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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정증보판을 위한 머리말
머리말 서론 ‘좋아하는 것’이란 무엇인가? 1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원리론 토끼 사냥을 하러 가는 사람들이 정말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2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계보학 인간은 언제부터 지루해했을까? 3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경제사 왜 ‘한량’이 존경받을까? 4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소외론 사치란 무엇인가? 5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철학 도대체 지루함이란 무엇인가? 6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인간학 도마뱀의 세계를 들여다볼 수 있을까? 7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결단하는 것이 인간이라는 증거인가? 결론 맺음말 부록 상처와 운명 옮긴이의 말 |
Koichiro Kokubun,こくぶん こういちろう,國分 功一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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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함과 기분 전환에 대해 고찰하는 파스칼의 출발점에 있는 것은 다음과 같은 생각이다. 인간의 불행은 모두 인간이 방에 가만히 있지 못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방에 가만히 있으면 되는데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래서 굳이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 파스칼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다. 살아가기에 충분한 생활비를 가진 사람이 그것에 만족하면, 그러면 된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사람은 그것에 만족하며 방에 느긋하게 있을 수 없다. 그래서 일부러 사교 모임에 나가서 스트레스를 받고 도박에 빠져서 돈을 잃는다.
그것뿐이라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인간의 불행은 이것에 그치지 않는다. 충분한 재산을 가진 사람은 일부러 비싼 돈을 주고 군대의 직위를 사서 바다로 나가거나 요새 공략에 나서서 자신을 위험에 빠뜨린다(파스칼 시대에는 군대의 직위나 판사직 등을 사고팔았다). 물론 목숨을 잃는 일도 있다. 왜 굳이 그런 짓을 하느냐 하면,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 것은 곧 방에 혼자 있으면 할 일이 없어서 안절부절못한다는 것, 게다가 참을성이 없다는 것, 즉 지루해한다는 것이다. 오직 그것만이, 파스칼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불행의 원천이다. 그는 그런 인간의 운명을 ‘비참함’이라고 부른다. ‘방에 가만히 있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참으로 하찮은 이유로 불행을 초래하고 있다면, 분명 인간은 더할 나위 없이 ‘비참’하다. --- p.41~43 한가함이란 아무것도 할 게 없고 할 필요가 없는 시간을 가리킨다. 한가함은 한가함 속에 있는 사람의 존재 방식이나 느낌과는 무관하게 존재한다. 즉, 한가함은 객관적인 조건과 관련이 있다. 반면 지루함은 무언가를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다는 감정이나 기분을 가리킨다. 그것은 사람의 존재 방식이나 느낌과 관련되어 있다. 즉, 지루함은 주관적인 상태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정주혁명은 한가함이라는 객관적 조건을 인간에게 부여했다. 그로 인해 인간은 지루함이라는 주관적인 상태에 빠졌다. 이렇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두 단어를 정확하게 자리매김시키면 새로운 문제가 보인다. 양자의 관계 문제다. 한가함과 지루함의 관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둘은 필연적으로 연결되는 것일까? 한가함에 빠진 사람은 반드시 지루해하는 것일까? 아니면 한가하다고 해서 사람이 반드시 지루해하는 것은 아닌 것일까? 또한 지루함의 측면에서 한가함을 바라보면, 다음과 같은 물음이 나온다. 지루함은 반드시 한가함과 연결되어 있는 것일까? 즉, 지루해할 때, 그 사람은 반드시 한가함 속에 있는 것일까? 아니면 지루해한다고 해서 반드시 한가함 속에 있는 것은 아닌 것일까? --- p.119~121 하이데거는 먼저 지루함을 둘로 나누어 생각하자고 제안한다. 모두가 어렴풋이 알고 있는 지루함을 우선 둘로 나눠 생각해 보자는 것이다. 하나는 ① 무엇인가에 의해 지루해진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② 무엇인가를 하고 있으면서 지루해한다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①을 지루함의 첫 번째 형식, ②를 지루함의 두 번째 형식이라고 부른다. 