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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제1장 죽기에 좋은 시간 제2장 위학증의 주본 제3장 한 가지 기발한 계책 제4장 춘산에 불이 나니 제5장 음모 제6장 폭발하는 살의 제7장 두 개의 태양 제8장 흰옷 제9장 한 사나이가 길목을 지키면 제10장 팔사품의 소용돌이 제11장 미궁의 붉은 바다 제12장 그날 이후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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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22일, 이순신은 권율의 밀서를 받았다. 이순신은 3일에 받은 이연의 밀지에 이어, 지난 13일에는 영의정 류성룡의 사신을 이미 받았기 때문에 그도 일이 돌아가는 대강의 낌새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막상 이순신은 ‘27일에 반드시 출동하라’는 권율의 명령을 받고는 대략 난감했다. 작전개시 5일 전이었다. 대부분의 군졸들은 가을걷이 휴가 중이었다. 정성들인 둔전 농사의 첫 소출인 가을걷이를 못하면 군사건 민간인이건 모두 굶어죽을 판이었다. 이순신은 막막했다. 자신이 전혀 통제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왜 이 쓸데없는 소란을 피우는가?’ 9월 23일, 이순신은 비변사로부터 ‘매복한 뒤 깃발, 징, 북 등으로 왜적들을 유인해 공격하라’는 ‘기책’을 전달 받았다. 잠시 후, 경상 우수사 원균이 왔다. 원균은 비밀작전 얘기를 하자며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예의 그 쓸데없는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다. 이순신은 마음이 답답해 바닷가 탁 트인 곳으로 원균을 데리고 갔다. 하지만 원균은 날이면 날마다 지겹도록 보는 바닷가 풍경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물론 이순신의 지금 심경 따위는 지겨운 바닷가 풍경보다 더 관심이 없었다. 그의 눈에 이순신이 보일 때마다 머릿속엔 언제나 이런 생각만 들곤 했었다. ‘저게 대체 인간인가, 목석인가?’ 사실 원균 스스로도 자신이 조금 이상할 때가 있었다. 이래저래 이순신과 감정상의 구원이 있다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순신만 보면 자신의 행동이 왜 그렇게까지 과장되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원균은 어떤 순간에도 극단적으로 감정표현을 절제하는 이순신이 너무 싫었다. 그가 보기에 거드름을 피우는 건 자신보다 이순신이 더했다. 더욱 참을 수 없는 건 다른 사람들이 볼 때 거드름이 아닌 척 거드름을 피운다는 사실이었다. 어쨌든 이제 뭔가 기회가 온 듯싶었다. 그는 지금 행운이 독 안에 들어있기라도 한 듯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한껏 들떠 있었다. 그는 이순신을 향한 거드름을 거두지 않고, 도발적인 사설을 본격적으로 늘어놓기 시작했다. “통제사는 어떻게 보시오? 거제도를 쓸어버리고 보급로를 차단할 수 있다면 왜놈들 모두 독 안에 든 쥐 아니겠소? 푸하하하.” 이순신은 시도 때도 없이 코를 벌름거리며 허접하게 웃는 원균의 저런 모습이 특히나 가소로웠다. “잘됐으면 좋겠소만…….”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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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8년, 노량해전의 마지막 비밀지령 이순신을 제거하라!!
제1회 황금펜 영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 『누가 이순신을 쏘았는가』는 도서출판 청어람, KBS 한국방송공사, 한국영화감독조합(DGK), 추리작가협회와 함께 진행된 제1회 황금펜 영상문학상 우수상 수상작이다. ‘이순신 소설’이 ‘또’ 나왔다. 잊을 만하면 나오는 이순신 관련 서적들. 왜 그렇게 쏟아져 나올까. 역사 속 전쟁 영웅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이순신 같은 전쟁 영웅은 손에 꼽을 정도로 아주 드물다. 그는 나라를 구하기 위한 전쟁에 임했지만 나라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상태에서 기적 같은 승리를 이끌어냈다. 도움은커녕 자신의 목숨을 내놓고 전쟁을 치러야만 했다. 역사 속에서 벌어진 이러한 사태를 이해하기 위한 시선의 다양성이 문학적 형상화의 다양성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시선 속에는 당연히 다양한 ‘문학적 이데올로기’가 숨어있을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문학적 이데올로기 속에 왜 ‘이순신 소설’이 반복되는가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제목을 보고 ‘누가 이순신을 쏘았는가’하는 사실을 추리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전부인 양 생각하는 독자들도 혹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장르상 ‘팩션’에 해당하는 소설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장치의 성격이 더 짙다. 그보다는 이 이야기를 통해 소설적 허구로 재구성된 이야기를 풀어놓는 것에 목적을 둔다. 성리학이 조선을 지배한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지금도 성리학적 ‘충신’의 관점으로만 조선, 선조 이연, 이순신을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난센스다. 작가는 현재의 시각으로 성리학에 지배당하는 조선과 고민하는 이순신을 바라보고자 했다. 그리고 작가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순신을 ‘성리학 이데올로기에 함몰된 맹목적인 성웅’의 틀에만 가둘 수 있는 인물은 아니라고 봤다. 우리는 ‘성웅 이순신’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가 이순신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하지만 이해할 수는 있다. 수백 년을 더 진보한 2012년 대한민국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므로 1592년 조선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소설 속 인물들은 우리가 그러는 것처럼 비루한 정치와 그 비루한 정치를 이고 가는 세상 속에서 때로는 정의롭고 때로는 부정의하게 각자 자신들의 삶을 자신들의 몫만큼 살아낼 것이다. 그 절망 속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지 없는지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