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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빛난다
허무와 무기력의 시대, 서양고전에서 삶의 의미 되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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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 독자에게

1장
선택의 짐
도움이 필요한 누군가를 보았을 뿐 /
선택의 짐 / 선택을 회피하는 첫 번째 방식 /
선택을 회피하는 두 번째 방식 / 상황에 대한 감각 /
프란체스카와 보바리의 차이 /
세익스피어와 데카르트가 던진 질문 /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은 허용된다”

2장
우리시대의 허무주의
탄광의 카나리아 / 월러스와 길버트가 글을 쓴 이유 /
가장 지루한 것들에 매달리기 / 권태 대처법 /
“오늘은 오늘 일만” / 생각의 통제 /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비결? /아무도 완수할 수 없는 과제 /
너무 자유롭기에 오히려 불행한 / 태양을 삼키라는 요구

3장
신들로 가득한 세상 - 호메로스의 세계
호메로스가 헬레네를 숭배한 까닭 / 포르투나 /
행운인가 보살핌인가 / 현대판 오디세우스 /
감사, 실존의 느낌 / 희생의례의 두 가지 기능 /
잠은 성스럽다 / 카리스마 / ‘입스’의 늪 /
그들이 만신전을 세운 이유 /
“경이가 우리를 사로잡는군요”

4장
유일신의 등장 - 아이스킬로스에서 아우구스티누스까지
역사를 읽는 몇 가지 시각 / 오레스테이아 3부작 /
복수의 여신들 / 애국주의, 일신주의의 또 다른 얼굴 /
예술작품의 초점조절 기능 / 해설자와 재설정자 /
예수, 최초의 재설정자 / 바울, 예수의 해설자 /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민

5장
자율성의 매력과 위험 - 단테에서 칸트까지
현상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기 / 단테의 두 스승 /
지옥의 요새 / 단테식 자유의지 /
베아트리체에 대한 사랑에서 신에 대한 사랑으로 /
중세식 허무주의 / 살로 만들어진 말씀 /
의미의 할당자 / 칸트와 자율적 주체 개념

6장
광신주의와 다신주의 사이 - 멜빌의 ‘악마적 예술’
사악한 책 / 악마적인, 그러나 순진무구한 /
물보라 여인숙의 그림 / 이슈메일의 변덕 / 식인종 퀴케그 /
가면의 뒤 / 에이해브의 일신주의 /
고래에게 얼굴이 없는 이유 / 사랑의 공동체적 경험 /
흰색의 공포 / 신의 베틀 소리 /
광기의 두 가지 유형 / 우주는 우리에게 무관심하다 /
구원의 실마리 / 비밀스런 모토

7장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
루 게릭 / 경기장에 강림한 신성 /
퓌시스의 반짝임 / 야누스의 얼굴 /
스킬라와 카리브리스 사이 / 장인의 포이에시스 /
테크놀로지, 현대 세계의 공식 /
메타 포이에시스, 적시에 성스러움을 얻는 기술 /
우리 시대의 성스러움

에필로그: 빛나는 모든 것들


옮긴이 해설: 허무주의 시대에 삶의 의미 찾기

저자 소개 3

휴버트 드레이퍼스

관심작가 알림신청
 

Hubert Dreyfus

미국 현대철학자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 현상학과 실존주의 철학 연구로 유명하며, 특히 하이데거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 “드라이데거”라는 영예로운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60~68년까지 MIT에서, 1968년 이후에는 캘리포니아대(버클리)에서 40년 넘게 철학과 문학을 가르쳤다. 하이데거 외에 미셸 푸코, 메를로-퐁티 철학의 선구적인 해석자로 평가되며, 인공지능에 대한 비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고전적 저작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과 『컴퓨터가 여전히 할 수 없는 것』은 현대 기술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비판서로 평
미국 현대철학자 가운데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 현상학과 실존주의 철학 연구로 유명하며, 특히 하이데거에 대한 탁월한 해석으로 “드라이데거”라는 영예로운 별칭을 얻기도 했다. 하버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60~68년까지 MIT에서, 1968년 이후에는 캘리포니아대(버클리)에서 40년 넘게 철학과 문학을 가르쳤다. 하이데거 외에 미셸 푸코, 메를로-퐁티 철학의 선구적인 해석자로 평가되며, 인공지능에 대한 비판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그의 고전적 저작 『컴퓨터가 할 수 없는 것』과 『컴퓨터가 여전히 할 수 없는 것』은 현대 기술에 대한 가장 깊이 있는 비판서로 평가받으며 세계 12개국 언어로 번역된 바 있다. 말년에는 찰스 테일러와 공저로 쓴 『실재론의 회복』으로 또 한 번 큰 주목을 받았다. 미국 예술과학아카데미 정회원이자 구겐하임 재단 특별회원, 국립과학재단과 국립인문학기금의 수상자였으며, 네덜란드 에라스무스 대학에서 명예학위를 받기도 했다. 2017년 88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휴버트 드레이퍼스의 다른 상품

숀 도런스 켈리

관심작가 알림신청
 

Sean Dorrance Kelly

하버드대 철학교수이자 학과장. ‘마음, 두뇌, 행동 연구를 위한 하버드 학제간 연구회’ 의장이기도 하다. 스탠퍼드와 프린스턴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쳤고,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콜 노르말 쉬페리외르) 방문교수를 거쳤다. ‘마음’ 문제에 관한 심도 깊은 연구로 유명하며, 프랑스와 독일의 현상학 철학에 대한 중요한 해석자로 평가받고 있다. 구겐하임 재단과 미국 국립과학재단, 국립인문학기금, 제임스맥도넬 재단에서 수상을 하거나 회원으로 있다.