양자는 비슷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①은 수동형이다(지루해진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분명히 지루한 것이 있고 그것이 사람을 지루함이라는 기분 속으로 끌어들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에 반해 ②에서는 뭔가 특정한 지루한 것에 의해서 지루해지는 것이 아니다. 무엇인가를 마주치고 있을 때, 잘 모르기는 하나 그곳에서 지루해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지루함이 주위를 뒤덮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속에서 사람이 지루해하는 것이다. --- p.255~256 하이데거에 따르면 인간은 세계 형성적이며, 세계 자체를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지루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루함은 인간이 자유롭다는 증거이다. 그래서 하이데거는 인간에게 둘레세계를 단호하게 인정하지 않았다. 둘레세계를 살아가는 것은 얼빠진 존재인 동물이라고 했다. 그러나 인간에게 둘레세계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무리한 주장이다. 인간도 각자의 둘레세계를 살고 있다. 다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간이 다른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둘레세계를 살아가고 있지만 그 둘레세계를 상당한 자유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다른 동물에 비해 상대적으로, 그러나 상당히 높은 둘레세계 간 이동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하이데거의 논의가 지닌 문제점은 무엇인가? 그것은 상대적으로 높을 뿐인 이 능력을 절대적인 것으로 간주해 버렸다는 점 같다. 그래서 인간이 둘레세계를 초월하는 존재로 그려지게 된 것이다. --- p.352~353 하이데거는 지루함의 두 번째 형식과 비교하면 첫 번째 형식이 자기 상실의 정도가 높다고 했다. 그리고 첫 번째 형식의 구조는 세 번째 형식의 구조와 통하는 바가 있다는 것이 밝혀졌다. 첫 번째 형식=세 번째 형식의 구조에서 사람은 무언가의 노예가 됨으로써 ‘아무튼 그냥 지루하다’라는 목소리에서 자유로워지려고 한다. 두 번째 형식에서는 그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다. 분명 자신을 내던져 버리는 태도는 있지만, 그러나 거기에는 자신을 마주하는 태도도 있다. 게다가 그것은 ‘안정과 균형’을 이루고 있다. 인간이라는 것은 대체로 두 번째 형식의 지루함을 살아가며, 그리고 가끔 세 번째 형식=첫 번째 형식으로 도망쳤다가 다시 돌아온다. 따라서 인간이라는 것은 괴롭다. 인간이라는 것은 지루함을 마주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류는 지루함을 마주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수단을 다양하게 개발해 왔다. 그것을 우리는 더 발전시킬 수 있다. 그것을 더 향유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에게 남겨진 가능성은 그것만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또 다른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고단한 인간적 삶에서 벗어날 가능성이다. 무슨 말인가? 인간은 한 둘레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둘레세계로 쉽게 이행할 수 있다는 것이다. --- p.405 종종 운이 좋은 예외도 있겠지만 인간은 인간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인간에게는 여전히 인간적인 삶에서 벗어날 가능성, 동물 되기의 가능성이 있다. 물론 인간은 나중에 다시 인간적인 삶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 인간은 습관을 원하고 습관이 없으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인간적 자유의 본질이 있다면 그것은 소박하지만 확실한 희망이다. 어느 날 인간이 열어 버린 지루함이라는 이름의 판도라 상자에는 분명 희망이 남아 있는 것이다. --- p.409 |
1만 년 된 인류의 문제이자 현대인의 딜레마
한가함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지루함을 어떻게 마주해야 하는가? ‘지루함’의 정체는 무엇인가? 저자 고쿠분 고이치로는 우리가 간과해 온 지루함이라는 느낌, 우리를 밑바탕에서부터 두루 조율하는 ‘기분’에 대한 철학적 명제를 파고든다. 그리하여 “1만 년 된 인류의 문제”인 지루함을 어떻게 대하며 살아야 할 것인지 탐구한다. 이를 위해 저자는 파스칼의 지루함에 대한 언급, 『형이상학의 여러 문제들』 속에서 언급되는 하이데거의 지루함론을 기반으로 고고학, 역사학, 인류학, 경제학, 정치학, 사회학, 문학, 생물학, 의학까지 각종 학문 분야를 넘나들며 논의를 이끈다. 저자는 “한가함”이란 아무것도 할 게 없는 객관적인 조건과 관련된 상태이며, “지루함”이란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지는 감정이나 기분을 가리키는 주관적인 상태임을 전제하고 논의를 전개해 나간다. 현대의 풍요가 한가함을 낳고 한가함이 지루함을 낳는 연쇄 속에서, 우리가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과 기예를 잃어버렸음을 저자는 지적한다. 과거 귀족들은 베블런의 말대로 “품위 넘치는 한가함”, 즉 여가를 즐기는 법을 알고 있었지만, 현대인은 그 지혜를 잃었다. 게다가 현대 소비사회는 이 지루함을 교묘히 이용한다. 