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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와 마가복음
마태의 일생 마태복음에 대하여 나만의 마태복음 제1장∼제16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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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 1:23)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 같다. 성경을 보면 여호와의 나라 이스라엘에 유난히 귀신들린 사람이 많았던 것 같다. 하나님의 선택받은 나라에 특히 귀신의 활동이 활발하다는 것은 우리가 영적으로 왕성할수록 귀신들의 훼방도 많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또는 이 회당에서 그리스도의 사역을 훼방하려고 사탄이 보낸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오심으로써 괴로워지는 것은 귀신이다. 내가 예수님의 영(성령님)으로 충만하다면 귀신들린 사람이 있을 경우에 귀신이 괴로워져야 하는데, 항상 성령 충만하기가 참 어려운 일인 것 같다. 항상 성령 충만하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과 기도 밖에는 없을 것 같다. (막 2:26) “그가 아비아달 대제사장 때에 하나님의 전에 들어가서 제사장 외에는 먹어서는 안 되는 진설병을 먹고 함께 한 자들에게도 주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은 그 자신과 부하들을 위해 제사장에게 음식을 요청했고, 제사장은 이것을 허락하고 제사장들만 먹을 수 있게 되어 있는 진설병을 제공하였다. 생명이 위급할 때 등 긴급 상황에서는 지나치게 율법만 주장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바른 것은 아니다.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경우에 한해 허락이 가능한 범위가 있다. 복음의 전체적인 맥락은 무시하고 말씀 한 구절을 가지고 이단 판정을 하는 것도 하나님의 크신 뜻 안에서는 바르지 못할 것 같다. 하나님의 마음을 다 알 수 없지만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으면 율법에 사로잡힌 신앙인이 되기 쉽다. (막 3:5) “그들의 마음이 완악함을 탄식하사 노하심으로 그들을 둘러보시고 그 사람에게 이르시되 네 손을 내밀라 하시니 내밀매 그 손이 회복되었더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병 고치는 것을 못 마땅해 하는 사람들에게 노하셨다. 지나치게 율법적, 전통적, 종교적 생각에 갇혀있으면 바로 곁에 오신 주님조차도 분별할 수 없다. 안식일을 준수하는 일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얼마나 자주, 그리고 오랫동안 주님께서 내 곁에 다녀가셨는지 짐작조차도 할 수 없을지 모른다. 예를 들어 주일예배출석이라는 명목으로 주일예배를 지나치게 강조할 때도 많았을 것이다. 물론 한 주에 예배 한 번은 꼭 드려야 하는 것은 맞지만, 주일출석에 기준을 맞추는 과정에서 어쩌면 주님의 마음을 상실한 상태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상처를 받은 성도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님의 마음이다. (막 8:34-35) “무리와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자기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와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이것은 기존의 세상과는 다른 새로운 공동체의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상이 아니라 실재여야 한다. 새 공동체가 되어야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자기를 부인하면 정치적 견해조차도 다 녹여버릴 수 있고, 자기 십자가를 지면 다른 사람의 허물은 잘 보이지 않게 된다. 최근에 성도들과 지도자들을 보면 예수님이 아니라 어떤 정치적인 견해에 순종하는 사람들처럼 보인다. 피해의식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그것을 벗겨내야 진실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지도자들이 순수하게 원점에서 주님을 바라볼 수 있으면 참 좋겠다. (막 9:50)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소금은 맛을 내고 썩지 않게 하며 생명을 유지할 수 있게 해준다. 이 소금을 생각하면서 자기주장을 버리고 화목하게 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이다. 완전히 두 쪽 난 이 나라에서 어떻게 하는 것이 소금을 두고 화목하는 것인지 참으로 혼란스러운 시절이다. 내가 잠잠히 녹을 때 반대편도 함께 녹으면 얼마나 좋겠는가만, 내가 녹을 때 반대편은 전혀 녹지 않고 오히려 더 강한 모습을 보인다면, 내가 녹는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고 실패한 느낌과 억울함만 생길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하나님은 우리가 스스로 녹기를 원하신다. 내가 녹지 않으면 버려지고 밟히게 될 뿐이라고 하신다. (막 10:6-9)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지니라 하시더라” 내가 아는 권사님의 친구 집사님의 딸이 동성애자이다. 얼마나 안타깝고 슬퍼하는지 모른다. 사람은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기에, 선천적이든 후천적이든 동성애자로 산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은 아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하여 안타깝게 생각하고 배려할 수 있으면 그렇게 해야 한다. 그리고 그들에게도 구원이 베풀어져야 한다. 그들 중에 선천적인 사람도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고치거나 바꿀 수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 스스로도 그것을 벗어나려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런 노력 없이 오히려 그것을 장려하거나 무조건 보호해 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는 이야기이다. 치료시설이나 체계를 갖추는 노력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제도를 만들어서 오히려 역차별을 가하는 것은 더욱 금해야 할 일이다. 그러므로 동성애차별금지법이 아니라 동성애치료우대법 같은 것이 먼저 만들어져야 한다. 동성애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것도 마찬가지이다. 기독교 안에서는 먼저는 그들에 대한 사랑과 영혼구원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기본 전제이다. 내 자식이나 형제가 그런 상황을 만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공감이 필요하다. --- 본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