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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문화예술사 입문
제1장 근대국가 형성기: 강화도 조약부터 을사늑약까지(1876~1905) 제2장 일제강점기: 을사늑약부터 해방까지(1905~1945) 제3장 해방기와 이승만 정부 시대: 해방부터 이승만 하야까지(1945~1960) 제4장 1960~1970년대: 윤보선·장면 정부부터 박정희 서거까지(1960~1979) 제5장 1980년대: 전두환 정부부터 노태우 정부 중기까지(1980~1989) 제6장 1990년대: 민자당 합당부터 김대중 정부 중기까지(1990~1999) 제7장 2000년대 이후: 김대중 정부 후반기부터 박근혜 정부까지(2000~20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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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의성의 바탕은 상상력이다. 상상력은 외부 대상으로 인한 신체적 자극이 활성화되어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정신적 능력이다. 일상의 진부한 틀과 내용을 과감히 탈피해 새로운 것, 색다른 것을 향해 나아가게 하므로 예술 활동을 가능하게 하고, 또 이를 촉진한다. 예술철학의 견지에서는 감각적 형상과 추상적 개념을 합친 직관적 통합, 또는 재생적 기억을 생산적으로 변형하거나 재창조와 결합하는 것을 말한다. 상상력은 공상이나 추상적 유토피아와 같은 비현실성과 엄격하게 구별된다. 이 때문에 상상력(아이디어)은 언제나 현실과의 결합성·적합성이 뒷받침되어야 예술로 구체화될 수 있다. _ 28쪽(대중문화예술사 입문)
윤고려(윤코리아)라는 여성은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 아홉 살이던 1899년 미국 워싱턴에서 여학교를 마치고 귀국했는데, 귀국길에 서양옷을 입고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로 양장(블라우스-스커트)을 착용한 여성으로 기록되었다. 윤고려는 대한제국의 문신이자 인천세관장을 지낸 김윤정의 딸로, 본명은 김고라 또는 김고려였다. 윤고려는 이후 독립운동가이자 제4대 대통령 윤보선의 큰아버지인 윤치호가 일간신문에 조선 최초로 공개 구혼(재혼) 광고를 내자 이에 응해 결혼한 뒤 남편의 성을 따라 개명했다. _ 57쪽(제1장 근대국가 형성기) 「목포의 눈물」은 1934년 가사 모집 대회에서 입선한 문일석의 작품에 손목인이 곡을 붙이고, 순회 극단 출신의 가수 이난영이 불러 대히트했다. 일제는 가사 중 “삼백 년 원한 품은 노적봉 밑에……”라는 부분을 문제 삼아 삼백 년 쌓인 원한의 대상이 일본을 지칭하는 것 같다는 이유를 들어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사실 “삼백 년 원한”이란 1592년 임진왜란 때부터 1910년 한일병합으로 국권이 강탈될 때까지 300년간 쌓인 민족의 한을 상징한다. 당시 일제의 조사 과정에서 검열을 통과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가사를 “삼백연의 바람이 목포항 앞 세 개 섬으로 이뤄진 삼학도를 거쳐 유달산 노적봉 쪽으로 분다”라는 뜻의 “삼백연(三栢淵) 원안풍(願安風)”으로 바꿨으나 해방 이후 되돌렸다. _ 93쪽(제2장 일제강점기) 1948년에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한다는 명분으로 ‘국가보안법’을 제정했는데, 국민들이 막걸리를 마시며 이승만 대통령을 욕하다 처벌되는 사례가 언론에 실제 소개되면서 국민에 대한 편의적 탄압을 상징하는 용어로 ‘막걸리 보안법’이라는 말이 유행하기도 했다. 해방 전후의 좌우 갈등기와 6·25 전쟁을 거치며 반공(反共)을 정치 지배 이데올로기로 삼아 외부적으로는 북한을 견제하고, 내부적으로는 언론과 대중문화를 통제하며 정적을 견제해 통치를 수월하게 만들기 위한 목적이었다. _ 119쪽(제3장 해방기와 이승만 정부 시대) 가수 윤복희는 우리나라에 월남치마가 유행하던 시대인 1967년 1월 6일 미국에서 귀국하며 미니스커트를 여러 벌 챙겨왔다. 미국에서 자유로운 생각을 지닌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았기 때문에 종종 미니스커트를 입고 생활할 수 있었다. 