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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동태의 세계
의지와 책임의 고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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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인간이 애초에 책임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면?_ 추천의 말
어떤 대화_ 프롤로그

제1장 능동과 수동을 둘러싼 문제들
제2장 중동태라는 옛 이름
제3장 중동태의 의미론
제4장 언어와 사고
제5장 의지와 선택
제6장 언어의 역사
제7장 중동태, 방하, 사건─ 하이데거, 들뢰즈
제8장 중동태와 자유의 철학─ 스피노자
제9장 빌리들의 이야기

에필로그
중동태 소생시키기 프로젝트_ 옮긴이의 말

저자 소개 2

고쿠분 고이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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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ichiro Kokubun,こくぶん こういちろう,國分 功一郞

1974년 일본 지바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파리 제10대학 및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DEA를, 도쿄대학교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다카사키 경제대학교 경제학부 준교수로 재직하며 철학과 현대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연구 주제는 스피노자를 비롯한 17세기 철학과 들뢰즈, 푸코, 데리다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현대 사상이다. ‘즐겁고도 진지한’ 공부와 사회운동을 목표로 신문, 텔리비전, 잡지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행동파 철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인간은 언제
1974년 일본 지바현에서 태어났다. 와세다대학교 정치경제학부를 졸업하고, 파리 제10대학 및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DEA를, 도쿄대학교 총합문화연구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다카사키 경제대학교 경제학부 준교수로 재직하며 철학과 현대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 주요 연구 주제는 스피노자를 비롯한 17세기 철학과 들뢰즈, 푸코, 데리다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현대 사상이다. ‘즐겁고도 진지한’ 공부와 사회운동을 목표로 신문, 텔리비전, 잡지 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발언하는 ‘행동파 철학자’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 『고쿠분 고이치로의 들뢰즈 제대로 읽기』,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다가올 민주주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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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사이에서 공부의 신처럼 살았다. 1967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한 뒤, 회사를 좀 다니다가 그만두고선 쭉 자유연구자로 살았다. 박성관에게 공부는 경계가 없었다. 분야 간 장벽은 물론, 앎과 삶의 경계마저 허물어졌다. 특히 진화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사이버네틱스 등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아나키한 사상들을 철학하며 수많은 세미나와 강좌를 열었고 그 불온함을 나누려 애썼다. 2022년 설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에도 아무도 못 말렸다. 그에게 공부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이었기에, [종의 기원을 읽자!], [사이버네틱스를 읽자!], [중간계의 상
사람들 사이에서 공부의 신처럼 살았다. 1967년 충남 예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종교학과를 졸업한 뒤, 회사를 좀 다니다가 그만두고선 쭉 자유연구자로 살았다. 박성관에게 공부는 경계가 없었다. 분야 간 장벽은 물론, 앎과 삶의 경계마저 허물어졌다. 특히 진화론, 상대성이론, 양자역학, 사이버네틱스 등 기존의 질서를 뒤흔드는 아나키한 사상들을 철학하며 수많은 세미나와 강좌를 열었고 그 불온함을 나누려 애썼다.

2022년 설암 진단을 받고 투병 중에도 아무도 못 말렸다. 그에게 공부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일이었기에, [종의 기원을 읽자!], [사이버네틱스를 읽자!], [중간계의 상상: 작업장, 정원, 강호] 등의 강좌가 2024년 2월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2024년 3월 5일, 박성관은 한 사람으로서의 삶을 마감하고 “사물의 그늘”에서 상쾌한 아타락시아를 누리게 되었다. 『종의 기원, 생명의 다양성과 인간 소멸의 자연학』,『다윈에게 직접 듣는 종의 기원 이야기』,『아인슈타인과 광속 미스터리』 등 자연과학과 철학을 넘나드는 저서를 남겼으며, 『분해의 철학』, 『현대 철학의 최전선』, 『응답하는 힘』, 『중동태의 세계』, 『장소의 운명』 등 다수의 번역서를 통해 새로운 사상의 세계를 독자들에게 소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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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06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574g | 150*210*20mm
ISBN13
9788962622881

