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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제1장 궁녀생활 서막 | 저수궁에 들어가다 | ‘마마님’을 알현하다 | 때릴 수는 있지만 욕은 할 수 없다 | 얼굴은 때리지않는다 | 잠자는 자세 | 방귀 뀔까 무서워 배불리 먹을 수 없다 | 아침식사 | 점심식사 | 저녁식사와 야식 | 사계절 음식 | 의복, 치장 | 행동거지 | 궁녀는 글을 배우지 못한다 | 과일 항아리 | 가장 기쁜 일-가족과의 만남 | 전달 신호 | 담배를 올리는 일 | 제기차기 제2장 서태후의 일상 서태후의 일상 | 저수궁과 체화전 | 야간 당직 | 여담 | 조회 이전의 풍경 | 머리 빗기 | 분주한 아침 | 가장 고된 일 | 화장지와 관방 | 상소문 읽기 | 식사 준비 | 취침 | 식사를 올리는 일 | 네 명의 금강역사,500명의 아라한 | 음식을 권하지 않는 예 | ‘다보보’가 불러온 이야기 | 가장 먼저 설 소식을 전하는 납팔일 | 수많은 메뚜기의 날갯짓 | 주사위 놀이와 검은 원숭이 | 발에는 비단 신발, 입술에는 붉은 앵두 | 발 씻기, 목욕, 손톱 손질 | 이허위안 | 이허위안 지춘정 | 옥당춘 부귀 | 호수 위의 신선 제3장 청 황궁의 풍속 무당과 식육제 | 2월 2일, 용이 머리를 드는 날 | 바느질 솜씨를 구하는 날 | 악귀를 쫓는 중원절 제4장 서태후와 광서제의 시안 피란 시안으로 가기 전에 죽은 진비 | 피신하기 전 두 개의 손톱을 잘라내다 | 시관스西貫市에서의 하룻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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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는 자는 것이에요. 궁 안의 규범 중 유난히 엄격한 규범이 하나 있어요. 궁녀들은 잘 때 바로 누워 하늘을 보고 자면 안 된답니다. 반드시 몸을 옆으로 돌리고 다리를 구부린 채 자야 했어요. 궁 안의 사람들은 모두 신을 믿어요. 전해지기로는 궁마다 신이 있어서 밤이 되면 궁 밖으로 나와 그 궁을 지킨다고 해요. 태후마마와 황상[재위 중인 황제], 황후마마를 보호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궁녀들은 밤에도 아무렇게나 잘 수 없었어요. 신이 보는데 사지를 벌리고 팔자 모양으로 누워 있으면 얼마나 보기 싫겠어요! 그랬다가 만약 신의 심기를 거스르기라도 하면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겠지요. 자는 것 때문에 얼마나 매를 맞았는지 몰라요. 그때 습관 때문에 지금까지도 몸을 옆으로 돌리고 잠을 자요. 얼마나 맞았으면 그러겠어요.”---pp.24-26
“궁녀는 절대로 글을 배울 수 없었어요. 궁녀는 태감보다 한 단계 아래 계층이었기 때문에 태감들은 간혹 궁에서 글을 익혔지만 궁녀는 절대불가였어요. 대신 시간 날 때 배우는 것이 바느질과 주머니를 짜는 일이었지요. 내가 있던 저수궁은 황궁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써야할 은이 떨어지는 일은 없었지만 동궁과 자령궁慈寧宮에는 때때로 은이 충분히 지급되지 않았다고 해요. 그래서 궁녀들은 용돈 벌이를 위해서라도 바느질을 악착같이 연습했지요. 어떤 때는 태후마마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큰 박쥐를 만들기도 했어요. 각양각색의 실을 들고 와서 실의 한쪽 끝은 긴 바늘로 방석 위에 고정시키고, 다른 한쪽 끝은 이로 중심선을 단단히 물어 팽팽하게 잡아당긴 뒤 열 손가락을 빠르게 움직이면 금세 큰 박쥐 한 마리가 완성됐어요. 저수궁 문밖, 장춘궁 가는 길에 있는 살아 있는 박쥐와 똑같았지요. 그러고는 태후마마가 보시고 한번 웃어주시길 바랐어요.---pp.38-39 “태후마마의 침전에는 대여섯 개의 빈 항아리가 놓여 있는데 그냥 보기 좋으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신선한 과일을 저장해놓기 위한 것이었어요. 태후마마의 침전은 다른 향을 쓰지 않고 과일 향을 써서 안 좋은 냄새를 없앴어요. 저수궁 외에 체화전에도 과일 항아리가 있었고요. 이 과일들은 대부분 불수감나무 열매나 시트론[귤 등과 같은 장과], 모과같이 남쪽 지방에서 나는 과일들이었어요. 매월 둘째 날과 열여섯째 날이 되면 항아리에 든 과일을 꺼내고 다시 신선한 과일을 채워 넣었지요. 꺼낸 과일들은 우리가 가져가도 되었답니다. 이것은 태후마마와 황후마마만 내릴 수 있는 규정이어서 이 두 궁에 있는 궁녀들은 특권을 누렸지요. 가져간 과일은 자기 방에 놓을 수도 있고 남겨두었다가 식구들에게 보낼 수도 있었어요. 궁중생활에서 그래도 이것이 꽤 즐거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pp.42-4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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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노궁녀 ‘룽얼’은 누구인가?
