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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대사는 순정만화로 채워져 있습니다
만화로 잡지를 배웠습니다 그 자체로 가장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 대여점과 함께, 만화가 사라졌다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그래서 소녀들의 연애는? 소녀들의 성 오, 우정이여 만화가 시키는 대로 입었습니다 내 유머가 순정만화에서 비롯한 것이라면 그런 삶이 있는 줄 몰랐다 닫혀버린 세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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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소녀들 이야기
이정연 MD (kafkayeon@yes24.com)
어릴 적부터 시험이 끝나는 날에는 가방에 큼지막한 보조가방을 챙겨 나가곤 했다. 하교길에 바로 만화방에 가서 시리즈 하나 통째로 빌려 읽는 것이 시험 끝난 나만의 의식이었다. 때문에 만화를 추천해주던 만화방 언니가 내 세계를 이루는 데 한 몫 했음은 물론이요, 한 때는 만화방 주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소년물, 추리물, 스포츠물 등 장르를 가리지 않고 좋아했지만 역시 가장 설레어 하며 읽었던 건 순정만화였다. 그러니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라는 아무튼 시리즈의 스물일곱 번째 이야기, 『아무튼, 순정만화』를 집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어머니가 만화를 아끼는 분이었던 덕에 저자는 자연스럽게 순정만화를 읽으며 자랐다. 여중, 여고라는 환경은 현실보다는 순정만화에 이입하기 좋게 만들었을 테다. 마침 잡지가 부흥하고 천계영, 권교정, 신일숙 같은 만화 작가가 인기를 얻고 아이돌 팬픽과 함께 야오이 장르가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저자는 『불의 검』, 『오디션』, 『다정다감』 같은 만화에서 인간 관계에 대한 힌트를 얻고 사랑을 꿈꾸고 헤어짐을 배운다. 저자 이마루는 자신이 기꺼이 빠져들었던 순정만화의 사랑과 성장과 아픔을 되짚으며 묻는다. '그 시절 내가 만화에 그렇게 빠져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이 학원물을 지배하는 가장 큰 정서를 꼽자면 관계에 대한 열망일 것이다. 누군가와 강렬하게 가까워지고 싶고, 그가 가진 재능이나 매력을 동경하고, 그에게 나 역시 특별한 사람이 되고 싶고, 그 사람만이 나의 막연한 공허와 물음표들에 해답이 되어줄 것만 같은 청소년기의 간절한 열망.” (16쪽) “사춘기를 맞아 안 그래도 비대해진 자아와 순정만화에 줄곧 본 ‘평범해 보이지만 알고 보면 매력적인 여주인공 캐릭터’ 설정은 내면에서 포개져 극악의 시너지를 발휘했다. 분명히 말하건대 순정만화의 맥락에 따라 자기 캐릭터를 포지셔닝하는 것은 요즘 말하는 자존감이나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다.”(91쪽) 그 시절을 지나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 저자의 분석과 관점에 나도 덩달아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는데, (조금 창피하지만) 나 또한 만화 속 인물에 과몰입하며 포지셔닝하고 심지어 친구들과 그 포지셔닝을 갖고 즐기며 놀아보았기 때문이다. (말하고 나니 더 창피하다. 하지만 아마 학창시절에 만화에 빠져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경험이 있으리라.) 그 외에도 소소한 공감 포인트가 넘쳐난다. 『아르미안의 네 딸들』 등을 통해 절로 세계 여러 역사를 습득하고 『노다메 칸타빌레』로 클래식 지식을 쌓았다는 이야기, 연애 감정에 대한 갈망과는 달리 나 자신은 '휴먼비잉 1'이나 '교복 입은 여자애 1'에 가까웠다는 이야기, 만화 속 캐릭터의 옷을 보며 패턴과 명품을 배웠다는 이야기, 『호텔 아프리카』를 보며 소수자를 처음 생각해본 이야기, 등등. 