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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4
성스런 사람 왕태(王?) 10 물화(物化)의 수종(守宗) 33 간담(肝膽)이 초월(楚越)이다 42 영원한 마음 61 송백(松柏)의 거울 73 관천지(官天地) 부만물(府萬物) 87 올자(兀者)와 집정(執政) 107 자산(子産)과 신도가(申徒嘉)의 논쟁 134 중앙자는 화살을 맞는다 169 우리 자신의 숙산무지(叔山無趾) 190 발보다 높은 것 211 천부지재(天覆地載) 232 공자의 질곡(桎梏) 243 천하의 추남 애태타(哀??) 263 추함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다 282 애태타 떠나다 302 돈자(?子) 이야기 321 물춘(物春), 사지화예(使之和豫) 350 덕불형(德不形) 370 민자(閔子)에게 전하다 384 인기지리무신과 옹앙대영 399 천국 천사, 독성천(獨成天)의 성자 414 무정(無情)의 사람 429 도의 얼굴, 하늘의 몸 438 종언(終焉) 449 |
高炯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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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법으로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은 사람들의 좋지 않은 밑바닥만 감찰하는 일일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바라보는 가장 좋지 않은 방식일 것이다. 법은 위험한 수단이고 구실일 뿐이다. 화살에 맞지 않은 운명 같지 않은 운명을 선택한 자산에게 수많은 사람들이 화살을 맞고 살아가는 평등한 운명의 현실을 말하면 도대체가 운명이란 것을 이해할 수 있을까. 사람의 운명을 헤아릴 줄 모르는 사람은 어떻게 글이란 것을 쓸 수가 있고 참된 희생의 정치를 할 수 있을까. 이 역시 불가내하에 불과한 것일까. 신도가는 과오를 가볍게 여기지 않았고 또 변명하지도 않고 올형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인 사람으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신도가는 자신이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한 장의 거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 것이다. 숙명을 받아들이는 것이 숙명을 거부하고 살아가는 것보다 더 온전한 삶일 것이다. 2. 과연 자산에게서 집정이란 벼슬을 떼어낸다면 그에게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는 남의 벼슬을 쓰고 있는 대리인일 뿐이다. 벼슬이란 언제든지 군주가 거두어가면 없는 허울이다. 장자의 운명이란 정말 어쩔 수 없음이 아니면 운명이 될 수 없는 것을 말하는 것 같다. 자산의 운명은 군주의 운명에 종속되어있다. 즉 그는 군주의 목걸이를 하고 있는 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는 그것이 자신의 몸이고 옷이라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 생각 속에서 집정은 이미 죽어있기 때문에 삶을 수정할 수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신도가에겐 그 고귀한 운명이 있는 것 같은데 자산에겐 비순명의 운명이 있는 것 같다. 자산의 운명은 오직 추레할 뿐이다. 3. 괴이한 글자를 즐겨 쓰던 장자가 이곳에 정(正) 자를 쓰고 있다. 정 자는 지(止) 자의 머리에 한 일(一) 자를 하나 올려놓은 글자이다. 장자는 외형과 인위보다는 혼돈과 불구를 노래한 사람이기 때문에 정을 바르다는 뜻으로 풀면 재미가 없다. 몸 어느 한 곳도 성한 곳이 없는 지리소(支離疏)의 신체를 장자가 잘 묘사한 것도 자기 삶을 껴안고 살아가는 생의 순수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의외의 문자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장자가 정 자를 쓰지 못할 이유는 없다. 장자는 그 정조차 일종의 숙명이며 비정상으로 보았을지 모른다. 사실 장자가 중요하게 여긴 것은 외형이 아니라 사람의 안쪽[내(內, 마음)]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청청한 송백이 불구자처럼 비춰지기도 한다. 겨울에 잎을 떨구지 못하니 그 숙명이 오죽할까. 4. 숙산무지는 왕태와 신도가와 함께 삼올(三兀)이다. 이름엔 출생의 비밀과 그 사람에 대한 꿈이 담겨 있게 마련이다. 숙(叔) 자에는 아버지의 아우, 형제 중 셋째, 연소함, 멸망에 가까운 때, 손으로 주울, 콩의 뜻이 있다. 지(趾) 자는 발가락, 복사뼈이다. 무지(無趾)는 발가락, 복사뼈가 없다는 뜻이다. 이로 보아서 그는 발의 절반 이상을 베어내는 참형을 당한 것으로 보인다. 장자가 무슨 의미로 이런 글자들을 모아 한 사람의 이름을 지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하지만 고독자에게 숙산무지(叔山無趾)는 기막힌 이름이다. 