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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어 일람 / 용어 해설 / 여는 글
제1부 문화냉전의 서막 제1장 전시정보국의 극동 지역 공보선전 크릴위원회의 해외영화부 / 국제영화부의 해외 공보선전 극동 지역 영화 지침과 중앙영화배급사의 설립 제2장 주한미공보국의 영화공작 적산극장 불하 문제와 「극장 및 흥행 취체령」 / 「활동사진의 취체」와 「영화의 허가」 / ‘장택상 고시’가 던진 파문 / 중앙영화배급사 조선 지부의 설립 / 중앙영화배급사 영화에 대한 반발 / 미군정의 중앙영화배급사 지원 / 입장세령 개정과 중앙영화배급사의 로비 / 미군정 공보부 영화과의 변천 / 주한미공보국 영화과의 공보 활동 / 5·10 총선거 선전영화 제3장 주한미공보원의 설립과 문화냉전의 서 스미스-문트 법의 제정 / 한국전쟁 이전 주한미공보원의 영화 프로그램 / 대한민국 정부의 공보영화 제2부 문화냉전과 주한미공보원 영화 제4장 한국전쟁기 주한미공보원의 영화공작 주한미공보원의 심리전 행동 / 미 육군부의 뉴스릴 / 일본 언론과 한국전쟁 뉴스릴 / 리지웨이와 진해영화제작소 / 전쟁 포로 영화공작 / 김기영의 주한미공보원 영화 [사랑의 병실] / 전쟁고아 구호사업과 주한미공보원 영화 / 운크라 영화 [고집] 제5장 미국해외공보처의 탄생과 상남 시대의 개막 굿바이 트루먼, 웰컴 아이젠하워 / 상남영화제작소: 주무기로서 주한미공보원 영화 / 미 국무부 국제공보처 프로그램의 긴축과 주한미공보원의 구조조정 제6장 냉전의 과학과 주한미공보원의 과학영화 미국의 핵전략과 ‘원자력의 평화 이용’ 캠페인 / 주한미공보원의 원자력 영화 / 아폴로 외교와 삼선 개헌 제7장 주한미공보원이 제작한 반공영화 외부의 위협과 내부의 적 / [주검의 상자]의 용공 논란 / 험프리 렌지 컬렉션과 4월혁명 / 케네디 정권기 주한미공보원의 유화정책 영화 / [탱크]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 [한라산]이 그린 4·3 제8장 우정과 예술이라는 신무기 아이젠하워 정권의 공공외교 / 음악, 공공외교의 새로운 언어 / 유리공예에 새겨진 민간협력 / 평화부대와 케네디의 개발원조 / 풀브라이트 프로그램 홍보영화 / 그들은 왜 주한미공보원을 습격했는가? 제3부 냉전근대 한국을 영사하기 제9장 냉전 개발주의와 주한미공보원 영화 ‘자조-원조’라는 도식과 재건의 드라마 / 반공주의로서 개발주의 제10장 냉전과 박애 냉전기 한센병 관리체제와 미국의 구라활동 / 주한미공보원의 구라영화 [황토길] / 냉전 박애주의의 한계 제11장 냉전 오리엔탈리즘 자유민주주의의 기표로서 댄스 / 부채춤은 어떻게 민속무용이 되었는가? / 주한미공보원 영화의 ‘아시아 문화’ 표상 제12장 주한미공보원이 남긴 것들 [나에게 물어봐!]는 왜 사장되었을까? / 주한미공보원 영화를 만든 한국인들 / [내 친구 헤이먼]의 귀화 / 미국학의 탄생: [미국문화센터와 지역사회] 맺는 글 / 감사의 말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Ryeosil Kim,金麗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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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에서 군대와 무기만큼이나 중요한 수단은 정보였다. 미소 양국은 이질적 지역들을 하나의 진영으로 묶어두고 장벽 너머 적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선전과 첩보를 핵심 전략으로 삼았다. 특히 미국 정부는 국가 이미지를 개선하고 우호적 국제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막대한 예산을 쏟아부었고, 한국전쟁 이후 전 세계에 ‘미국의 정의’를 전파하기 위해 미국해외공보처(USIA)라는 방대한 조직을 구축했다.”