사람들은 지루함에서 벗어나려고 소비 활동에 나서고, 기업은 그를 부추긴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이 소비가 진정한 만족을 가져오기는커녕 지루함을 심화시킨다. 이에 저자는 피할 수 없는 “지루함”이라는 기분 속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한다. “오직 인간만이 지루해하며, 그렇기에 자유롭다”라는 하이데거의 생각을 빌려 우리 스스로 인간임을 즐기고,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일인 “동물 되기”의 가능성을 포기하지 않으며, 삶을 향유하는 능력을 가꾸는 법에 대해 상세히 설명한다. “사람은 즐거움을 알 때 생각에 대해 열린다. 더구나 즐기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이 훈련은 사물을 받아들이는 능력을 확장한다. 이것은 생각을 강요하는 것을 받아들이는 훈련이다. 사람들은 즐기면서, 또 즐기는 것을 배우면서 사물을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먹는 것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은 점차 음식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맛있는 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지고, 어떻게 하면 맛있게 만들 수 있을까 생각하게 된다. 영화를 좋아하고 항상 영화를 보는 사람은 점차 영화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도대체 누가 만든 영화인지, 왜 이렇게 멋진지 생각하게 된다. 다른 예도 얼마든지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동물 되기라는 세 번째 결론은 ‘인간임을’ 즐기는 것이라는 두 번째 결론을 그 전제로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본문, 430~431쪽에서) 400년의 사유로 읽는 권태의 인류학·경제학·심리학·생물학적 탐구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 1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원리론」에서는 파스칼의 “기분 전환”에 관한 논의를 출발점으로 삼아, 한가함과 지루함에 대한 원리적 고찰을 시도한다. 저자는 “토끼 사냥”에 대한 파스칼의 비유를 예로 들며, 이 행위의 목적은 욕망의 대상(토끼)이 아니라 욕망의 원인(지루함을 해소하고 싶은 마음)임을 지적한다. 이어서 우리가 욕망의 대상을 욕망의 원인으로 종종 착각하며, 기분 전환의 대상을 손에 넣으면 행복해질 수 있다고 스스로를 속인다는 점을 짚으며 논의를 시작한다. 2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계보학」에서는 지루함의 기원이 논의되고 인류가 유동생활을 멈춘 정주혁명(니시다 마사키의 개념)으로 인해 그때까지 탐색에 사용하던 능력을 주체할 수 없어 지루함이 생겼다는 가설을 제시하며 논지를 전개한다. 3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경제사」와 4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소외론」에서는 한가함의 분석, 소비와 낭비의 구별 등을 바탕으로 주로 경제사적 관점(베블런, 아도르노, 모리스, 보드리야르)에서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비판적 고찰을 더한다. 5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철학」, 6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인간학」, 7장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은 주로 지루함에 대한 철학적·윤리적 고찰을 담았다. ‘하이데거의 지루함의 세 형식’을 지루함의 타당한 분석으로서 제시하고, 생물학자 윅스퀼의 ‘둘레세계’라는 개념을 활용해 그의 인간론을 비판적으로 고찰하며, 지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하이데거식 해법에 문제를 제기한다. 하이데거가 지루함을 타파해야 할 것으로 보는 것에 대해 저자는 지루함과 기분 전환이 뒤얽힌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인간이라고 주장한다. 사상가들과 함께 읽는 지루함의 계보학 파스칼, 루소, 키르케고르, 마르크스부터 아도르노, 아렌트, 들뢰즈, 스벤젠까지 저자는 본인만의 “지루함” 담론을 전개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 구체적인 방향을 제안하기 위해 다양한 철학자, 생물학자, 인류학자, 경제학자 들의 연구물을 검토한다. 다양한 사상가들의 생각들을 두루 살피며, 저자만의 독창적인 논지를 어떻게 전개시키는가를 살피는 것도 이 책을 즐기는 한 방법이다. 인간은 지루함을 피하기 위해 자신을 행동하게 하는 계기를 원하는데, 이는 심지어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어도 된다는 관점에서는 니체를 언급한다. 인간은 “괴로움으로부터 자신의 행위의 이유를 끌어낸다. 지루해하는 인간은 그런 욕망을 품는다”. 또 저자는 러셀의 논의를 빌려 지루함이란 “사건이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꺾인 것”으로, 지루함이 쾌락의 반대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한다. 또 낭만주의로 인해 삶에 의미를 부여해 주는 집단 서사가 붕괴하면서 인간이 지루함에 시달리게 되었다는 스벤젠의 주장도 검토한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현대 소비사회에 대한 저자의 독창적 분석이다. 