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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다시 펴내며
글을 열며: 말씀이냐 체험이냐 1부 사도행전의 방언 1장 방언의 첫 번째 등장: 오순절 사건 2장 방언의 두 번째 등장: 사마리아인 회심 사건 3장 방언의 세 번째 등장: 고넬료 회심 사건 4장 방언의 네 번째 등장: 에베소 세례 요한 제자들 회심 사건 5장 사도행전 방언 사건의 결론 : 예언 성취를 통한 구속사 완성 2부 고린도전서의 방언 1장 고린도전서 방언 이해를 위한 배경 2장 고린도전서 12장: 은사의 본질 3장 고린도전서 13장: 은사보다 귀한 것과 온전한 것의 도래 4장 고린도전서 14장: 방언의 본질과 역할 3부 오늘날의 방언 1장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닌 이유 2장 오늘날의 방언 열풍이 줄 수 있는 위험들 글을 닫으며: 정말 하늘의 언어인가 부록 예언의 은사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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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습니다. 죽었다 깨어나도 당시에는 그 찬양의 가사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예수님을 사랑하고 싶다는, 그래서 오로지 그분에게만 미치고 싶다는 갈망을 버릴 수도 없었습니다. 저는 직감하고 있었습니다. 어차피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평생을 살아야 한다면 답은 오로지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그것은 바로 누구나 모범답안 읊듯이 그저 드리는 신앙고백이 아닌,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예수’에 대한 ‘진짜’ 사랑의 고백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랑이 없는 한, 기독교 신앙은 어쩌면 평생에 걸친 가면무도회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_「책을 다시 펴내며」 중에서
오히려 방언을 하게 된 후 ‘마침내 나도 방언을 한다’는 그 사실에 실소가 터졌습니다. 그리고 그때에야 비로소 이런 의문이 들었습니다. 오래 전 왜 그토록 방언이 하고 싶어 목을 맸는지, 왜 방언하는 사람들만 보면 부러워 미칠 것만 같고 마치 방언만 하게 되면 신앙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생각했는지, 과거의 나 자신에게 되묻게 되었습니다. 방언을 할 수 있게 되고 나서야 그동안 까맣게 잊었던 오래 전 방언에 대한 그 열정을 기억했을 뿐 아니라, 동시에 한때 그토록 사모했던 방언이 지닌 극명한 문제점들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_「책을 다시 펴내며」 중에서 성경을 자세히 읽다 보면 성경 속에는 딱 ‘무엇’이라고 정의내리기 어려운 개념이 많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가장 흔히 사용하는 ‘기도’라는 말을 생각해 봅시다. ‘기도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명확히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 당연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대상까지도 막상 파고 들어가면 쉽게 정의내리기 어려운 주제로 가득 찬 성경 안에서 명확하게 정의 내려진 주제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방언’입니다. _「글을 열며」 중에서 오늘날 방언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분들은, 고린도전서에 나오는 방언은 사도행전의 방언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과연 고린도전서의 방언이 사도행전의 방언과 다른지, 즉 성경이 인정하는 방언이 한 가지가 아니라 두 가지인지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 마지막으로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 친숙한 우리 주변의 방언이 정말 하나님의 가슴으로 향하는 하늘의 언어인지 자세히 검토해 보겠습니다. _「글을 열며」 중에서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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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언 열풍에 휩싸인 한국 교회를 향한 용기 있는 발언
이 책은 방언에 대해 저자가 평소에 가지고 있던 생각을, 2007년에 출간된 김우현의 『하늘의 언어』를 읽고 방언에 대한 오해가 한국 교회에 미칠 영향을 우려하여 쓴 글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은 개혁신앙을 추구하는 교단의 교리연구위원회나 조직신학 교수, 신약학 교수가 써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데, 당시 아마 아무도 나서지 않아 평신도인 저자가 직접 나선 것 같다. 학자들에겐 학문성이 결여되었다는 비난을, 은사주의자들에게는 성령 받지 못한 자라는 비난을 받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기 있게 나선 것이다. 직구로 승부하는 저자 특유의 전개 방식 목차부터 놀랍다. 흔히 기독교 서적을 좀 읽었다 하는 이들의 특징은 성경 자체보다는, 자신이 독서를 통해 얻은 지식을 최대한 인용하여 논리적으로 잘 정리하는 전개방식을 택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저자는 사도행전과 고린도전서를 직접 주해하며 자신의 논지를 풀어나간다. 야구로 치면 오직 직구만으로 삼진아웃을 시키겠다는 심산이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말보다 성경이 무엇을 말하는지 함께 알아보자!”라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이미 여러 모양으로 번역된 성경이 있고, 이 성경의 문맥을 성령의 조명에 의지하여 꼼꼼히 관찰한다면, 지극히 상식적이고 선명한 결과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저자가 학자들의 논법으로 책을 썼다면 그러한 책을 일반 성도들이 읽을 리 만무할 것이고 그러면 애초에 저자가 목표했던 한국 교회를 위한 책과는 거리가 멀어졌을 것이다. 예리한 관찰력과 창의적 재연으로 몰입도 높여 저자는 고린도전서 14장에 비추어 사도행전의 방언사건을 설명하는데, 특히 방언이 구원 역사에서 지니는 위치와 역할을 설명하는 데 많은 지면을 할애한다. 저자 특유의 예리한 관찰력과 논리로 논지를 전개하면서도 쉬운 우리말로 글을 써나가고 있다. 예를 들어 오순절 사건의 창의적 재연은 독자를 성경의 세계로 쉽게 몰입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또 “멕시코 어느 동네에서…제주도 사투리가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라는 가상의 상황은 성경 본문 속에서 오순절 사건의 목격자들이 느꼈을 충격을 독자들에게도 생생하게 전해준다. 결국, 체험이냐 말씀이냐 저자는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네 번의 방언사건 각각의 구속사적 의미를 철저히 본문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지적해 냄으로써 결론적으로 오늘날의 방언이 성경의 방언이 아님을 주장한다. 오늘날의 방언은 구약의 성취를 드러내거나 교회의 덕을 세우지 않으며, 성령께서 그분의 뜻대로 주시는 것도 아니며, 집회인도자의 영력(?)에 따라, 얼마나 귀찮게 조르느냐에 따라 주어지는 무의미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왜 이토록 방언에 열광할까? 저자가 지적했듯이 성경 말씀만으로는 하나님이 정말 계신지 믿기 어렵기 때문이다. 인격이신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근거해 그분을 믿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에 보이고 내가 느낄 수 있는 어떤 것에 더 끌리기 때문이다. 그렇다. 표적을 구하던 악하고 음란한 세대는 지금도 여전히 존재한다. 오늘날 방언에 대한 오해는 단지 하나의 은사에 대한 오해로 그치지 않고 기독교의 구원관, 신관의 왜곡을 낳는다. 그것은 결국 한국 교회를 점진적으로 하향 평준화 시킬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은 방언 열풍에 휩싸인 한국 교회에 반드시 필요한 경고이자, 성경으로 돌아가기 원하는, 깨어 있는 평신도의 간절한 외침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