그는 귀국 몇 개월 뒤 디자이너 박윤정의 패션 발표회에서 여섯 벌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무대에 선 것을 계기로 ‘미니스커트의 창시자’로 불렸다. 앨범 재킷에도 미니스커트 입은 사진을 사용했다. 일반인이 먼저 들여왔다는 기록이 아직까지 제시되지 않고 있어 그가 처음으로 미니스커트를 들여온 것으로 회자된다. 그러나 귀국 당시 미니스커트를 입고 김포국제공항의 항공기 트랩을 내려왔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1996년 유통 기업인 신세계가 다른 모델을 써서 윤복희가 실제 트랩에서 내려온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미쳤군, 미쳤어. 신세계가 온다”라는 카피의 CF를 기록영화 형태로 찍은 뒤 스틸 사진을 유포해 벌어진 혼란이다. _154쪽(제4장 1960~1970년대) 조용필의 스타덤 형성은 컬러 TV 방송이 시작된 시기와 맞물린다. 컬러 TV는 가수나 팬의 입장에서 모두 생생한 느낌을 주고받을 수 있어 매우 유용한 소통 수단이었다. 이러한 매개체를 통해 조용필과 그 이후에 등장한 많은 가수가 충성도 높은 소녀 팬을 거느리게 되면서 1980년대에 ‘오빠부대’라는 문화 담론(culture discussion)을 형성했다. 오빠부대는 1990년대 뉴 키즈 온 더 블럭(New Kids on the Block) 내한 공연,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 H.O.T.와 젝스키스의 출현 등을 차례로 거치며 ‘빠순이’라는 명칭으로 변화했다. _185쪽(제5장 1980년대) 1980년대 경기 호조와 서울 강남 지역 부동산 가격 상승 등으로 중산층이 확대된 데다 해외여행 자유화(1989년 1월 1일에 완전 자유화 시행)로 여행이나 유학을 갔다 오는 사람들이 늘면서 전반적인 의식이 개방적·감성적·개성적으로 변한 것이다. 신세대들은 학창 시절 군사독재 문화를 경험하지 않았으므로 자연스레 생각·행동에서는 억압보다 발산을, 스타일에서는 일반적인 것보다는 튀는 것을 중시했다. 방송 영상, 인터넷, PC 통신, 인터넷 기술, 무선 전송의 발달과 자동차 보급 확대는 이들을 하나로 묶는 매개 기능을 했다. 감성세대는 ‘신세대’ 또는 ‘X세대’라 불리게 되었다. _ 218쪽(제6장 1990년대) 연극계에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연극의 거리인 서울 동숭동 대학로는 상업화에 따른 지가·임대료 상승과 그에 따른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 현상, 도시 정책의 문제점, 대형 극장과 상업자본의 공세 등으로 위기를 겪기 시작했다. 2000년 초 50여 개였던 공연장은 160여 개까지 늘어나 경쟁이 더욱 치열해진 가운데 스타 마케팅을 앞세운 대형 극장이 뮤지컬과 연극에 뛰어들면서 소극장의 입지가 점차 축소되었다. 대기업과 자본가는 대학로 건물을 속속 사들여 새롭게 단장하고, 극장 대신에 돈을 더 많이 벌 수 있는 음식점, 카페, 술집 등 상업 시설을 유치했다. _ 258쪽(제7장 2000년대 이후) 한류 산업은 그 자체만으로도 부가가치를 창출하지만, 다른 산업의 성장을 이끄는 효과가 매우 크다는 점도 확인되었다. 한류에 의해 우리는 문화 종속국이라는 오명을 벗고 독립성을 강화하며 자부심을 한층 높이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도 문화의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위상이 바뀌었다. 외교에서 문화예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 것도 큰 성과다. 그러나 예술 작품이 문화 논리가 아닌 자본 논리에 편입되어 수익성이나 흥행 위주로 평가받는 흐름이 조성된 것은 문화의 품격성과 공익성을 고려하면 비판의 여지가 있다.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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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말 대중문화의 태동기부터 오늘날 한류의 전성기까지
