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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인간적인 예수를 만나다
구상부터 출간까지 15년, 혁명가 예수의 고독한 투쟁을 그린 대하 장편. 작가는 광범위하고 심층적인 취재를 바탕으로 2,000년 전 이스라엘의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현실을 오늘의 눈높이에서 서술한다. 구원의 메시아가 아닌 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로서의 예수를 만날 수 있는 책.
2020.05.04.
소설/시 PD 박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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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등장인물 소개 제1장 어둠의 날갯짓 제2장 제국의 독수리 제3장 흔들리는 성전 제4장 두 운명의 갈림길 제5장 세상 가장 낮은 곳을 향해 이스라엘 연표 |
尹錫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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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깨달았다. 앞에 앉아 있는 예수, 어릴 적 동무였고, 인생길의 친구였고 아직도 친구지만 그는 이미 폭력으로 꺾을 수 없는 세상에 들어간 사람, 폭력보다 더 깊고 큰 무엇을 가진 사람이다. 제국이 가진 것이 폭력뿐이라면 제국도 그를 멈출 수 없으리라고 느껴진다.
--- p.317 예수는 두 갈래 길에서 이쪽 길을 걸었고, 히스기야는 저쪽 길을 걸었을 뿐이었다. 그건 아마 갈림길에 이른 시간이 서로 달랐기 때문이리라. 그의 때였다면 예수도 히스기야의 길을 걷고, 예수의 때였다면 그도 예수의 길을 걸었음에 틀림없다. --- p.324 눈앞에 서 있는 제국은 로마지만 예수의 눈에는 고대로부터 이어져온 수많은 제국들이 보였다. 세상을 삼킬 만큼 커다란 입과 오로지 한 가지만 바라보는 외눈박이의 얼굴을 한 제국이었다. --- p.408 예수가 베푸는 치료는 다른 의사들의 치료와 달랐다. 병에 따른 증상을 치료한 것이 아니고, 병에 따라붙었던 사회적 소외, 배제를 해소해준 치유였다. 병자를 배제했던 사회적 관계를 바로잡아주고 회복시키는 일이었다. --- p.417 예수의 다정한 한 마디가 삭개오를 무너뜨렸다. 그가 살아온 삶 전체를 꿰뚫어 본 위로였다. 세상에 슬픔과 고통이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누구에게나 여린 속살이 있게 마련이다. 속살은 누구의 살이든 따뜻할 뿐이다. 속살은 상처받기 쉽고, 가장 민감하게 아픔을 느낀다. 속살을 내보인 사람은 따뜻한 위로의 말을 들으면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다. 비록 단단한 껍질을 쓰고 있었더라도. --- p.422 “누군가를 꼭 메시아로 부르고 싶다면 여러분 모두 메시아입니다.” 숨이 턱 막혔다. 시몬이, 안드레와 야고보가, 요한이, 그리고 집주인 삭개오, 심지어 여자인 마리아까지 메시아로 부를 수 있다니, 그건 세상이 뒤집어졌다는 얘기다. 뜨거운 방안 열기에 취한 듯 모두 정신이 몽롱했다. --- p.4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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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 년 전, 유대의 해방명절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한밤중 예루살렘 성전과 갈릴리의 분봉왕이 보낸 사자들, 그리고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 위수대장까지 로마총독 빌라도의 군영으로 찾아와 예수의 위험성을 경고한다. 한편, 갈릴리에서 제자들을 이끌고 내려온 예수는 여리고에 머물면서 다음 날 예루살렘 입성을 준비한다. 그가 메시아이기를 기대했던 제자들 앞에서 예수는 뜻밖에 ‘나는 메시아가 아니오’라고 선언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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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세상을 꿈꾼 혁명가, 가장 인간적인 예수를 21세기 소설로 만나다
“나는 메시아가 아니오!” 이 소설 속 예수의 선언이다. 오늘날 기독교 신앙의 오랜 통념을 뒤엎는 충격적인 대사다. 이 소설은 ‘신이 아닌, 인간 예수는 정녕 어떤 사람인가’라는 오래된 질문에 가장 인상적인 답을 내놓는다. 종교적 시선에서 벗어나 당대 사회와의 역동 속에서 다시 본 예수는 다름 아닌 혁명가,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 세상을 바꾸려 했던 사람이다.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2000년 전의 이스라엘 하층민 가정에서 태어난 한 사람이 사회의 부조리에 눈떠 자신의 길에 대해 고뇌하며 지배체제에 맞서고 마침내 스러지기까지를, 고고학에서부터 새로운 성서연구에 이르기까지 방대한 자료를 바탕에 둔 치밀한 고증과 소설적 상상력으로 복원해냈다. 성서에 기록된 행적만으로는 읽어낼 수 없는, 한 혁명가의 뜨거운 투쟁과 좌절의 과정을 소설이라는 형식으로 생생히 담아냄으로써 예수는 가장 인간다운 인간으로 되살아난다. 거대한 체제 대 고독한 인간, 숨 막히는 긴장과 치열한 대결의 드라마 예수의 처형 전 마지막 일주일을 배경으로 하는 이 전 5권의 대작에는 체제를 부정하는 예수와 체제를 수호하려는 지배세력 간 스펙터클한 대결이 담겼다. 이스라엘을 지배하는 로마제국과 그에 협력하는 예루살렘 성전에 있어 예수의 가르침은 용인될 수 없는 ‘불온한’ 것이었고, 따라서 예수는 위험한 인물이었다. 예수를 따르는 제자들조차도 그 체제하에서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예수의 뜻을 진정으로 이해하지는 못하며, 예수를 이해하는 제자는 성서에 제자로 기록되지 않은 막달라 마리아뿐이다. 