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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tricia Highsm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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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이 여권을 펼쳐 옆으로 돌리자 금발 남자의 사진이 보였다. 가르마를 오른쪽에 탔고, 얼굴선은 더 갸름했지만, 눈매와 눈썹, 그리고 입은 프랭크와 닮았다. 톰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데 어떻게 지금껏 해낸 걸까? 지금까지는 행운이 따랐을 것이다. 사진 속의 소년은 곧 만으로 열아홉 살이 될 거고, 키는 180센티미터가 조금 넘어서 프랭크보다 약간 더 컸다. 프랑스 호텔에서는 여권이나 신분증을 제시하는 게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출입국 사무소는 프랭크 피어슨이 실종되었다는 정보를 지금쯤 받았을 거고, 프랭크의 사진도 전송 받았을 것이다. 프랭크의 형은 지금쯤 자신의 여권을 찾아보지 않았을까?--- p.57
톰은 프랭크의 이름, 심지어 빌리라는 이름도 부르고 싶지 않았다. 톰은 발걸음을 멈추고 다시 귀를 기울였다. 정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자동차 엔진 소리도, 심지어 뒤쪽에 있는 벨 옹브르에 난 길에서도 아무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톰은 길 끝에서 살펴보는 게 좋을 거라 생각하며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어디가 길 끝일까? 1킬로미터는 계속 이어질 것 같았고, 그러다 보면 주변에 들판과 가축을 위한 옥수수 밭, 그리고 간혹 양배추와 겨자 밭이 있는 또 다른 길로 이어질 것이다. 톰은 좁은 길 양쪽에 부러진 나뭇가지가 있는지 살폈다. 몸싸움을 벌인 흔적일 수 있겠지만, 마차가 지나가면서 그랬을 수도 있을 것이다.--- p.83 소년은 톰을 쳐다보더니 눈을 깜박이며 물었다. “제가 다른 데로 가면 저와 함께 가 줄래요? 예를 들어, 다른 도시로 가면요?” 프랭크는 입술을 축였다. “지금껏 저를 받아 주고 숨겨 준 게 힘들었다는 거 알아요. 저와 함께 다른 도시로 가면, 그땐 절 두고 떠나면 돼요.” 그는 갑자기 음울해져 창밖을 내다보더니 다시 톰을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p.137 그는 짐을 꾸리기 시작했다. 프란케 호텔이 갑자기 매우 위험한 장소 같았다. 프랭크를 납치한 2인조 혹은 3인조는 금요일 저녁부터 그와 프랭크를 호텔까지 뒤쫓아 왔을지도 모른다. 호텔을 나서는 그에게 총을 쏘는 걸 아무렇지 않게 여길 수도 있었고, 그의 방으로 올라와 총을 쏠지도 몰랐다.--- p.176 “음, 내가 관심 있는 건 소년의 안전이에요.” 톰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거실을 서성였다. “집안이 무척 부유한 걸 생각하면 그 소년은 이상했어요. 돈을 두려워하거나 증오하는 것 같았어요. 내 구두를 모두 반짝반짝 윤이 나게 닦기도 했어요. 지금 신고 있는 이 구두도요.” --- p.1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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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플리를 따라간 소년』에서 하이스미스는 톰 리플리를 흉내 내고 싶어 하는 또 다른 실패 사례를 소개한다. 16세 프랭크는 거부인 장애인 아버지를 벼랑 끝으로 떠밀어 살해한다. 세상은 그가 사고사 당했다고 생각한다. 신문을 통해 디키 그린리프 살인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프랭크는 리플리의 제자가 되기 위해 그를 찾아간다. 리플리는 그렇게 프랭크의 보호자가 되어가는 가운데 동성애 코드가 뚜렷하게 드러난다. 리플리는 크리스토퍼 이셔우드(『싱글맨』의 작가)를 읽고, 프랭크는 리플리의 침대에서 잠을 잔다. 엘로이즈조차도 두 사람의 관계를 의심할 정도다. 납치범들은 유산을 상속받은 소년을 노리고, 톰은 프랭크에게 미국으로 돌아가 새 출발할 것을 제안한다. 두 사람은 베를린의 게이 바에서 시간을 보내고 톰은 여장까지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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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디어 국내 최초로 완역되는 리플리 5부작
20세기 최고의 범죄소설 작가(“The Greatest Crime Writer”, 영국《타임스》)로 알려진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분신과도 같은 작품은 단연 리플리 시리즈일 것이다. 1955년부터 1991년까지 36년에 걸쳐 총 5부작으로 완성된 연작 소설을 통해 ‘현대 문학사에서 가장 카리스마 넘치는 사이코패스’인 주인공, 톰 리플리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워싱턴포스트》 서평 담당 기자로 활동하면서 문학 평론 부문에서 퓰리처상을 받은 마이클 더다는 리플리 5부작이 미국에서 새롭게 양장본으로 재출간되었을 때 이렇게 말했다. “하이스미스가 창조해낸 가장 유명한 캐릭터, 톰 리플리는 태평스럽고, 아내와 친구들에게 헌신적이고, 미식가이고, 부득이 킬러일 수밖에 없는 인물이다. 이 조용한 탐미주의자는 오직 필요할 때만 몽둥이로 내리치고, 목을 조르고, 익사시킨다. 때로는 친한 친구들로 하여금 스스로 목숨을 끊도록 유도하기도 한다. 가끔 첫 살인의 추억이 그를 불편하게 하지만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죄책감은 느끼지 못한다. 그가 살인을 하는 이유는 자신과 친구들과 사업 파트너들과 집을 보호하기 위할 뿐이다. 아마 다른 보통 사람들이라도 다르진 않을 것이다.” 