부침의 시대와 함께하며 경계를 넘어 발전해온 한국 대중문화예술의 입체적 기록 그들은 무엇을 듣고 읽고 보았을까 풍성하게 그려낸 옛 일상의 풍경 1938년, 1954년, 1994년 하면 각각 무엇이 생각나는가? 정치적 상황만 떠올린다면 당신이 아는 역사는 반쪽짜리다. 시대마다 널리 흥얼거린 노랫말이 있었고 입소문을 탄 소설이 나왔으며 유행하던 패션이 있었다. 『한국대중문화예술사』는 이렇듯 대중문화예술의 여러 장르를 중심에 놓고 한국의 근현대사를 써 내려간 책이다. 저자는 일제의 통치가 막바지로 치닫던 1938년 발표된 「오빠는 풍각쟁이야」의 노랫말에서 ‘오빠’가 당시 신랑감으로 인기가 높았던 명동 샐러리맨이자 중산층 이상의 남성이라고 유추한다. 한국전쟁 이후 1954년부터 연재되어 돌풍을 일으킨 정비석의 소설 『자유부인』에서는 카사노바 박인수 사건 등에 대한 관심과 맞물려 자유와 욕망을 점차 중시하게 된 시대 분위기를 읽어낸다. 1994년 배우 이정재와 신은경 주연의 영화 젊은 남자에서는 당시 사회적 주목을 받았던 ‘오렌지족’과 ‘야타족’의 세태를 들여다본다. 근대화 시기부터 최근까지를 아울러 방대한 정보로 가득한 이 책은 ‘옛날’에도 우리처럼 아름다움과 재미를 추구하며 울고 웃던 사람들이 살아갔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일깨운다. 문화는 모든 것과 연결된다 입체감을 더한 우리의 근현대사 『한국대중문화예술사』가 문화사만 강조하는 책은 아니다. 정치적·사회적 배경을 포함한 시대의 전체적 흐름 속에서 대중문화의 역사를 파악하도록 이끈다. 그래서 각 장에 덧붙인 시대별 ‘정치·사회 미리보기’와 ‘대중문화예술 연표’에도 공을 들였다. 이를 통해 나운규가 제작해 1926년 개봉된 영화 아리랑은 해방을 염원하는 정서가 강렬하게 표현된 작품이라는 점, 조용필의 ‘오빠부대’는 1981년 컬러 TV 방송이 시작되면서 가수와 팬의 거리가 좁아진 시기에 형성되었다는 점, 시나리오 검열 폐지가 1987년 민주항쟁의 여파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점, 2000년대에 대중문화가 전반적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배경에는 주 5일 근무제 실시가 있었다는 점 등 정치적·사회적 사실과 문화적 사실을 자연스럽게 연결할 수 있다. 최근 국정 농단이 불거지며 수면 위로 떠오른 ‘문화계 블랙리스트’ 또한 격동의 근현대사 속에서 전개된 표현의 자유와 그에 대한 통제·억압 간 오랜 줄다리기의 연장선이라는 점, 그러한 줄다리기가 이제는 상업화라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했다는 점도 확인할 수 있다. 이렇듯 문화사가 포함된 한국 근현대사는 입체적인 역사 읽기를 자극한다. 케이컬처는 어디에서 왔을까 교류·이식·재창조하는 유연성의 힘 역사에 결과론을 적용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러나 책을 덮고 나면 자연스럽게 오늘날 한국 대중문화의 화두를 떠올리게 된다. 즉, 한류가 어디서 왔고, 어떻게 드라마·가요·예능·산업으로 뻗어나가 케이컬처가 되었으며, 앞으로 어떤 모습이 될지 궁금증이 생긴다. 문화 바깥의 분야들과 문화 안의 장르들을 종횡무진 넘나든 저자의 결론은 아마 ‘유연함’이 아닐까. 대중문화가 서로를 자극하며 융합하고 발전한 사례들이 그 힌트다. 이 책에서 언급되는 가장 익숙한 최근 사례는 싸이의 「강남스타일」이다. 저자는 싸이의 성공 이유를 음악의 힘에서만 찾지 않는다. 미디어의 발달로 비롯된 교류 방식의 변화 속에서 그의 랩과 댄스에 나타난 ‘B급 정서’가 절묘하게 이식과 재창조를 거쳤기 때문으로 본다. 사실 한국의 대중문화예술은 근대화 이후 서구 문화의 유입에서 자유롭지 않았으며, 내부적으로도 정치적 억압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모방 속에서도 끊임없이 재창조를 시도해왔고, 시대적 상황에 예민한 안테나를 세우며 많은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일상에 녹아들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유연성은 케이컬처 이전에 문화의 본능이기도 하다. 한국의 대중문화가 한류를 넘어 케이컬처가 된 것은 이러한 본능에 충실했기 때문이며, 앞으로도 세계인들과 소통하는 문화로 남는 방법 역시 문화의 본능적 유연성이 안정적으로 발휘되도록 제도와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