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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ny Laferrie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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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조금 기다리지 뭐.」
그러니까, 그녀는 머물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이 의자는 별로 튼튼하지 않아서요, 부인……. 여기 앉으시는 게 좋겠네요. 더 편하실 거예요.」 그녀는 엉덩이 끝으로 살짝 걸터앉았다. 나의 얄팍한 술수에 넘어가지 않을 것이며, 내게 많은 시간을 할애하지 않겠다는 것을 알리는 그녀 나름대로의 방식이었다. 나는 그런 그녀에게 장단을 맞출 생각이 없었다. 시간을 지배하는사람이 모든 것의 우위를 점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유 있게 그녀의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내게는 시간이 얼마든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 p.13 「(……) 하지만 분명히 말하지만, 마담, 이 나라에서 포르토프랭스를 제외한 다른 곳은 당신이 알고 있는 아이티와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겁니다…. 우린 아메리카에 사는 프랑스인도, 유배를 온 아프리카인도 아닌 아이티인일 뿐입니다. 내 말 무슨 뜻인지 아시겠소? …아니, 잘 이해가 안 되는 것 같군요. 어쨌거나, 이제 곧 보게 될….」--- p.147 나는 지금까지 할렘에 발을 들여놓은 적이 한 번도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도 흑인이 열 명 이상 있는 곳에는 가지 않을 생각이다. 그들이 내게 겁을 주거나 무슨 해를 끼쳐서가 아니라, 단지 흑인은 내 취향이 아니라서 그런 것뿐이다. 이런 내 말에 당신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나를 비난할지도 모르겠다. 난 넵튠한테 푹 빠져 있으니까. 넵튠 역시 그들처럼 피부가 새까만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아이티인이다. 내가 흑인이라고 할 때는 미국에 사는 흑인을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백인들의 뒤통수를 칠 생각밖엔 하지 않는다. 우리 백인은 그들을 도와준 것밖엔 없는데. 내 말이 당신에게는 충격적으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안 그런가? 하지만 그게 내 생각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이 다니는 학교를 지어 준 게 누군가 말이다. 어쨌거나 그들이 만든 것은 아니지 않은가. 사실, 말은 이렇게 하면서도 나 역시 백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특히 백인 남자들을. 그들은 나를 한 번이라도 제대로 쳐다봐 준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는 몸무게가 54킬로그램을 넘어서는 안 된다. --- pp.180-181 그때 노부인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당시 여자의 가족을 살려 주고 그녀를 넘겨주면서 데살린 장군이 우리 선조에게 뭐라고 한 줄 알아?」 「아뇨.」 그녀는 또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장군은 이렇게 말했어. 「그대는 주인의 육체를 사랑하는 모양이군.」」 「주인의 육체라고요?」 「그는 그녀를 그렇게 지칭했어…. 재밌지 않아?」 「그러네요.」 「육체적 욕구는 언제나 역사의 진정한 동인이었지.」 「지금 사랑을 얘기하시는 거겠죠….」 「아니, 섹스를 말하는 거야….」 노부인은 다시 설명했다. 「주인의 육체를 향한 미친 듯한 욕구 말이야….」 --- pp.296-2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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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동생이 다니는 학교의 여교장을 유혹하는 팡팡, 하인으로 일하는 부모님을 괴롭히는 버릇없는 부잣집 아가씨의 버릇을 고쳐 주려 그녀에게 접근하는 찰리,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중년 여인들에게 「사랑」을 제공하는 레그바……. 이들은 모두 17세의 아이티 소년들이다. 미완이기에 유혹적이고, 유혹적인 만큼 치명적인 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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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의 나이는 19세인가?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17세이다. 그리고 소설은 이 십대 소년 소녀들의 연애,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비윤리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여러 관계들을 둘러싼 사건들이 중심을 이루고 있다. 여동생이 다니는 학교의 여교장을 유혹하는 팡팡, 하인으로 일하는 부모님을 괴롭히는 버릇없는 부잣집 아가씨의 버릇을 고쳐 주려 그녀에게 접근하는 찰리, 미국과 캐나다에서 온 중년 여인들에게 「사랑」을 제공하는 레그바, 좋아하는 남자 애를 잡아 두기 위해서는 다른 여자를 물어다 주는 것도 주저 않는 타냐, 모두 아직 성인이 되지 않은 17세의 아이들이 하기에는 지나치다 싶은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기준일 뿐, 빈곤이 지배하는 나라 아이티에서는 성인의 기준이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작가는 사랑과 욕망에 관해 묻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답한 바 있다. 