『아무튼, 순정만화』는 이처럼 순정만화를 좋아하는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그래서 만화가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돌아본 기록이다. 그 결과 저자가 발견한 것은 책의 부제이자 주제 "그때는 그 특별함을 알아채지 못했던 수많은 여성들의 이야기"다. 넘쳐나는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프레임 속에서도 여자끼리의 진솔한 우정을 보여주었던 만화가 있었고, 사랑을 주제로 하는 〈세일러문〉이지만 사실 소녀팬들에게 중요했던 건 세일러 전사 사이의 우정과 성장이었음을. 성소수자 이야기가 만화에서는 어떻게 등장했는지 등등. (당대 대학가에서 성소수자 인권 문제가 대두되던 때라는 점은 담기지 않았지만, 만화 내에서의 흐름을 보여준다.) 여기에 창작자의 권리가 지켜지지 않아 몰락의 길을 걸었던 만화 시장 이야기도 빠뜨리지 않는다. 자신의 만화를 보고 자란 아이가 어른이 되어 만화 작가의 권리를 보장해주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작가는 어떤 마음이려나. 하지만 이 책을 추천하는 가장 큰 이유는 재미다. 나이대가 다르다면 등장하는 만화가 조금 생소할 수는 있지만, 좋아하는 마음과 그로 인해 어떤 재미와 경험을 했는지에 공감하며 편안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다. (이는 아무튼 시리즈의 큰 장점이기도 하다.) 잡지 에디터로 일하는 저자의 필력도 큰 몫을 한다. 다 읽고 나면 자기 인생의 대사의 반은 만화로 채웠다는 저자와 술 한 잔 하며 수다 떨어보고 싶달까. 내-피셜인데, 저자가 궁금해지면 좋은 책이다. 책장을 덮으면 '나도 언젠가는 『후르츠 바스켓』이나 『3월의 라이온』 같은 만화로 내 썰을 풀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또다른 내-피셜인데, 나도 비슷한 이야기를 이어가고 싶다면 정말 좋은 책이다. 그렇다. 『아무튼, 순정만화』는 재미있고 좋은 책이다. 오늘은 왠지 만화책이 보고 싶어지는 그런 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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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 10대이거나 20대 초반에 불과한 주인공들이 내뱉는 감정, 이들이 나누는 사랑의 맹세는 순수하다. 영원을 약속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할 나위 없이 맹목적이고 애달프다. 나는 만화 속에 흐르는 수많은 독백을 어떤 시구보다도 아름답고 정확하기까지 한 묘사들로 기억한다.
--- 「내 인생의 대사는 순정만화로 채워져 있습니다」 중에서 순정만화를 다시 펼치면 그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했던 다양한 여성 캐릭터들의 면면이 새롭게 보일지도 모른다. 우리조차 잊고 있었던, 그때는 그 특별한 반짝임을 알아채지 못했던 수많은 여자들의 이야기가. --- 「그 자체로 가장 많은 여자들의 이야기」 중에서 일에도 연애에도 차츰 위기를 느낀 이 사람들이 하는 짓이란 나와 내 주변 30대, 40대 여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술은 허름한 데서도 곧잘 마시지만 그래도 핫플레이스는 순례해야 하고, 어느 정도 돈을 벌고 커리어를 쌓아가는 스스로를 괜찮은 여자라고 생각하며 ‘세상에 이상한 남자가 너무 많다’라고 여자들끼리 단정을 내린다. --- 「사랑이 전부인 줄 알았는데」 중에서 『해피 매니아』에는 시게타의 폭주하는 연애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물심양면 지원하는 베프 후크가 있다. 『다정다감』 또한 남자 주인공인 강한결과 신새륜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지가 ‘도갱-’이라고 부르며 늘 의지하는 문도경을 포함해 반장과 민이 같은 여러 여자 친구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간다. --- 「오, 우정이여」 중에서 만화 속 세계만큼이나 만화를 그리는 사람들의 실제 삶 또한 내 세상을 넓혀주었다. 