---p.13, '여는 글' 중에서 “역사적으로 이차세계대전은 영화의 이용가치가 극대화된 전쟁이었다. 기술적으로 무성에서 토키로, 흑백에서 컬러로 나날이 진보했던 영화라는 뉴미디어는 라디오나 신문 같은 올드미디어보다 광범위하고 강력한 전파력을 증명했다. 항공정찰과 공중폭격에도 영화 기술이 도입됨으로써 영화는 사상전뿐만 아니라 말 그대로 근대 전쟁에 필요불가결한 무기가 되었다.” --- p.25, '제1장 전시정보국의 극동 지역 공보선전' 중에서 “1945년 9월 9일 서울에 주둔한 미군이 가장 먼저 처리한 일 중 하나는 미디어 장악이었다. 15일에 서울중앙방송국(전 경성중앙방송국, JODK)을 비롯해 38도선 이남의 지방 방송국 10곳(부산, 이리, 대구, 광주, 목포, 마산, 대전, 춘천, 청주 방송국 및 강릉 이동방송중계소)을 접수한 미군은 조선총독부 기관지였던 『경성일보』를 9월 25일에, 『매일신보』를 10월 2일에 접수했다. 이어서 미군은 12월 6일에 발령한 미군정 법령 제33호 「조선 내에 있는 일본인 재산권 취득에 관한 건」에 근거해 38도선 이남의 극장을 접수했다.” --- pp.36~37, '제1장 전시정보국의 극동 지역 공보선전' 중에서 “영화인들이 해방에 품은 기대는 금방 사그라졌다. 제작 상황은 30년 전으로 후퇴한 것 같았다. 영화 기근을 버텨내기 위해 때 아닌 ‘키노드라마 운동’이 펼쳐졌고, [검사와 여선생](1948)처럼 무성영화가 제작되기도 했다. [청춘의 십자로](1934), [심청](1937), [신개지](1942) 등 흘러간 시절의 필름이 창고 밖에서 나와 국산 영화에 대한 관객의 갈증을 더욱 부추기는 사이, 무려 일제 말기에 제작된 국책 선전영화까지 상영되어 물의를 빚었다.” --- p.55, '제2장 주한미공보국의 영화공작' 중에서 “해외 공보선전을 뒷받침했던 스미스-문트 법에는 미국이 해외에 제공하는 정보를 미국 국내에 유포해서는 안 된다는 조항이 있었다. 미국 정부는 국내와 해외라는 이중 잣대로 공보선전을 전개하고 있었고 해외에 유포한 이른바 ‘미국의 진실’이 국내 정치에 미칠 영향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이 조항이 만들어진 것이다. 그 때문에 예외적 경우를 제외하고 미국인들은 미국해외공보처(USIA) 영화나 주한미공보원 영화를 원래의 형태대로는 볼 수 없었다.” --- p.92, '제3장 주한미공보원의 설립과 문화냉전의 서' 중에서 “한국에서 주한미공보원이 문화냉전의 중요한 수단으로 활용했던 대표적 미디어는 미국문화연구소(USIS 지부)였다. 9대 도시에 설치된 미국문화연구소는 그 도시뿐만 아니라 도(道) 전체의 공보 책임을 맡았다. 미국문화연구소는 1만에서 2만에 이르는 주소록을 작성해 출판물을 우송하는 한편, 시민 일반에 출판물을 배포해 미국과 미국의 이념에 대해 알리고자 했다. 미국문화연구소는 반공 선전보다는 한국인이 미국과 민주주의에 우호적 감정을 갖게 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았다. 극장 외에 이렇다 할 근대적 문화시설이 없었던 한국에서 미국문화연구소에 대한 한국인의 호응은 뜨거웠다. 각 지방의 미국문화연구소는 도서관을 운영하면서 구하기 힘든 장서를 갖추고 대출까지 했으며 각종 전시회와 음악회, 전람회, 영화 상영회를 주최했고 영어 강좌와 문화 강좌를 운영했다. 미국문화연구소는 이처럼 정보 창구인 동시에 문화기관으로 자리 잡음으로써 미국에 대한 호감과 지지를 자연스럽게 끌어낼 수 있었다” --- pp.94~95, '제3장 주한미공보원의 설립과 문화냉전의 서' 중에서 “한국전쟁 발발 직후부터 석 달 동안 남한에는 19개국으로부터 300여 명의 외신기자가 파견되었다.30 조기 승전할 것 같았던 전쟁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장기화되면서 취재열은 더욱 고조되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미군 점령지였으나 미국의 동아시아 방위선 바로 안과 밖에서 국가의 운명이 달라진 것을 목격했고, 이웃나라의 전쟁에 병참기지 역할을 하게 되어 전쟁 특수를 맞이한 일본의 취재열은 특기할 만하다.” --- pp.129~130, '제4장 한국전쟁기 주한미공보원의 영화공작 “미군은 심리전만이 아니라 포로 교환 협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서도 전쟁 포로 영화를 제작했다. 미군이 포로 교육에서 중점을 둔 것은 ‘긍정적 접근’이었고 전쟁 포로 영화 역시 신뢰감을 높이기 위해 포로가 스스로 반공 진영의 우월성을 증언하는 인터뷰가 중요시되었다. 