책 속으로

이런 식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뭔가를 한다(I do something)’라는 문장은 의외로 복잡한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내가 뭔가를 한다’라는 방식으로 지시되는 사태나 행위라 해도, 세세하게 검토해보면 내가 그것을 스스로 의지를 가지고 수행한다고는 단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언가를 한다’라는 문장은 ‘능동(active)’이라고 형용되는 형식하에 있다. 방금 전에 우리가 확인한 것은 능동 형식으로 표현되는 사태나 행위가 실제로는 능동성 범주 속으로 완전히 수렴되지는 않는다는 점이었다. ‘내가 걷는다’라는 문장이 지시하고 있는 것은 내가 걷는다기보다 오히려 ‘나에게 있어서 보행이 실현되고 있다’라고 표현되어야 할 사태였다. 즉, 능동 형식으로 표현되는 사태나 행위라 해도, 그것이 반드시 능동 개념에 의해 설명될 수 있다고는 보장할 수 없다. 내가 사과하는 일이 요구되었다 해도, 거기서 실제로 요구되고 있는 바는 내가 사과하는 것이 아니다. 나의 안에서 사과의 심정이 나타나는 일인 것이다.

능동이라 부를 수 없는 상태를 가리켜 ‘수동(passive)’이라 부른다. 수동(受動)이란 문자 그대로 받는(受) 처지가 되어 뭔가를 겪는 것이다. 능동이 ‘하다’를 가리킨다고 한다면, 수동은 ‘되다(당하다)’를 가리킨다. 예컨대 ‘뭔가가 나에 의해 이루어진다(something is done by me)’라고 할 때, 그 ‘뭔가’는 나로부터 작용을 받는다. 그렇다고 한다면 능동 형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사태나 행위는, 능동과 정확히 짝을 이루는 수동 형식에 의해 설명하면 된다고 결론지을 수 있을까?

능동과 수동의 구별은 모든 행위를 ‘하다’와 ‘당하다’로 배분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보았듯이 이 구별은 대단히 불편하고 부정확한 것이다. 능동 형식이 표현하는 사태나 행위들이 전부 능동성 범주에 매끄럽게 들어맞지는 않으며, 그렇다고 해서 그 행위들을 수동 형식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별을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 pp.26-27

수업 중에 학생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경우, 교사는 그 일에 대해 질책을 한다. 하지만 자세히 캐물어보자 그 학생이 “실은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어린 여동생과 남동생을 위해 매일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충분한 수면을 취하기가 좀체 쉽지 않고, 수업 중임에도 앉은 채로 졸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라고 사정을 설명하기 시작했다면 어떨까? 교사는 아마도 질책한 일을 후회할 것이다. 아니, 그 수준을 넘어서 “그랬어? 몸은 잘 챙기도록” 등, 격려의 말을 건네는 경우까지 있을 것이다. 수업 중에 졸았다는 행위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그런데도 왜 교사의 대응은 돌연 정반대로 바뀌고, 또 우리 역시 그 변화에 납득하게 될까? 그가 질책 대상에서 벗어난 것은 ‘졸다’라는 행위에 대해 그에게는 책임이 없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가정 사정 때문에 그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판단된 것이다.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해야만 한다. 밤늦도록 자지 않은 것도 다음 날 등교에 대비해 일찍 잠자리에 드는 것도 모두 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밤에 잠을 자지 않은 탓에 다음 날 교실에서 졸았다면, 그 사람은 그 졸음의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질책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매일 저녁 아르바이트를 하던 그는 자신의 의지로 자유로이 선택하는 상황에 있지 못했다고 간주되었기 때문에, 질책 대상으로부터 벗어난 것이다. 바꿔 말하면 사람이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능동적이어야만 한다는 얘기가 된다. 수동적일 때, 혹은 수동적이지 않을 수 없을 때 사람은 책임을 질 존재로 간주되지 않는다. 그는 수면 시간을 줄이도록 강요당하는 수동적인 상태에 있다고 판단되었다. 그런 까닭에 책임지는 일 없이 질책 대상에서 벗어난 것이다.

