축약본이지만 약간의 변조를 도입부부터 두고 있다. ≪육십송여리론≫의 1, 2번 게송은 다음과 같다. 어떤 이들의 마음은 존재한다[有]거나 존재하지 않는다[無]는 (생각)으로부터 완전히 떠나 있다. 그래서 (그들은 이런 양견에) 머물지 않는다. 바로 그들만이 (인)연(緣)의 의미와 심오한 무연[無緣緣]을 완전히 이해한다. 먼저 모든 과실(過失)이 발생하게 되는 근거인 ‘존재하지 않는 것 자체[단견론]’에 대한 완전한 논파를 마쳐야 한다. (그리고) 어떤 이치[如理]를 통해서라도 ‘존재하는 것 자체[상견론]’도 또한 (그것이) 논파되는 것을 동일하게 행해야 한다. 첫 번째 게송의 1행의 한역은 ‘상견[有] 단견[無]의 양변(兩邊)을 여읜’ 자를 ‘지자(智者)’, 즉 붓다로 보고 있는데, 여기서 이 책의 목적이 양견을 여읜 중도를 추구한다는 것이 명확하게 드러나 있다. 그리고 두 번째 게송에서는 단견론을 논파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칠십공성론≫ 의 경우 전반적으로 사구부정을 자유자재로 다루고 있는데, 63번 게송에서 보이듯 열반 또한 마찬가지다. 어떤 것[A]이 어떤 것[B]에 의지하여 생기는 것[生]인 사태(이기 때문에) 이것[a]이나 저것[b]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이것[a]이나) 저것[b]은 생기지 않는다[不生]. 사태(事態)와 사태가 아닌 것[非事態], 지어진 것[有爲]과 지어지지 않는 것[無爲], (이와 같은 양변을 여읜) 이것이 (곧) 열반이다. 이 두 ‘축약본’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게송은 ≪칠십공성론≫의 8번 게송이다. 십이연기(十二緣起)는 어떤 고(苦)의 과(果)를 받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발생하지 않는다[不生]. (왜냐하면 그것이) 마음에 하나씩 (순차적으로 생기는 것) 또한 옳지 않고 여럿(이 동시)에 (생기는 것) 또한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중론≫을 포함하여 용수의 저작들뿐만 아니라 ≪중론≫의 주석서들과 현대의 중관학자들까지 하나 같이 ≪중론≫, 제26품. 십이연기(十二緣起)에 대한 고찰 에서 용수가 방편지(方便智)로 옹호하였던 십이연기가 가설로 된 것이라고 묵인하며 ‘(이런 것들이) 발생하지 않는다’고 언급한 적이 없었다. 이 게송을 제외하고 ≪중관이취육론≫ 전체 게송을 훑어보아도 시간의 순차성, 동시성을 통해서 십이연기를 논파하는 것은 등장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한역 경전권에서는 대승법과 성문법으로 구분한 ≪청목소 중론≫에 따라 용수의 십이연기에 대한 옹호를 성문법으로 해석해 왔다. 그러나 청목의 주석을 배제하고 무자성한 연기실상을 반영하는 언설이 가설된 것이라고 본다면, 이 게송에서 보이듯 십이연기도 논파의 대상이 되어야 마땅하다. 이 주장을 용수가 직접 한 것이든, 또는 후대의 중관학자가 한 것이든, 기존의 중관사상 연구에서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던 부분인 만큼 앞으로 남은 중요한 연구 주제다. ≪보행왕정론≫ 용수의 진작이 확실한 ≪권계왕송≫의 확장판인 이 책에는 한역 경전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붓다의 삽십이상(三十二相), 팔십종호(八十種好), 오십칠 추류혹(五十七?類惑), 사향사과(四向四果), 십지(十地) 그리고 여래십력(如來十力)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주 내용을 이루고 있어 티벳 논서에 이 책이 수시로 인용되고 있다. 특히 ‘왜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가?’의 이유가 실려 있는 3, 4번 게송은 기존의 경론들과 비교하여 명확하게 그 목적이 기술되어 있다. 먼저, 선취(善取)의 법, 그 후에 (해탈의) 안락이 생겨나는 것을 (설명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상계의) 선취를 얻은 후에야 점차적으로 (해탈의) 안락이 오기 (때문입니다.) 