그러나 포로 교환 협상이 진행될수록 전향의 시각적 증거가 될 수 있는 영화 촬영에 대한 포로들의 반감은 높아갔다. 1953년 4월 15일, 중공군 포로 700명이 영화 촬영을 거부하며 농성을 벌인 예에서처럼 전쟁 포로 영화는 오히려 심리전 목표에 역행하는 사태를 유발하기도 했다.” --- p.150, '제4장 한국전쟁기 주한미공보원의 영화공작' 중에서 “이화여전 영문학과 출신의 모윤숙은 해방 전에는 친일 작가였고 해방 후에는 우익 문단에서 활동했다. 친미·반공주의를 명확히 드러내면서 애국심과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감상적 시를 많이 남겼다. 그녀는 미군정기에 모교 출신 중 영어가 가능한 여성들을 모아 낙랑클럽을 만들고 점령군의 유력 인사들을 초청해 호화로운 댄스파티를 열었는데 사교의 장은 곧 로비의 장으로 탈바꿈했다. 이승만으로부터 은밀히 지원을 받은 모윤숙은 낙랑클럽의 인맥을 기반으로 정보 수집과 로비 활동을 병행했다.” --- pp.178~179, '제5장 미국해외공보처의 탄생과 상남 시대의 개막' 중에서 “원자력의 평화 이용 캠페인의 성패는 오로지 핵에 대한 공포를 발전(發電이자 發展)에 대한 희망으로 전환하는 데 달려 있었다. 즉, 전 세계인이 핵전쟁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고 핵을 욕망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이 캠페인의 진정한 목적이었던 것이다. 원자력을 둘러싼 미국의 ‘욕망 교육(education of desire)’은 특히 스스로 원자력 발전 기술을 갖출 가능성이 낮은 제3세계 개도국에서 효과를 발휘했다.” --- p.202, '제6장 냉전의 과학과 주한미공보원의 과학영화' 중에서 “아폴로 붐에는 한국 정부의 전폭적 협력이 있었다. 아폴로 11호의 발사 준비가 한창이던 시기 박 정권은 삼선 개헌을 추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삼선 개헌 저지를 위한 호헌 투쟁이 야당인 신민당을 중심으로 시작되었고 6월 12일부터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 연세대학교, 경기대학교, 경북대학교 등 전국 20여 개 대학에서 연일 개헌 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장기 집권을 목표로 한 개헌에 반대 여론이 들끓는 가운데 신민당은 7월 17일 삼선개헌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를 열고 19일 효창운동장에서 시국 강연회를 열었다. 그날 연사 중 한 명이었던 함석헌은 정권과 여당뿐만 아니라 권력에 휘둘려 학생 데모는 제대로 보도도 못하면서 아폴로 발사만 대서특필한 신문도 함께 규탄했다. 그날 문공부 장관은 “우주의 새로운 역사가 창조되는 그날을 경축하고 달 세계 개척에의 전 인류 참여에 호응하고자” 한국 시간으로 달 착륙이 시도되는 21일을 임시 공휴일로 지정했다고 발표했다” --- p.223, '제6장 냉전의 과학과 주한미공보원의 과학영화'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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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냉전을 통해 냉전을 새롭게 이해한다
2017년 사드 배치 때부터 새로운 냉전적 대결 양상이 본격적 조짐을 보이는 가운데 2018년 7월부터 개시된 미중 간의 무역전쟁은 2019년 현재 쉽게 해소될 기미가 보이는 않는 신냉전의 시기가 전개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하고 있다. 더욱이 신냉전의 무대가 동북아시아를 중심으로 재가동되고 있는 요즘,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 냉전의 주요 무대였던 분단국가의 당사자로서는 냉전이 과거의 유물이 아니고 새롭게 변신한 모습으로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재확인하면서 냉전에 대한 새로운 이해의 필요성이 요청되고 있다. 『문화냉전: 미국의 공보선전과 주한미공보원 영화』는 한국전쟁 이후 분단국가 한국에서 문화외교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미국의 냉전적 공보정책이 한국의 사회문화 영역에서 작동하는 방식과 그 양상을 밝혀내고 있다. 