반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일도 가능했는데 (텔레비전 게임 등을 하며) 시간을 질질 끌다가 잠을 못 잤다면 대부분의 경우 그는 의지가 약한, 수동적인 인물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인물인 그가 수업 중 졸음으로 인해 질책당하는 단계가 되면, 돌연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는 의지를 갖춘 능동적인 인물로(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의지를 발휘하지 않은 인물로) 갑자기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너는 빨리 자든가 밤을 새든가를 자유로이, 자신의 의지로, 능동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상황에 있었다. 그런데 너는 밤새 자지 않는 것을 선택했다. 그런 탓에 지금 너는 수업 중인데도 졸고 앉아 있다. 졸음의 책임은 너 자신에게 있다. 너는 질책당해 마땅하다’라는 것이다.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능동적이었기 때문에 책임이 지워진다기보다는 책임 있는 존재로 간주해도 좋다고 판단되었을 때 능동적이었다고 해석된다는 사실이다.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책임을 지워도 좋다고 판단된 순간에 의지 개념이 돌연 출현한다. ‘밤에 자지 않은 탓에 수업 중에 졸고 앉아 있는 것이니 졸음의 책임을 지워도 좋다’라고 판단된 순간, 그 인물은 밤샘을 자신의 의지로 능동적으로 선택했다고 간주된다. 요컨대 책임 개념은 자신의 근거로 행위자의 의지나 능동성을 내세우지만 실은 그런 것들과는 뭔가 다른 판단에 의거하고 있는 셈이다. --- pp.31-32

프랑스의 언어학자 에밀 벤베니스트가 지적했듯이, 능동태와 수동태를 대립시키는 언어에 일단 친숙해져버리면 이 구별은 점점 더 필수적인 것처럼 느껴진다. 일본어 화자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를 바 없다. 이 구별을 알아버리면 행위는 능동이나 수동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외는 머릿속에서 떠올리는 것조차 어려워지고 만다. 그러나 이 또한 벤베니스트가 지적한 바이지만, 사실은 많은 언어들이 능동태와 수동태라는 구별을 알지 못한다. 이 두 가지 구별은 모든 언어에 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것이 아닌 셈이다. 이 구별을 근저에 두고 있는 듯 보이는 인도-유럽어족에 속하는 언어 들의 경우에도 이 구별은 조금도 본질적이지 않다. 단지 역사적 발전 과정에서 상당히 후대가 되어서야 출현한 새로운 문법 규칙임이 이미 밝혀져 있다.

벤베니스트는 여기서 더 나아가 흥미로운 사실을 전해준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구별이 새로운 것이라는 말은, 일찍이 능동태도 아니고 수동태도 아닌 ‘중동태middle voice’라는 태가 존재했고 이것이 능동태와 대립했다는 것이다. 달리 말해 본래 존재하고 있던 것은 능동태와 수동태의 구별이아니라 능동태와 중동태의 구별이었던 것이다. 이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평상시에 능동과 수동의 대립은 마치 필연적인 대립인 듯이 우리의 사고 깊숙한 곳에서 작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을 그대로 흉내내기라도 하듯 문법도 능동태와 수동태라는 두 가지 태를 갖는다. 그러나 본래 그것과는 다른 태가 존재했으며 다른 대립이 존재하고 있었다.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은 보편적인 것도 필연적인 것도 아니다. ---pp.41-42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을 대전제로 삼은 다음 거기에 수렴되지 않는 제3항으로 중동태를 거론하는 방식이 문제인 것은, 그렇게 하면 결국 이 태를 불필요하게 특별 취급하는 결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이 방식이 신비화의 양상을 노출하고 만 적은 한두 번이 아니다. 특히 철학에서 이 경향이 현저하다. 최근 100년 동안 철학에서는, 서양 근대 철학에 고유한 ‘주체-객체’ 구조가 의문시되어온 경위와 관련되어, 한편에선 이 구조를 능동-수동이라는 문법 구조에 포개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이 구조로 환원되지 않는 중동태를 찬양하는 식의 사례들이 산발적으로 발견된다. 가령 근대적인 ‘주체-객체’ 구조를 뛰어넘으려고 한 대표적인 철학자는 마르틴 하이데거로서, 찰스 스콧이나 데이비드 레빈 등의 논문은 그의 철학을 중동태의 퍼스펙티브에서 논하였다. 그러나 이들 텍스트의 성격상 그로부터 배울 게 별로 없다는 점이 대단히 유감스럽다. 그들이 말하는바(그리고 그들이 알고 있는바)는 능동태에도, 또 수동태에도 속하지 않는 중동태가 있었다는 점이고, 그리고 그게 전부이다. 이런 식으로 중동태를 신비화하면 할수록 능동태와 수동태의 대립은 일상 감각에 뿌리박은 보편적 대립으로 강고해져간다. --- p.91-92

의지 개념은 책임 개념과 강하게 결부되어 있다. 이 점은 ‘의지’가 그 일상적 용법에서도 무슨 일인가를 시작할 능력으로 연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행위를 자신의 의지로 개시했다고 상정될 때, 그 사람에게 그 행위의 책임을 물을 수 있다.