보드리야르의 이론을 빌려 현대의 소비가 “관념의 소비”로 변질되어 끝없는 불만족을 낳고 있다고 지적하는 한편, 낭비와 사치의 긍정적 가치를 재발견할 것을 제안한다. “낭비는 어딘가에서 멈추는 것이었다. 물건을 취하는 데는 한계가 있으니까. 그러나 소비는 그렇지 않다. 소비는 멈추지 않는다”라는 저자의 통찰은, 끝없는 소비의 굴레에 갇힌 현대인의 실존적 조건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인간의 불행은 단 한 가지, 방 안에서 가만히 있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다.” ─ 블레즈 파스칼(Blaise Pascal) “자연 상태에서는 인간을 어딘가에 묶어 두는 유대감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장 자크 루소(Jean-Jacques Rousseau) “결단의 순간이란 하나의 광기이다.” ─ 쇠렌 키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낚시는 해도 어부가 되지 않아도 되는 삶. 그것이 여가를 살아가는 기예이다.” ─ 카를 마르크스(Karl Marx) “현대에는 소비자의 감성이 제작 프로덕션에 의해 선취되어 있다.” ─ 테오도어 아도르노(Theodor W. Adorno) “노동(labor)의 대상은 소비되지만, 작업(work)의 대상은 존속한다.” ─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 “어떤 것이 쾌락이기에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반복하기 때문에 쾌락이 된다.” ─ 질 들뢰즈(Gilles Deleuze) “지루함이 사람들의 고민거리가 된 것은 낭만주의 탓이다.” ─ 라르스 스벤젠(Lars Svendsen) 쇼트콘텐츠, 메신저 감옥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대인을 위한 철학적 처방 동물 되기라는 새 가능성 유한계급에서 부르주아로, 다시 현대의 대중사회로 이어지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지루함의 본질을 탐구하는 이 책은, 포디즘과 포스트포디즘이 만들어 낸 소비사회의 메커니즘을 해부하며 현대사회가 마주한 지루함의 정체에 대한 새로운 해법을 모색한다. “한가함”과 “지루함”이라는 누구나 겪지만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던 중요한 문제를 논하는 이 책은, 소셜미디어상의 쇼트콘텐츠, 자극적인 영상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지루함을 벗어나고자 하는 디지털 시대의 현대인, 메신저 감옥에서 진정한 여유를 느끼지 못하는 포노사피엔스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다. 저자는 현대사회의 지루함 회피 성향이야말로 우리가 진정으로 충실해질 기회를 막고 있다고 지적한다. 지루함과 마주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이 책을 읽으며, 저자가 우리에게 행하는 “불법침입”과 “충격”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동물 되기”의 새 가능성을 통해 지루함에서 벗어나는 것은 물론, 목전의 한가함과 지루함을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될 것이다. “인간다운 삶이 무너질 때가 있다. 어떤 충격에 의해 자신의 둘레세계가 파괴당한 인간이 거기서부터 사고하기 시작할 때다. …… 그것이 동물 되기라는 가능성이다.”(406쪽) “지루함이라는 제로 상태는, 인간이 자신의 가능성을 알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305쪽) 옮긴이의 말 고쿠분은 이 책의 결론에서 이 책을 ‘통독’해 줄 것을 주문한다. 실제로 여기서의 ‘요약’에 기반해 결론을 읽다 보면 전체를 통독해야 한다는 점을 느낄 것이다. 책 제목 ‘한가함과 지루함의 윤리학’을 보면서 읽기 시작하면, 처음에는 한가함보다 지루함에 대한 논의가 핵심인 것처럼 파악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한가함론과 지루함론이라는 두 가지 축으로 직조되어 있고 한가함론이 지루함론으로 흡수된다는 인상을 받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미리 언질을 하자면, 하이데거의 지루함론을 탈구축하면서 얻어 낸 세 가지 결론의 실천적 내용을 뒷받침하는 것은 오히려 한가함론이다. 아무튼 이 책은 자신이 처한 상황으로서 ‘지루함’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된다. “살아 있다는 감각의 결여, 살아 있다는 의미의 부재, 무엇을 해도 되지만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는 결핍감, 그 속에서 살아갈 때 인간은 ‘몰입하는’ 것, ‘몰두하는 것’을 갈망한다.”(본문 35쪽) 고쿠분은 러셀과 파스칼을 인용하면서 지루함이 인간에게 공통의 괴로움(고통)이자 ‘병’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인간은 이런 괴로움ㆍ고통에서 벗어나는 것, 즉 주의를 딴 데로 분산시키는 것, 즉 기분 전환을 해 왔다고 지적한다. 토끼를 원하기 때문에 토끼 사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를 분산시키고 기분 전환을 가능케 하는 소동을 피우고 싶어서 가는 것이다. 다소 부담이 있고 열중할 수 있다면 더욱 좋다. 그러니 토끼 사냥을 가려는 사람에게 토끼를 줘도 달가워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 문제는 현대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