걸작 논픽션이라는 말이 전혀 손색없는 『서태후와 궁녀들』은 “청 황실의 마지막 궁녀가 집적 들려주는”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듯이 책을 읽기 전에 반드시 노궁녀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한다. 저자들은 노궁녀의 구술口述을 바탕으로 이 책을 썼다. 그들은 1940년대 초반에 만났다. 노궁녀는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한족 성은 ‘허何’이고 짐작컨대 본래의 만주 성은 ‘허서리赫舍里’ 씨다. 궁에 있을 때는 ‘룽얼榮兒’이라 불렸고 서태후는 ‘룽’이라 불렀다. 노궁녀는 원래 시청西城 징지다오京畿道에 살았다. 아버지는 여느 기하인들(만주족)처럼 딱히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냈고 10살 이상 많은 오빠는 아마추어 희곡 배우였다. 룽얼은 열세 살에 황궁에 들어와 저수궁儲秀宮[청대 서태후가 거처했던 곳]에서 일을 배우고 서태후 곁에서 시중을 들었다. 주로 담당했던 일은 담배를 올리는 것이었다. 열여덟 살 되던 해에 서태후의 명으로 류 씨 성인 태감에게 시집을 갔다. 그는 서태후의 심복이었던 환관 리롄잉의 양아들로 베이츠쯔北池子에 살면서 광서제의 이발을 담당하던 환관이었다. 그러나 불구덩이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는 혼인생활 속에서 1년도 채 못 되어 태후를 그리워했고 다시 궁으로 들어가기를 청했다. 다행히 서태후의 특별허가를 받아 궁으로 돌아왔는데 이것은 청대에 매우 드문 일이었다. 궁의 관례상 궁녀는 한번 궁을 떠나면 돌아오는 것이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혼인한 몸으로 태후 곁에서 시중을 든다는 것은 태후의 각별한 애정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1900년(경자년), 서태후를 따라 시안으로 피신했을 때는 출발 직전 진비珍妃가 처참하게 죽는 일을 현장에서 겪었다. 신축년, 시안에서 환궁했을 때는 나이가 들어(청대 궁의 관례에서 궁녀는 25세 이전에 궁을 떠나 혼인을 해야 했다) 궁을 떠나 베이츠쯔로 옮겨와야 했다. 서태후의 시중을 든 햇수는 무려 8년이었다. 남편이었던 류 태감은 아편쟁이로 도박에 빠져 살다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는 고난의 세월이었다. 2.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가? 룽얼의 구술을 책으로 정리해낸 저자는 머리말에서 이 책이 궁녀의 생활, 서태후의 일상, 광서제에 관한 일화, 기타 사소한 이야기들 등 네 분류로 나눌 수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자신이 지면에 옮기는 문제에 있어서 투철한 책임의식을 갖고 다음과 같이 밝혔다. “공자는 일찍이 ‘전하기만 하고 짓지 아니하며 옛것을 믿고 좋아하는 것은 마음속으로 노팽老彭을 본받고자 함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아마도 이 노팽이라는 분은 역사적 사실을 있는 그대로 대하고 거기에 기름이나 식초를 첨가하지 않은, 즉 실제 상황만을 전한 분이었을 것이다. 나 역시 이 노팽 선생을 따라보고자 한다.” 저자는 글을 쓰면서 모든 근거 없는 과장, 임의로 신비감을 더하는 것, 암암리에 기만하는 것, 현실성 없이 허황된 것을 배제하고, 모르는 것을 억지로 아는 것처럼 쓰는 것을 최대한 피하려고 노력했다고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있다. 그만큼 이 책에 들어있는 역사적 사실들이 소중하고 귀중한 것이 때문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이 이야기는 온전히 서태후 만년의 생활을 중심으로 하며 그녀가 백성의 고혈을 돌아보지 않고 극도의 사치로 향락을 누리던 궁중생활이 반영되어 있다. 