나와 같은 세상을 사는 20대 여자라고는 학교나 학원 선생님, 띄엄띄엄 근황을 듣는 친척 언니들이 전부였던 때, 엄마 책꽂이에서 본 공지영, 신경숙 작가의 소설은 먼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 순정만화 작가들은 독립적으로 자기 일을 하는 프로페셔널한 여성으로서, 확고한 취향을 가진 흥미로운 인간으로서 내 안에 존재했다. --- 「그런 삶이 있는 줄 몰랐다」 중에서 만화잡지가 나오는 날에 맞춰 서점으로 뛰어 가던 때, 모두가 만화책을 돌려 보던 때, 격주 혹은 매월 작가들이 10대 20대 여자들을 위한 이야기를 그토록 부지런히 쏟아내던 때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시절 당신들이 들려준 이야기들이 여자아이에서 어른이 된 수많은 ‘나’에게 남아 있을 것이다. 덕분에 정말 즐겁고 행복했다고 고백하며, 조심스레 안부를 묻고 싶다. 내 세상을 만들어준 수많은 순정만화가들에게. --- 「닫혀버린 세계」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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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의 나를 만든
칸으로 지어진 세계, 순정만화 아무튼 시리즈 스물일곱 번째는 순정만화 이야기다. ‘나를 만든 세계, 내가 만든 세계’라는 아무튼 시리즈에 걸맞게, 사랑하는 연인과의 결정적 순간에조차 순정만화 속 대사가 자동 재생되는 저자는 지금까지 이십 년 넘게 차곡차곡 쌓아오고 있는 순정만화에 대한 애정을 이 책에 쏟아냈다. 지방 소도시, 여중-여고라는 공간에서 성장한 저자는 아직 겪어보지 못한 세계, 더 넓고 전혀 다른 세계를 순정만화 속에서 접하고 점점 더 그 세계로 빠져들었다. 마침 「나나」, 「윙크」, 「밍크」 같은 순정만화잡지들이 속속 창간되고 동네 곳곳에 책 대여점이 생긴 시절이었다. 저자는 유시진 작가의 『쿨핫』은 만화 속 대사 한두 마디를 외울 정도가 아니라 이 만화가 자신의 대인관계와 세계관을 결정 지었다고 말한다. 또 박희정의 『호텔 아프리카』, 신일숙의 『에시리쟈르』 같은 작품들을 보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계를 배웠다고도 말한다. 작품만이 아니라 칸칸이 세계를 지어 이야기를 전한 작가 한 명 한 명이 하나의 세계였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순정만화 작가들은 독립적으로 자기 일을 하는 프로페셔널한 여성으로서, 확고한 취향을 가진 흥미로운 인간으로서 내 안에 존재했다.” 권교정, 김혜린, 박은아, 신일숙, 천계영, 한승원…, 『불의 검』, 『아르미안의 네 딸들』, 『오디션』, 『다정다감』, 『내 남자친구 이야기』…, 긍하와 강이, 하치와 나나, 부옥과 명자, 루다와 동경, 소서노와 카라…. ‘순정만화의 시대’를 통과한 이들이라면 저자가 소환한 작가들, 작품들, 주인공들 이름만으로도 그때 그 마음들을 다시 불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 반짝이던 세계가 아직 나에게 남아 존재한다는 것 순정만화 속 세계를 한껏 돌아다니던 저자는 이제 책장 한쪽을 『도쿄 후회망상 아가씨』,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을까?』, 『이런 우리지만 결혼, 할 수 있을까?』, 『결혼, 안 해도 좋아』 같은 만화로 채운 30대가 되었다. 그사이 그 많았던 대여점도, 만화잡지도 그리고 몇몇 작가들도 이제는 사라지고 없다. 그러나 이 책은 반짝이던 한 시절을 추억하며 연발하는 감탄사나 그 세계를 빚은 작가들에게 보내는 헌사가 아니다. 저자의 순정만화 사랑은 과거완료형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계의 폭도 깊이도 그때와는 많이 달라진 지금까지도, 또 그만큼 변한 세상에서도 순정만화를 가득 채운 그 어떤 마음들이 자신에게 조각조각 남아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여성이 만들고 여성에게 들려준 이야기들이 황홀하게 넘쳤던 ‘순정만화의 시대’, 저자는 그런 시간을 관통해왔음이, 그 이야기의 조각들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음이 지금까지도 힘이 되어주고 있다고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