어떤 행위가 과거로부터의 귀결이라고 한다면 그 행위를 그 행위자의 의지에 의한 것이라 간주할 수 없다. 그 행위는 그 사람에 의해 개시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 행위자가 모종의 선택을 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선택은 여러 요소들의 상호작용의 결과로 출현한 것이어서, 그 행위자가 자기 의지에 의해 개시한 것이 아니게 된다. 일상생활에서 선택은 부단히 행해지고 있다. 사람은 의식하지 않더라도 늘 행위하고 있으며 모든 행위는 선택이다. 그런데 만약 선택이 그것이 과거로부터의 귀결이라고 한다면 의지의 실현이라고는 간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의지와 선택은 명확히 구별되지 않으면 안 된다.’

--- pp.154-155

출판사 리뷰

알코올 중독은 의지의 문제일까?
내가 걷는다면, 내 의지로 걷는 것인가, ‘걷기가 내게서 성사된 것’인가?

2020년, 일명 ‘조두순 사건’의 조두순이 출소한다는 소식에 분노 여론이 들끓고 있다. 11년 전 그의 이름으로 불리는 범죄 유형이 생겼고 출소를 1년여 앞둔 지금 그의 출소를 막아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화제다. 당시 심신미약으로 인한 감형 때문에 많은 국민이 법의 모순을 느꼈다. 조두순뿐만 아니라 술에 취한 자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심신미약을 이유로 낮은 형을 받은 일이 종종 있다. 형법상 범죄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행위자의 책임능력이 요구되기 때문에, 주체적으로 행위를 제어할 능력이 떨어졌다면 행위에 대한 모든 책임을 묻기 힘들다는 것이 요지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음주 자체가 스스로 선택한, 즉 능동적 행위라고 주장한다. 누군가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한 것이 아니라면 술을 마신 행위에서부터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의지는 어디서부터 우리 행동에 개입하는 것일까?

의지가 행위의 처음 단계에 있는지 없는지도 불분명하다. 현대의 뇌신경과학 연구에 따르면, 뇌 안에서 행위를 하기 위한 운동 프로그램이 만들어지고, 그 후 그 행위를 행하고자 하는 의지가 의식 안에 출현하기 시작한다고 한다. (중략) 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이 능동적이었기 때문에 책임이 지워진다기보다는 책임 있는 존재로 간주해도 좋다고 판단되었을 때 능동적이었다고 해석된다는 사실이다. 의지를 갖고 있었기 때문에 책임이 지워지는 것이 아니다. 책임을 지워도 좋다고 판단된 순간에 의지 개념이 돌연 출현한다. - 본문 중에서

그렇다면 정신질환자의 범죄는 어떨까?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정신질환은 자신의 행동을 제어할 정신 능력에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다. 설사 범죄를 저질렀다 해도 그는 처음부터 자기 행위에 책임질 수 없었기 때문에 죄를 묻기 어려울 것 같다. 행위 주체와 책임의 문제를 어떻게 이해해야 적절할까? 이 책에서 고쿠분 고이치로는 ‘중동태(中動態, middle voice)’라는 개념의 렌즈를 통해 위와 같은 문제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 보여주려 한다. 우리는 자신이 어떤 일을 한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내가 걸을 때, 걷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보행 행위를 수행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200여개의 뼈, 100여개의 관절, 400여개의 골격근의 공조를 우리의 의지만으로 가동시킬 수 없다. 따라서 이 사태는 ‘걷기가 내게서 성사되었다’고 표현해야 더 적절해 보인다. 이렇듯 아주 일상적인 상황에서도 ‘행하는 것(능동)’과 ‘당하는 것(수동)’을 구별하는 일은 쉽지 않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협박당하는 상황을 예로 들며 상황을 더 구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도와준다. 총으로 위협당해서 돈을 건넸다면 그것은 내가 능동적으로 행한 일일까? 아니면 수동적으로 당한 것일까? 능동과 수동의 구별에 갇혀 있다면 행위를 자발이냐 강제냐의 도식 아래에서 이해하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협박당하는 상황에서 발생하는 비자발적 동의의 위치를 적합하게 지정할 수 없다.