따라서 예수는 가장 고독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예수의 반대편에서 로마총독 빌라도, 갈릴리 분봉왕 안티파스와 그의 심복 알렉산더, 예루살렘 성전 대제사장 가야바와 같은 지배세력이 제자 무리들 중 첩자를 잠입시켜 예수를 제거하기 위한 음모를 준비한다. 예수는 자신을 기다릴 결말을 알면서도 묵묵히 그에 맞서 자신의 길을 간다. 그 시작을 알리는 1, 2권은 예수를 향하는 덫이 점점 조여 오는 과정이어서 독자로 하여금 긴장의 끈을 늦출 수 없게 한다. 이처럼 작가가 능수능란한 스토리텔링으로 풀어낸 이 절박하고 치열한 대립구도는 독자를 순식간에 작품 속의 세계로 빨아들인다. 2000년을 뛰어넘어 오늘의 삶과 사람의 길을 묻다 진보적 신학에 깊은 관심을 가진 작가가 오랜 세월 참된 신앙과 더불어 사는 세상에 대해 고민해온 흔적이 소설에 고스란히 담겼다. 역사와 삶에 대한 작가의 깊은 통찰이 곳곳에서 빛난다. 지배구조의 억압과 수탈, 대중 조작에 대한 고발은 정곡을 찌를 듯 날카롭고 매우 시의적이어서, 자연스럽게 독자 역시 세상에 대해 질문을 던지게 된다. 소설 속 예수가 자신이 살아가는 세상에 대해 의문점을 가지고, 그에 대한 나름의 답, ‘낮은 곳으로 향하는 사랑’을 실천하며 세상과 싸웠던 그 여정에 독자 역시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와 같은 문제의식을 지녔으면서도 다른 길을 걷는 예수의 친구 히스기야를 보면서, 예수에게 사회적 상처의 치유를 받는 소외된 이들을 보면서, 또 예수에게 감화되었으면서도 세속적이고도 인간적인 욕망을 어쩌지 못하는 제자들을 보면서 독자는 사회와 자신이 맺어온 관계, 그리고 자신의 삶의 태도를 되돌아보게 된다. 이처럼 소설 속 예수와 등장인물들의 삶을 통해 독자는 오늘의 세상을 성찰하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게 된다. 새 세상에 대한 예수의 문제의식은 시대를 초월하기 때문이다. 구상부터 출간까지 15년, 혼신의 힘을 다한 역작 탄탄한 스토리텔링과 강렬한 문체에서 작가의 원숙미가 엿보이는데, 놀랍게도 작가의 첫 작품이다. 작가는 전 5권의 이 대하소설이 어떤 약속에서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설을 쓰겠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고 실제 2005년 이후 고고학부터 신학까지 접근가능한 모든 자료를 수집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0년 전 예수의 삶을 소설로 풀어낸 작품이 출간되기까지 총 15년이 걸렸다. 작가의 말 이 글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약속이 4년 동안에 걸쳐 이 글을 쓰도록 저를 이끌었습니다. 글을 쓰기 시작한 4년 전 어느 날, 우르르 몰려든 손주들, 만 7살, 6살, 5살짜리 손녀들과 3살 된 손자가 한입으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컴퓨터로 뭐 하세요?” / “너희들이 크면 읽을 글을 쓴다.” “왜요?” / “약속이니까….” / “누구하고 무슨 약속했어요?” “그분하고…. 내가 만난 그분이 나보고 그분 뜻을 깨달았으면 그렇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셨는데…, 내가 그렇게 살 수 없었거든? 그래서 ‘제가 글을 쓰는 것으로 눈감아 주십시오’ 그렇게 부탁했지.” “그래서 허락받으셨어요?’ / “그냥 웃으시더라.” “그분 어디 사세요?” / “2천 년 전에 멀리 저쪽에 사셨던 분이다.” / “아하!” 손주들은 더 묻지 않고 ‘아하! 아하!’ 하면서 고개만 끄떡였습니다. 약속이니까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나 봅니다. ‘2천 년 전 저쪽’에 살았던 분을 만났다는 말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일이 실제 있으리라고 믿는 나이였으니까요. 2005년부터 자료를 모으고 그 자료에 빠져 세월을 보내다가, 2016년 5월, 저에게 의미 있는 어느 날부터 실제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이 글에 나오는 2천 년 전의 그 땅과 그 사람들이 살아가는 일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이 달랐습니다. 그들의 삶을 이해하고, 그들이 살아가던 시대의 문제를 함께 아파하고, 그들의 호소를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언어로 번역해야 했습니다. 그때 거기 살던 사람의 눈으로 보아야 했습니다. 왜냐면, 지금 우리는 깊은 산에서 시작한 강물이 흘러내린 하구에 살기 때문입니다. (중략) 2천 년 전에 일어났던 일이 오늘날 아무 의미 없는, 다만 과거의 옛일이었다면 제가 그 일을 더듬을 이유가 없습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붙잡고 살아가던 문제들이 오늘날에도 여전히 문제라서 이 글을 썼습니다. 우리가 2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때 거기 살았더라도, 그분이 2천 년 후에 지금 여기에서 우리와 함께 살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나 그 결말을 익히 알고 있는 이야기를 쓰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인류가 안고 살아가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다는 기술에는 모두 동의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나 ‘왜?’라는 질문 앞에 서면, 대답하는 사람의 인생관과 철학, 사상에 따라 다른 대답이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왜?’라는 질문에 대해 오래전에 주어졌던 명확한 대답 대신, 저와 함께 각자의 대답을 찾으러 떠나시기를 권합니다. - 서문 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