또한 서태후의 일상이라든지 연회와 유람, 먹고 마시고 자는 등의 소소한 이야기들까지 모두 상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런 생활 속에서 궁중의 체제를 대략적으로 엿볼 수 있으며 한편으로는 봉건사회 통치계급이 정한 삼엄하고 잔혹한 제도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위엄이 하늘 아래 만백성 위에 자리하고, 한 사람의 사욕이 나라와 민족이 망하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렀던 것을 말이다. “떨어지는 나뭇잎으로 가을이 왔음을 안다”, 누구나 아는 이 말처럼 서태후가 추구했던 바를 보고 그녀의 속마음이 무엇을 향했는지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을 것이다. 청나라 말기 기록에 이런 시가 있던다. “삼십삼천 하늘 위 하늘, 가장 높은 곳, 옥황상제의 머리 위 왕관, 왕관 위에 깃대를 꽂고, 나 부처는 그 깃대 꼭대기에 있노라.” 스스로 ‘서천의 태후 부처님’의 나라 씨라 칭하던 서태후였으니 그 높고 높은 지위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이 시는 그 지위를 신랄하게 비꼰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풍자시는 풍자를 하기에는 충분하나 세세한 진상을 알기에는 부족한 감이 있다. 도대체 그녀는 어떻게 고귀함을 유지했는지, 어느 정도의 고귀함이었는지? 먹는 것은 어떻게 먹었는지? 자는 것은 어떻게 잤는지? 또 무엇을 하면서 즐겼는지? 이런 생생하고 사실적인 일들은 바로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다. 여기에 소개된 이야기들은 하나하나 모두 생생하고 충실하다. 궁녀들이 입궁해서 배치를 받고, 자고·먹고·입고 하는 모든 습관을 교육받는 법, 잘못했을 때의 체벌, 태감들과의 관계, 서태후의 일과가 어떻게 시작되어 마무리되는지, 그녀의 식사습관, 방의 모양, 세수하고 머리빗고 치장하는 데 들이는 공, 궁 전반의 청소, 음식준비 등 세세한 이야기들을 읽은 독자들은 책을 덮고 절로 생각에 잠기게 될 것이다. 강대한 이웃 나라들이 국경까지 밀어닥치며 호시탐탐 나라를 노리고 나라가 열강에 쪼개질 지경에 이른 상황임에도 고군분투하여 나라의 힘을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권좌에 취한 권력자의 실제 모습을. 아마 착취를 당한 중국인들이나 역사에 밝은 이들은 더욱 비통한 심정에 사로잡힐 지도 모르나, 동시에 이 책을 보며 궁중의 법도와 풍속의 화려한 모습에 정신을 잃을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서태후 만년에는 외세를 배척하던 것에서 외세의 비위를 맞추는 쪽으로 바뀌었다. 소위 ‘중국의 물력을 계산해 외국의 환심을 산다’는 태도였다. 제국주의자들에게 굴복하고 자주 연회를 열어 각국 공사관 부인들을 초청하고 웃는 낯으로 열강의 비위를 맞추려 했다. 대체로 궁녀의 생활, 서태후의 일상, 광서제에 관한 일화, 기타 사소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이 책은 굳이 이 틀에 얽매이지 않고 손가는 대로 독자들이 연상하기 쉽도록 배려한 게 큰 장점이다. ‘네 명의 금강역사, 500명의 아라한’ 부분은 물론 서태후의 일상에 속한다. 그리고 ‘다보보’ 이야기는 확실히 기타 사소한 이야기에 속한다. 하지만 이 두 이야기를 연이어 보면 궁 안에서 태후는 천하제일의 연회를 즐기지만 궁 밖에서 팔기 자제들은 다보보를 먹는 꼴사나운 모습을 알 수 있다. 만주인이 세운 청 왕조의 기둥, 기하인들이 말이다. 이 두 모습을 대조해보면서 독자들은 자연 결론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서태후의 팔옥누대八玉樓臺 역시 모래 위에 세운 성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아예 이 두 이야기를 함께 배치했다. 또 한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궁에서 연지를 제작하는 이야기를 쓰고 나니 이는 늦봄의 일이라 펜이 가는 대로 초여름의 익모초 연고를 만드는 이야기까지 썼다. 또 중간에 냄새나는 대마 이야기들을 발견해서 장푸의 거세 이야기에 연결해서 썼다. 서행길 이야기를 쓸 때는 피란의 긴 여정 중 서태후의 가마 이야기 외에도 태후를 따라 서쪽으로 함께 피란한 사람들 이야기까지 써야 했다. 그래서 ‘서행길’ 부분에 황태자 이야기며 ‘광서제가 머리를 깎다’ 편 등을 수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