리플리는 사건에 대해 신중하면서도 동시에 치밀한 완벽주의자의 모습을 보이며, 범행을 저지르는 동안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죄의식을 느끼지 않음으로써 20세기 문학사상 독창적이고도 기이한 캐릭터가 탄생되었다. 우리에게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 「태양은 가득히」나, 맷 데이먼, 주드 로 주연의 「리플리」로 널리 알려지기도 한 원작 소설『재능있는 리플리』는 발표되자마자 화제를 일으켰다. 범죄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우면서 이전까지 없었던 전혀 새로운 캐릭터를 창조해냈고, 인간 심리의 흐름을 따라가는 참신한 접근법으로 평단의 찬사를 받았다. 1955년 『재능있는 리플리』를 시작으로, 1991년 『심연의 리플리』까지 36년에 걸쳐 다섯 권으로 완성된 리플리 시리즈는 톰 리플리라는 인물의 심리를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며 현대문학사에서 영원히 기억될 캐릭터를 창조했다. 리플리 5부작은 단연 하이스미스의 대표작이자, 그 명성에 비해 국내에서 부분적으로 한두 권만 출간되다가 마침내 다섯 권 모두 소개되는 완역본이기도 하다. 5부작 완간을 기념하며 특별히 박스 세트를 함께 선보인다. 깔끔한 디자인으로 리플리 시리즈의 특색을 잘 살린 박스는 300세트만 한정 제작하여 소장 가치를 높였다. 5부작을 완간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만큼, 그동안 기다려온 독자들에게는 큰 선물이 될 것이다. ■ 출간 의도 “진정으로 좋은 사람을 찾아볼 수 없기 때문에 누가 착한 사람이고 누가 악한 사람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다” -오토 펜즐러(범죄소설 전문 편집자)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1995년 세상을 떠난 이후로 서서히 그녀의 작품이 세계 문학계에서 재평가 받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게 되었다. 비평가들의 찬사에 힘입어 하이스미스의 단편집이 묶여 나오고, W.W. 노튼 사는 그녀의 소설들을 개정판으로 출간했으며, 1999년 이후로 지금까지 세 편이나 리플리의 영화화 작업이 이루어졌다. 『재능있는 하이스미스』라든지 『아름다운 그림자』처럼 비범한 글쓰기의 비밀, 유럽에 정착해서 지내야 했던 신비로운 이력과, 평생 동성애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사생활의 역사까지 아우르는 전기가 계속 발표되고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1960년대 이후로 범죄소설의 인기가 하락하면서 1995년에 발표된 유작인 『소문자 g』가 고국인 미국에서 출간되지 못한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하이스미스는 공교롭게도 자국인 미국보다는 유럽에서, 생전보다는 세상을 떠난 이후에 더 높은 평가를 받은 작가이기도 하다. 유럽은 하이스미스를 도스토예프스키, 콘래드, 카프카, 지드, 카뮈 같은 훌륭한 심리 소설가의 반열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작품들은 범죄적 상황 속에 처한 인간의 불안과 죄의식에 기묘한 공감을 이끌어 내었다. 특히 인간 내면에 잠재된 불가해한 측면을 냉정한 문체로 정교하게 포착해낸 그녀에게는 ‘제2의 에드거 앨런 포’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을 정도였다. 장르문학 독자들에게 꾸준한 반응을 얻고 있는 셜록 홈즈 전집,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등과 더불어 최근 1~2년 사이에 대실 해밋 전집, 조르주 심농의 메그레 시리즈가 탄생했다. 그리고 이제 하이스미스의 최고 걸작인 리플리 5부작이 세상 밖으로 나올 차례가 되었다. “범죄자는 드라마틱하게 흥미롭다. 왜냐하면 그들은 적어도 잠깐이나마 능동적이고, 영혼이 자유롭고, 누구에게도 굴종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은 내게 상당히 따분하고 인위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삶이나 자연은 정의가 실현되느냐 마느냐에는 전혀 개의치 않기에.” 하이스미스의 세계관이 그녀가 이처럼 냉소적인 글을 남긴 시대보다 오히려 인과응보의 개념이 무너지고, 선악의 구별이 점점 모호해져 가는 지금 상황에 더욱 생생하게 다가오는 것이 리플리 5부작의 출간 의지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 리플리 증후군 “톰 리플리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하이스미스 자신이 바라는 세계만을 진짜라고 믿고, 자신이 발을 딛고 사는 현실을 오히려 허구라고 믿는 것을 ‘리플리 증후군’이라고 한다. 『재능있는 리플리』에서 사소한 거짓말로 인하여 재벌가의 아들을 만나고, 그의 삶을 동경하게 된 주인공 리플리는 점점 더 대담한 거짓말과 신분 위장으로 새로운 삶을 꿈꾼다. 리플리라는 가공의 인물이 정신병리학의 연구 대상으로 떠오른 것은 20세기 후반부터다. 실제로 리플리와 유사한 말과 행동을 하는 사례가 빈번하게 나타났기 때문이다. 몇 년 전 영국의 유력 일간지 《인디펜던트》가 신정아 교수의 가짜 박사 학위 소동을 두고 영화명을 빗대어 ‘재능있는 신정아 씨(The Talented Ms. Shin)’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리플리 증후군은 개인의 사회적 성취욕은 크지만 사회적으로 꿈을 실현할 수 있는 통로가 봉쇄돼 있는 경우 자주 발생한다. 마음속으로 강렬하게 꿈꾸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으면 가공의 세계를 만들어 그곳에서 살게 된다는 것이다. 작품이 발표된 1955년 당시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더욱 설득력을 갖는 지점이 여기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