「내가 아이티에서 본 바에 따르면, ‘사랑’이라는 것은 6살에서 13살 사이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다. 그 나이를 넘어가면 모든 것은 좀 더 경제적인 이유들에 의해 결정된다. 그러나 경제적으로 훨씬 풍요로운 북아메리카나 유럽에서는 이 나이가 20살까지 올라갈 수도 있다.」 비교적 풍족한 삶을 누리는 우리나라에서 17세는 아직 부모와 사회의 관심 아래 보호를 받아야 할 「청소년」이지만, 오랜 독재와 빈곤으로 몸부림치는 아이티의 17세는 자기 앞가림을 해야 하는 나이, 심지어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나이일 수 있다. 미성년자를 보호해 줄 국가나 교육 기관은 부재하고, 아이들은 손쉽게 유혹에 노출된다. 그림 같은 카리브 해의 풍광, 그리고 그 언덕에 자리 잡은 빈민촌 아이티, 하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2010년 1월 강타한 지진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거의 전 국토를 초토화시킨 지진으로 각각 25만에 달하는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고, 우리나라를 비롯해 전 세계에서 구원의 손길을 뻗친 불운한 나라. GDP가 700달러에도 못 미치며 노동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공식 직업이 없는 실업 상태인, 세계에서도 최빈국으로 분류되는 나라. 오랜 세월 스페인과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고, 1915~1934년 사이에도 미국에 점령됐던 아픈 역사가 있는 아이티는 독립 후에도 1957년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정권을 잡은 이래 아들에게 권좌를 물려준 세습 독재가 30년간 이어졌다. 작가 자신도 독재 정권의 압제를 피해 스물세 살 되던 1976년 캐나다 몬트리올로 이주했다. 그러나 이렇게 가난과 부패와 독재에 멍든 나라에도 한 가지 선물이 있으니, 바로 카리브 해의 숨 막히는 풍광이다. 이곳의 경치에 이끌려 가까운 미국이나 캐나다 같은 부자 나라에서 많은 관광객이 찾아오는데, 이곳에서 그들이 발견하는 것은 단지 그림 같은 풍경만이 아니다. 작품 속 한 장(章)인 「남쪽으로」에는 부유한 나라에서 온 세 중년 여자가 등장한다. 자신의 나라에서는 남자의 눈길을 받지 못하는, 억눌린 욕망으로 괴로워하는 여자들. 그들은 낙원 같은 해변에서 「마치 신처럼 아름다운」 17세의 소년을 만나 그의 애정과 손길을 갈구하게 된다. 하루하루 숨 막히는 치열한 북쪽의 현실에서 벗어나 모든 욕망과 꿈이 실현되는 곳, 그것은 바로 이 「남쪽」 나라인 것이다. 아직 완전히 성인이 되지 못한 미완의 소년은 그들에게 있어 마치 낙원에 있는 선악과와 같다. 치명적이기에 더욱 유혹적인 존재, 낙원을 진정한 낙원으로 만드는 존재. 그러나 절대 소유할 수 없는 존재, 손에 쥐려 할수록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리는 존재. 어쩌면 좇을수록 더욱더 갈구하게 되는 그런 존재가 있기에 낙원은 낙원일 수 있는 것이리라. 그가 사라지자 여인들이 곧장 다른 낙원을 찾아 가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이다.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가장 마법적인 세계 앞서 말했듯 소설 속 아이티는 여러 가지 대조적인 얼굴을 지닌 나라다. 그 자연 풍경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답지만 사람들의 삶은 극도로 곤궁하다. 국민의 80퍼센트는 가톨릭 신자이지만 실제로 그들의 생활을 지배하는 것은 주술적 민간 신앙인 부두교이다. 영화 속에서 흔히 보는 「좀비」가 바로 부두교에서 나온 존재인데, 살아 있는 시체를 일컫는 말이 있을 정도로 주술적인 이 종교는 정령과 사령을 숭배하여 산 제물을 바치기도 하고, 북 치고 춤추며 황홀경에 빠지는 의식이 큰 역할을 차지한다. 작품 속에서 나타나는 이러한 부두교의 모습은 아이티에 판타지적 모습을 부여한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부두교의 신과 결혼식을 올린 프랑스인 여기자가 아이티를 떠나지 못하는 이야기는 이 매혹적 나라가 사람들에게 어떤 주술을 거는지 상징적으로 보여 준다. 빈곤으로 인해 그 어느 곳보다 어린 나이에 돈의 중요성을 깨닫는 현실적 공간이지만 동시에 그 어느 곳보다 강력한 마법의 영향력 아래 있는 곳. 그곳에 사는 사람들에겐 현실이지만 그곳을 찾아온 사람에게는 판타지를 실현시켜 주는 공간, 아이티는 그런 이중성을 지닌 곳이다. 베니스 영화제 수상 영화 「남쪽으로」 『남쪽으로』는 다니 라페리에르가 1997년 쓴 『주인의 육체』라는 단편집에 실린 몇몇 이야기를 차용해 장편으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기존의 단편을 장편 속에 녹여 쓴 만큼, 이 작품은 치밀한 구성의 장편과는 거리가 있다. 별개의 이야기처럼 보일 수도 있는 몇 가지 이야기들이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는 독특한 구조는 보통 장편에서 보기 힘든 이 작품만의 매력이다. 2008년 「클래스」로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거장 로랑 캉테 감독은 작품의 제목과 같은 한 장인 「남쪽으로」를 2005년 영화로 제작했다(국내 제목 「남쪽을 향하여」). 200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신인 배우상을 수상하기도 한 이 영화는 여성의 욕망과 에로티시즘에 집중하는 한편, 사회적 문제에 대한 비판적 시선도 놓지 않는다. 어린 아이티 소년을 돈으로 사다시피 하면서도 그것을 사랑이라고 믿는 백인 여성들은 과거 총으로 침탈했던 서구 사회가 이제는 달러로 아이티를 잠식하는 모습을 단편적으로 드러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