발에 가한 끔찍한 형이 올형이다. 올형자는 먼 길을 걸을 수가 없다. 불가피하게 자주 멈춰야 하고 앉아서 쉬어야 한다. 도대체 그 발에 무슨 죄가 있었던 것일까. 숙산무지의 한 개인은 슬퍼 보이고 세상은 무정하고 가혹해 보인다. ‘숙산무지’ 하고 이렇게 그 이름을 불러보면 땡볕 아래 서있는 그 사람이 마치 고독자였던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비애가 느껴진다. 장자는 단순한 비극론자가 아니었다. 단지 숙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그를 비극론자라고 몰아세웠을 뿐이다. 그는 중심을 늘 보고 있었다. 그 중심은 세상과 권력이 아니라 그 한 사람 안에 있는 그 무엇이었다. 어찌 보면 비극이다 불가나하다 할 것 없이 저 만물은 모두 각각의 숙명 속에 놓여 있을 주체들이다. 존재할 수 있었던 것들만 저 자연에 널려 있다. 그들은 모두가 능(能) 속에 있다. 그 능이라고 하는 참고 견디어가는 것에서 숙명을 받은 한 사람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흔들리며 세상을 바라보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이동과 보행은 몹시도 불편했을 것이다. 그렇게 머리와 어깨 등이 흔들리며 살았을 사람을 생각하면 환하고 반듯하고 아름다운 것들은 고독자의 눈앞에서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는 눈과 마음속에서 ‘그래 이게 나야, 나야’하고 수없이 되뇌었을 것이다. 특히 그의 입과 코, 눈이 동시에 위로 올라갔다가 아래로 내려갔다가 했을 것을 상상하면 누가 그를 바로 쳐다볼 수 있었을까. 자아와 타자는 분리된 슬픔일 것이다. 이 타자의 자아가 될 수 없는, 자신에게만 자아인 이 타자는 누구일까. 숙산무지는 타자라는 이름표를 달고 있는 모든 자아일 것이다. 뒤꿈치는 〈덕충부〉를 관통하는 핵심어이다. 이곳에서 이 뒤꿈치는 가장 중요한 시선이고 명사이다. 장자가 먼저 뒤꿈치를 숙산에게 의식하도록 만들게 해야 하는 문장의 장소, 없음의 지체가 이 두 사람 앞에 숙명처럼 와 있다. 숙산이 중니를 만난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숙산이 뒤꿈치를 그에게 보여준 것이 중요한 모션이 되어야 한다. 그 사자의 뜻은 ‘중니에게 뒤꿈치를 보여주었다’가 된다고 보았다. 중니에게 숙산무지가 베어 없어진 뒤꿈치의 흉터 자국을 내보여준 것은 대단히 정황적 묘사라고 할 수 있다. 장자와 중니 그리고 숙산의 날카로운 시선이 집중되는 느낌이 있다. 이렇게 해야 극적인 장면이 형성되고 사건 대립이 전개될 수 있다. ‘보시오. 내 이 발을!’ 하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숙산은 적어도 강력하게 항의하는 표시로 그 발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그러자 중니가 고개를 슬쩍 돌려 외면하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참으로 차갑고 날카로운 시선이 보이는 듯하다. 중니는 매우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여기서부터 자신을 속여가면서 실언을 하는 등 말을 늘어놓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장자는 중니에게 무언가 켕기는 것이 있다는 것을 고독자로 하여금 느끼게 하고 있다. 이 견(見) 자를 보여주었다고 해도 되고 중니의 눈에 띄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어느 것이 더 심리적이고 미묘한 것일까. 읽는 사람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숙산무지가 노골적으로 바짓가랑이를 들어 슬쩍 발을 보여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다 돌아서는 숙산무지의 뒤꿈치를 중니가 보게 된 것일 수도 있다. 아니 절뚝거림 그 자체가 이미 그 모든 것을 보여주는 전환점이 되었다. 되고도 남았다. 그렇다면 숙산은 중니의 얼굴 앞에서 자꾸 발을 떼어 절뚝거리며 말했을 것이다. 솔직히 이것이 중니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하려는 장자의 의도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절뚝거리려 해서 절뚝거린 것은 아니었지만 장자가 숨겨놓은 기묘한 행위 묘사를 상상해보는 것으로도 이 글은 이미 깊숙한 곳으로 들어간 셈이다. 이야기처럼 영원하고 위대한 것도 없는 것 같다. 장자는 사람을 가리켜 잊어야 할 것은 잊지 않고 잊어선 안 되는 것은 잊는 성망(誠忘)의 존재라고 하였다. 이야기가 우리를 잊지 않게 하고 또 잊게 하는 것 같다. 삶이 숙명인 줄도 모르고 사람들은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누가 다 잊지 않고 살아가며 누가 다 잊고 살아갈까. 그런데 혹시 자신의 이야기를 잃고 살아가는 것은 아닐까. 이야기를 잃은 사람, 이야기가 없는 사람은 죽은 사람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