냉전이라는 장기간 지속된 비평화 상태는 도처에 비군사적 전장을 형성했고 문화예술 영역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이 책에서 세밀하게 추적하고 있는바, 라디오 수신기 보급이 미진했던 1940~50년대, TV가 상용화되기 전인 1960년대에 걸쳐 주한미공보원 영화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영향력 있는 미디어였다는 사실은 미국의 문화냉전 정책이 얼마나 주효했는지를 역으로 잘 보여주는 단면이라 할 수 있다. 미국 문화냉전의 전위대 주한미공보원(USIS) 『문화냉전』은 분단국가 한국에서 냉전을 유지하고, 미국의 냉전 정책에 대한 지지를 끌어내고, 미국의 이미지를 풍요와 자유의 나라로 각인시키기 위해 주한미공보원이 어떤 활동을 했는지를 추적하고 있다. 주한미공보원은 국제교류 및 공공외교를 지원하는 업무 외에, 현지 여론을 조사하거나 정보를 수집해 미국해외공보처(USIA)에 보고하고 미군이나 CIA의 기밀 활동에 협조하기도 했지만, 표면적으로는 도서관 및 전시회, 음악회 프로그램 운영, 영어 교육, 풀브라이트 프로그램과 같은 교육 교환 사업, 미국과 관련된 문예·학술 활동을 진작하는 등 진일보한 문화냉전 전략의 최전선을 주도했다. 주한미공보원의 운영에서 특기할 만한 점은 선진적 출판, 방송, 영화 제작 설비, 공연과 전시 공간을 구비하고 현지에서 직원을 채용해 선전의 대상이 스스로 선전의 내용을 채우도록 했다는 점이다. 이렇다 할 근대적 문화시설이 없었던 한국에서 이와 같은 미국의 공보정책은 한국인의 뜨거운 호응을 이끌어내 자연스럽게 미국에 대한 호감과 지지를 끌어낼 수 있었다. 냉전 선전을 로컬 문화와 결합시킴으로써 미국 정부의 선전기관이 선진적 문화기관으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이다. 주한미공보원 영화 역시 한국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을 고려해 주제와 대상을 주의 깊게 선택, 미국에 대한 신뢰감을 구축했고 미국이 제시하는 냉전 근대국가를 한국이 도달해야 하는 보편적 가치로 표상했다. 주한미공보원 영화는 한국에서 어떻게 수용되었는가? 해방 이후 두드러진 한국 사회의 미국화(Americanization) 경향은 냉전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고 문화적 헤게모니를 구축하기 위한 미국의 문화냉전 정책이 주효했음을 말해준다. 하지만 타자의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은 수동적이기보다는 선망과 질시, 모방과 저항, 선택적 수용과 교섭의 과정이 역동적으로 교차했다. 1950년대의 전후 무상원조와 1960년대 개발원조의 성과를 홍보한 주한미공보원 영화는 아시아 개발도상국의 모델로서 한국의 이미지를 표상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주한미공보원은 미국의 개발주의가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점을 설득하기 위해 미국을 문화와 전통의 수호자로 표상한 영화들도 제작했다. 미국의 냉전 오리엔탈리즘이 한국의 냉전 근대와 한국의 전통 문화라는 상반된 이미지를 통합하는 과제를 떠안은 것이다. 하지만 반세기 동안 지속된 냉전으로 문화적 접촉면이 넓혀짐에 따라 ‘의도치 않았던’ 상호교류의 결과가 발생하기도 했다. 따라서 냉전에 대한 연구는 주한미공보원 영화가 한국 국민에게 어떤 미국을 제시했는가 하는 질문뿐만 아니라 그것이 미국의 냉전 문화주의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 또한 쌍방향적으로 조명되어야 필요가 제기된다. 『문화냉전』은 미국이 제시한 미국 이미지와 미국 문화가 저항 없이 무조건적으로 수용된 것은 아니라는 점, 또한 한국인이 미국적 가치와 미국 문화의 어떤 면을 선택적으로 수용했으며, 1950~60년대 한국 영화가 주한미공보원 영화와의 교섭 속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구축해갔는가를 한국과 미국의 자료, 특히 미국 정부의 기밀 해제된 광범위한 문서들에 대한 조회를 통해 짚어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