그것에는 선취의 기쁨과 안락한 해탈을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의 성취를 정리하자면 간단하게 말해 믿음[信]과 지혜입니다. 불교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무수한 이론을 품고 있으나 그것을 신학이 아닌 철학적 측면에서 다루는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기도를 비롯한 여러 신행 활동과 다양한 수행과 비교하여 교학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이미 불교를 관통하는 세계관은 과학적 세계관에 밀려 신화나 전설 수준의 옛 이야기로 전락했다. 그렇지만 이 세계관 속에서 발달한 것이 여러 신행과 수행임을 상기한다면 ‘왜 불교를 공부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직접적으로 마주칠 수밖에 없다. 이 두 게송의 요지는 후생에서의 기쁨을 누리기 위한 선취를 위해서, 그리고 불교의 궁극적인 목적인 ‘고통에서의 해방’이란 궁극적 목적, 즉 안락 해탈을 추구하기 위해서 이와 같은 가르침에 대한 믿음과 그 이유를 아는 지혜를 갖추라는 것이다. 이 ‘초간단 정리’, 즉 ‘선취의 기쁨과 안락한 해탈을 위한 믿음과 지혜’는 오직 이곳에서 등장하는 것인 만큼 새삼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비록 도덕성을 강조하는 저작이지만 중관사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이제론과 ‘논리를 통한 논파’의 게송들도 등장한다. 희론(戱論)이 적멸하여 일어나지 않음이 승의(勝義=진실)라,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접수(接受)가 있지 않으니 (그와 같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이 둘에 의존하지 않아 자유롭게 되는 (것[解脫]입니다). ― 제1 선취안락품(善趣安樂品) , [51. (1-51)]번 게송 여기서 다시 한 번 확인되는 것은 언어로 된 세계인 희론의 세계와 승의의 세계, 즉 연기실상의 세계와의 명확한 구분이다. ‘자유롭게 되는 것’, 즉 해탈은 이 희론에서 벗어나는 것이니 이와 같은 희론의 세계와 연기실상의 세계 사이에서 벌어지는 균열, 마찰, 차이를 아는 지혜가 요구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힌두 6파 철학에 대한 논파도 등장한다. ‘뿌드가라(pudgala=有情)와 (오)온[五蘊]’을 말하는 세상의 수론학자(數論學者), 승론학파(勝論學派)의 제자(들)과 나체외도(자이나교, Jaina)가 만약 있다, 없다를 건넜다는 것을 말한다면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 제1 선취안락품(善趣安樂品) , [61. (1-61)]번 게송 (승론파들이 주장하듯) 이와 같이 시간이 그 끝이 있(다면) 그와 같이 처음도 중간도 세심하게 관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와 같이 찰나가 셋으로 나뉜[三際] 고유한 성질을 가지기 위해서는 세간과 찰나가 (같이) 머물 수 없습니다. ― 제1 선취안락품(善趣安樂品) , [69. (1-69)]번 게송 ≪중론≫에 등장하는 구사론자들을 비롯한 형이상학자들에 대한 ‘무자비한’ 논파, ≪회쟁론≫에 등장하는 다른 니야야 학파에 대한 논파에 뒤이어, 여기서는 수론학파, 승론학파 그리고 자이나교의 이론까지 논파하는데 이것은 이후 중관사상의 발달뿐만 아니라 다른 학파와 종교에서도 중관사상에 대한 비판이 그만큼 심각하게 일어났음을 반증하는 대목이다. 이 밖에도 ≪권계왕송≫에 나오는 바나나 나무에 대한 비유와 환술사가 환술로 만든 것의 예인 허깨비[幻] 같은 코끼리에 대한 비유 등이 나오며 세속의 여러 일에 대한 충고도 언급되어 있다. 금주를 권고하는 대목은 다음 게송과 같다. 