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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간적인 예수를 만나다
구상부터 출간까지 15년, 혁명가 예수의 고독한 투쟁을 그린 대하 장편. 작가는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취재를 바탕으로 2,000년 전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오늘의 눈높이에서 서술한다. 구원의 메시아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로서의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책.
2020.05.04.
소설/시 PD 박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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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소개
제1장 거룩한 성문 앞에서 제2장 건너야 할 강 제3장 예루살렘의 음모 제4장 덫에 걸린 하얀리본 제5장 나귀를 탄 구원자 이스라엘 연표 |
尹錫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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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었지만 그는 그 길을 혼자 걷는 것처럼 외로운 사람이었다. 갈릴리 산과 들과 강을 마음속에 담아두며 다시 걸어서 돌아가지 못할 길을 그는 걸어왔다.
--- p.19 그 슬픔과 아픔이 그 자신의 슬픔과 아픔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요한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그는 모든 사람이 느끼는 아픔과 슬픔, 그런 삶을 꿰뚫어보고 있는 사람인지 모를 일이었다. --- p.125 그건 위험한 나라다. 그건 이루어질 수 없는 나라다. 그건 물을 가득 담아 놓은 저수조에 구멍을 뚫는 일이다. 그건 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림을 받는 사람의 위아래를 뒤바꾸는 일이다. 예수가 이루려는 하느님 나라는 결코 로마가 용납할 수 없는 나라였다. --- p.291 “…그런데, 광야에서 돌아오셨을 때 그 손에 박혀 있는 굳은살이 조금도 딱딱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예, 좀 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말랑말랑하게 느껴지는 굳은살이었습니다. 아기 손같이, 어머니 손같이 부드러웠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 빌립이 굳은 것보다 부드러운 것을 그리워하고 있었던 모양이지요.” --- pp.373-374 해가 지고, 어두워지기 시작하는 시간, 옹기종기 붙은 집들 위로 어둠이 안개처럼 내려앉기 시작하는 시간, 집집마다 조그만 불빛이 새어 나오는 시간, 하루 종일 무겁게 끌고 다니던 그림자가 몸을 놓아두고 떠나는 시간, 그때면 왠지 슬픔이 목을 타고 올라오고, 어디라도 주저앉아 꺼이꺼이 울고 싶어졌다. --- p.383 주어진 해방을 그저 받게 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유의 땅으로 걸어가도록 인도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사람을 태우고 강을 건너는 배가 되든지, 배에 탄 사람을 건너편 약속의 땅에 내려주는 사람이 되기로 마음먹었다. --- pp.409-410 예루살렘 사람들이 이제 깊은 잠에서 깨어날 수밖에 없는 때가 됐다. 그들을 깨우는 소리가 들리기 때문이다. 예수가 성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 p.5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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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총독 빌라도는 군대를 이끌고 입성하여 옛 헤롯 왕궁에 들어가 예루살렘을 장악한다. 여리고에서 예수는 메시아를 통한 구원이 아니라 가장 낮은 곳으로 흐르는 하느님의 사랑을 가르친다. 가혹하게 수탈하는 로마제국과 로마에 협력하며 지배자로 군림하는 예루살렘 성전의 속박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면서 제자들 숫자는 점점 불어나지만, 그의 가르침을 온전히 이해하는 이는 막달라 마리아뿐이다. 한편 예루살렘에서는 로마총독, 예루살렘 성전, 갈릴리 분봉왕 안티파스가 예수를 제거할 명분을 차곡차곡 준비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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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 가장 인간적인 예수를 21세기 소설로 만나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오!” 이 소설 속 예수의 선언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오랜 통념을 뒤엎는 충격적인 대사다. 이 소설은 ‘신이 아닌, 인간 예수는 정녕 어떤 사람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가장 인상적인 답을 내놓는다. 종교적 시선에서 벗어나 당대 사회와의 역동 속에서 다시 본 예수는 다름 아닌 혁명가,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 했던 사람이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2000년 전의 이스라엘 하층민 가정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사회의 부조리에 눈떠 자신의 길에 대해 고뇌하며 지배체제에 맞서고 마침내 스러지기까지를, 고고학에서부터 새로운 성서연구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바탕에 둔 치밀한 고증과 소설적 상상력으로 복원해냈다. 성서에 기록된 행적만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한 혁명가의 뜨거운 투쟁과 좌절의 과정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생생히 담아냄으로써 예수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되살아난다. 거대한 체제 대 고독한 인간, 숨 막히는 긴장과 치열한 대결의 드라마 예수의 처형 전 마지막 일주일을 배경으로 하는 이 전 5권의 대작에는 체제를 부정하는 예수와 체제를 수호하려는 지배세력 간 스펙터클한 대결이 담겼다.