우리는 그동안 너무 ‘능동-수동 언어 체제’에 갇혀 살아온 게 아닐까? 이 체제에서, 능동적이라 간주된 주체들은 행위에 책임질 것을 추궁당한다. 반대로 수동적인 존재로 간주되면 무시당하기 일쑤이다. 어느 쪽이든 불편한 결과이다. 그런데 이 언어 체제는 보편적인 게 아니라고 한다(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만능 기계는 더더욱 아니다). 실제로 고대 이전에는 사람의 행위나 사건을 능동-수동 이분법에 가두지 않았다. 따라서 의사소통의 핵심적인 목표도 진정한 행위자, 즉 진짜 책임자를 찾아내는 게 아니었다. 이러한 고대의(혹은 더 이전의) 언어 체제에서 중요했던 게 바로 중동태였다. 만일 우리가 이 중동태를 불러내어 사회 현상이나 의료 현장에 적극적으로 비추어본다면, 사건과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현상하기 시작할까? 사회과학이나 의료 현장에는 어떤 혁신이 일어날까? - ‘옮긴이의 말’ 중에서

사라진 언어, ‘중동태’가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언어로 바라본 인간행동의 작동원리, 의지와 책임의 철학적 화두!

고쿠분 고이치로는 언어에서 원인을 찾는다. 언어는 생각의 틀이다. 여기서 말하는 언어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언어가 아니라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체적 언어로, 언어는 바로 그 구체성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생각을 규정한다. 고쿠분 고이치로는 일본어를 모어로 서구어를 익혔다. 따라서 많은 서구 철학자가 인도유럽어의 외연을 넘지 못한 반면, 변방의 일본인 철학자는 자신의 모어와는 전혀 다른 외국어와 만나야만 했다. 서구 철학자가 내면에서 사고할 수밖에 없었다면, 이방의 철학자는 필연적으로 바깥에서 사고해야만 했다. 그가 주목한 중동태는 능동태도 아니고 수동태도 아닌 그 중간이라고 설명되어온 그리스어 문법 용어이다. 언어학자 벤베니스트는, 행하느냐 당하느냐가 문제될 때의 능동과 수동의 대립을 넘어, 주어가 과정의 바깥에 있느냐 안에 있느냐가 문제가 되는 능동과 중동의 대립에 주목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고쿠분 고이치로는 능동과 중동의 대립 전에, 모든 언어의 원형으로서 중동이 있다는 가설에 이른다. 말하자면, 행위의 주체보다 사건으로서의 행위 그 자체가 먼저였다는 것. 사건에 주체를 귀속하고, 자유의지를 부여하고, 책임을 묻게 된 것은 아주 훗날의 일일 뿐이다.

하지만 약물 의존증에 빠진 분들의 상태를 말로 설명하는 건 심히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쓰는 말은 ‘한다’와 ‘당한다’를 확실히 구분하는 언어기 때문이죠.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해 얘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이분법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이 상태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적으로 ‘열심히 노력하든가’ 아니면 수동적으로 ‘되는대로 놔두든가’ 둘 중 하나인 것처럼, 혹은 능동 아니면 수동인 것처럼 이야기가 전개되는 거죠. 이야기의 끝은 결국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은 안 돼!’가 되고 맙니다. 이런 문제점들을 자꾸 느끼게 되면서,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중동태에 대한 관심이 내 안에서 점점 더 고조되었습니다. - 「에스노그래피 2017년 11월호」 고쿠분 고이치로의 인터뷰 중에서

만일 중동태가 일상 속에서 활성화된다면 우리는 과도한 책임성에서 벗어날 수 있다. 또 사회 구조나 개인의 의지로 환원되지 않는 측면들을 풍부하게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중동태는 새로운 삶을 위한 가능성의 조건이다. - ‘옮긴이의 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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