술은 세상 (일)을 깔보게 하고 (그대의) 일을 망치게 (하고) 재물 역시 없앱니다. (그리고 또한) 어리석음[痴]으로 (어떤) 일을 (적절하게) 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술을 항상 멀리하십시오. ― 제2 잡품(雜品) , [146. (2-46)]번 게송 이 제2 잡품(雜品) 에는 여러 ‘권고 사항’ 또는 충고가 등장하는데, 그 가운데 빠뜨릴 수 없는 것은 [148. (2-48)]번 게송부터 등장하는 총 11개의 게송에 걸친 ‘음욕에 대한 경계’로, 이것은 비단 세속의 권력자인 왕이나 열반적정을 추구하는 출가자뿐만 아니라 ‘고통에서의 해방’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을 두루 새겨 명심해야 할 부분이다. (젊은) 여자에 대한 음욕은 대개 (그) 여자의 깨끗한 겉모습[色]에 대한 마음으로부터 일어납니다. (젊은) 여자의 몸은 실제로 조금도 깨끗하지 않습니다. ― 제2 잡품(雜品) , [148. (2-48)]번 게송 이와 같은 음욕의 경계가 여성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이 충고를 받는 왕이 남성이었기 때문이다. 양성 평등을 추구하는 오늘날 이 음욕의 경계를 굳이 남성에 제한할 필요는 없고 과거의 유산인 여러 계율을 현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도 이 남성 중심주의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필요하다. 본문에 등장하는 게송의 형태로 된 불교 교학의 근간이 되는 자세한 설명들을 이 해제에서 일일이 다룰 수 없으나 백과사전의 항목들처럼 언급되어 있는 각 게송들은 한 번 즈음 직접 살펴볼 가치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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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 알고 지내던 신상환 박사가 한국어로 옮긴 아짜리아 용수의 ≪중관이취육론≫을 볼 수 있어 감개가 무량하다.
용수는 그의 저작들로 인도에 중관학파를 창시한 사조였고 특히 그의 저작인 ≪중론≫은 이후 많은 주석서들의 근간이 되는 소의경전이다. 나는 신상환 박사의 이 역서(譯書)가 불교 철학을 한국어로 하는 이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불교의 진지한 연구에 크나큰 도움을 제공해 줄 것임을 장담한다.” - 닥터 따쉬 체링(Dr. Tashi Tsering) (바라나시, 사르나스 고등 티벳 연구소(CIHTS) 티벳불교철학과 학과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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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서유기≫의 주인공들이 그러했듯이 온갖 어려움 끝에 부처님의 나라 천축국, 인도에 도착하여 불교 공부에 매진한 후, 삼장법사 현장 스님이 그러했듯이, 우리 불교학계에서 소홀히 했던 티벳 중관학의 보물꾸러미를 가슴에 품고 귀국하여 수년 간 두문불출 역경불사(譯經佛事)에 매진하더니 이번에 용수의 대표작 여섯 편을 묶은 ≪중관이취육론(中觀理聚六論)≫ 전체를 우리말로 온전히 번역하여 풀어놓았다. 참으로 경사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본 추천인은 지금부터 약 20년 전에 ≪회쟁론≫의 산스끄리뜨어 원문과 티벳어 번역문 그리고 한역문의 우리말 대역본(對譯本)을 만들어 출간한 적이 있는데, 이때 산스끄리뜨어 게송과 그에 대한 티벳어 번역문에 사용된 모든 단어의 의미와 문법적 역할을 해설한 ≪회쟁론 범문 장문 문법해설집≫을 만들어 함께 출간하였다. 그리고 이 문법해설서의 머리말을 쓰면서 말미에 “무미건조하기 짝이 없는 이 해설서를 완성하기까지의 하루하루는 그야말로 인고(忍苦)의 나날이었다.”고 밝히면서 “눈 밝은 학인들이 군웅(群雄)처럼 나타나, 역자(譯者)의 이런 모든 작업이 무용지물이 될 그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고 쓴 적이 있다. 신상환 박사의 노작(勞作) ≪중관이취육론≫을 보면서 추천사를 쓰는 오늘이 바로 그 날임을 절감한다.” - 圖南 金星喆 合掌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불교학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