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제국과 그에 협력하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 예수의 가르침은 용인될 수 없는 ‘불온한’ 것이었고, 따라서 예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도 그 체제하에서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예수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하며, 예수를 이해하는 제자는 성서에 제자로 기록되지 않은 막달라 마리아뿐이다. 따라서 예수는 가장 고독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예수의 반대편에서 로마총독 빌라도, 갈릴리 분봉왕 안티파스와 그의 심복 알렉산더,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 가야바와 같은 지배세력이 제자 무리들 중 첩자를 잠입시켜 예수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준비한다. 예수는 자신을 기다릴 결말을 알면서도 묵묵히 그에 맞서 자신의 길을 간다. 그 시작을 알리는 1, 2권은 예수를 향하는 덫이 점점 조여 오는 과정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이처럼 작가가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 이 절박하고 치열한 대립구도는 독자를 순식간에 작품 속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2000년을 뛰어넘어 오늘의 삶과 사람의 길을 묻다 진보적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작가가 오랜 세월 참된 신앙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해 고민해온 흔적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겼다. 역사와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이 곳곳에서 빛난다. 지배구조의 억압과 수탈, 대중 조작에 대한 고발은 정곡을 찌를 듯 날카롭고 매우 시의적이어서, 자연스럽게 독자 역시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소설 속 예수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과 싸웠던 그 여정에 독자 역시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와 같은 문제의식을 지녔으면서도 다른 길을 걷는 예수의 친구 히스기야를 보면서, 예수에게 사회적 상처의 치유를 받는 소외된 이들을 보면서, 또 예수에게 감화되었으면서도 세속적이고도 인간적인 욕망을 어쩌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독자는 사회와 자신이 맺어온 관계, 그리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이처럼 소설 속 예수와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독자는 오늘의 세상을 성찰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 새 세상에 대한 예수의 문제의식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구상부터 출간까지 15년, 혼신의 힘을 다한 역작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강렬한 문체에서 작가의 원숙미가 엿보이는데, 놀랍게도 작가의 첫 작품이다. 작가는 전 5권의 이 대하소설이 어떤 약속에서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실제 2005년 이후 고고학부터 신학까지 접근가능한 모든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전 예수의 삶을 소설로 풀어낸 작품이 출간되기까지 총 15년이 걸렸다. 작가의 말 이 글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약속이 4년 동안에 걸쳐 이 글을 쓰도록 저를 이끌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4년 전 어느 날, 우르르 몰려든 손주들, 만 7살, 6살, 5살짜리 손녀들과 3살 된 손자가 한입으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컴퓨터로 뭐 하세요?” / “너희들이 크면 읽을 글을 쓴다.” “왜요?” / “약속이니까….” / “누구하고 무슨 약속했어요?” “그분하고…. 내가 만난 그분이 나보고 그분 뜻을 깨달았으면 그렇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그렇게 살 수 없었거든? 그래서 ‘제가 글을 쓰는 것으로 눈감아 주십시오’ 그렇게 부탁했지.” “그래서 허락받으셨어요?’ / “그냥 웃으시더라.” “그분 어디 사세요?” / “2천 년 전에 멀리 저쪽에 사셨던 분이다.” / “아하!” 손주들은 더 묻지 않고 ‘아하! 아하!’ 하면서 고개만 끄떡였습니다. 약속이니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2천 년 전 저쪽’에 살았던 분을 만났다는 말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실제 있으리라고 믿는 나이였으니까요. 2005년부터 자료를 모으고 그 자료에 빠져 세월을 보내다가, 2016년 5월, 저에게 의미 있는 어느 날부터 실제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2천 년 전의 그 땅과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살아가던 시대의 문제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호소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언어로 번역해야 했습니다. 그때 거기 살던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왜냐면, 지금 우리는 깊은 산에서 시작한 강물이 흘러내린 하구에 살기 때문입니다. (중략)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 오늘날 아무 의미 없는, 다만 과거의 옛일이었다면 제가 그 일을 더듬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붙잡고 살아가던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제라서 이 글을 썼습니다. 우리가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때 거기 살았더라도, 그분이 2천 년 후에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 결말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인류가 안고 살아가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기술에는 모두 동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 앞에 서면, 대답하는 사람의 인생관과 철학, 사상에 따라 다른 대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라는 질문에 대해 오래전에 주어졌던 명확한 대답 대신, 저와 함께 각자의 대답을 찾으러 떠나시기를 권합니다. - 서문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