숀 도런스 켈리의 다른 상품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대 유럽철학과 미학이 주요 전공 분야이다. 서양 예술과 철학의 근본 정조인 ‘멜랑콜리’를 연구하고 있으며, 생물학과 철학의 창조적 접점 찾기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울산대학교 철학상담학과에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철학자의 사랑법』 『멜랑콜리아: 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 미학: 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 『철학의 모비딕: 예술, 존재,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 『시는 나의 닻이다』(공저)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공저)가 있고, 『미학적 힘: 미학적 인간학의 근본개념』 『마르틴 하이데거, 너무나 근본적인』 등을 우리말
하이데거를 비롯한 현대 유럽철학과 미학이 주요 전공 분야이다. 서양 예술과 철학의 근본 정조인 ‘멜랑콜리’를 연구하고 있으며, 생물학과 철학의 창조적 접점 찾기에도 관심을 쏟고 있다. 현재 울산대학교 철학상담학과에 재직 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철학자의 사랑법』 『멜랑콜리아: 서양문화의 근원적 파토스』 『멜랑콜리 미학: 사랑과 죽음 그리고 예술』 『철학의 모비딕: 예술, 존재, 하이데거』 『하이데거의 사이-예술론』 『시는 나의 닻이다』(공저) 『미생물이 플라톤을 만났을 때』(공저)가 있고, 『미학적 힘: 미학적 인간학의 근본개념』 『마르틴 하이데거, 너무나 근본적인』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김동규의 다른 상품

품목정보

발행일
2013년 06월 27일
쪽수, 무게, 크기
424쪽 | 572g | 146*210*30mm
ISBN13
9788997186327

만든이 코멘트

안녕하세요 이 책의 역자입니다.
2013-08-29
어린 아이의 단계를 지나 성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이 자기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뼈아픈 자각을 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는 청춘은 아파하고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책에는 직/간접적으로 청춘을 위한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메시지가 있습니다. 저는 이 메시지를 미래의 딸아이에게 전해주고 싶어서 이 책을 번역했습니다. 첫째, 세상이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라. 그러면 이전보다 더 행복해질 것이다. 둘째, 인생살이는 허무할 수 있다. 그 허무를 회피하지도 허무에 말려들지도 말고, 담담히 끈기있게 응시하라. 그러면 언젠가 빛나는 의미가 피어오를 것이다. 셋째, 항상 감사해라. 네 혼자만의 힘으로 이룬 것은 세상에 아무 것도 없으니까. 넷째 열려 있어라. 폐쇄된 자기 안에 갇혀 있지 말고, 주변의 작은 일에도 반응할 수 있도록 항시 열려 있어라. 그러면 모든 것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다섯째,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들은 결국 ‘불가능한 사랑’ 속에서만 완성된다. 포기하지말고 그런 사랑에 너 자신을 길들여라.

예스24 리뷰

빛나는 모든 것 가운데
도서1팀 박숙경 (beblue84@yes24.com)
2013.08.07.
언제나 떠올려 보면 ㅂ 의 얼굴은 유난히 밝았다. 반듯하긴 했지만 특별하게 예쁜 얼굴은 아니었고, 늘 웃고만 있던 것도 아닌데, 그녀와 함께 있으면 늘 기분이 환해졌다. 나를 비롯한 또래 대부분이 비슷한 생활 환경에서 고만고만한 고민 사이에 있었으니 특출난 구김살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을 생각해볼 때, 그녀의 밝음은 분명 특별한 존재감을 가진 것이었다. 아직 평준화가 되기 전, 입학하기까지도 절차가 많았고, 입학 후에도 무엇보다 성적이 중요했던 분위기 속에서 나는 참 칙칙했다. 그렇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대부분 나랑 비슷했기 때문에 별스런 일로 여기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그 와중에 또렷이 빛나는 ㅂ 은, 정말 부럽기도 하고 불편하기도 한 친구였다. 그때는 ㅂ 이 다른 존재이기만 했지, 그게 왜일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적이 없다.

ㅂ 이 공부를 하는 이유는 수학 선생님이 되기 위해서였다. 눈에 띄게 공부에만 매달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어떤 시험이든 준비나 결과에 대한 원인과 분석은 대부분 선생님이 되기 위해, 로 초점이 맞춰졌다. 실습을 왔던 교생 선생님과 지속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은 것도 그녀가 유일했고, 봉사활동으로는 저소득층 아이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가끔 모르는 문제를 들고 가면 당시 우리 학년을 맡고 있던 세 명의 수학 선생님의 성대모사를 번갈아가며 해주는 재주꾼이기도 했다. ㅂ 을 아는 누구든, 그녀가 선생님이 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녀에 한해서는 ‘어느 대학’에 가느냐는 것이 이미 논외의 문제였다. 대학에 가기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학교에서 목표한 몇 개의 간판 대학에 안착하기 위해 지겨워도, 힘들어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학생들 모두가 아무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 중 몇 명쯤은 자신이 그리는 그럴듯한 미래가 있었을 것이고, 어렸을 때부터 꿈꿔온 목표를 가지고 있었겠지. 하지만 당시 겨우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ㅂ 과 같이 지속적으로, 일상적으로 자신의 목표를 삶과 같이 두는 경우를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겨우 고등학생이라서’는 아닌 것 같다. 그 후로 십 몇 년, 더 많은 사람들을 겪어온 지금에 와서도 돌이켜보면 그렇게 자신의 되고 싶은 ‘무엇’을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온 경우는 흔하지 않더라. 어느 것이 옳다, 그르다 혹은 좋다, 나쁘다를 말하자는 것은 물론 아니다. ‘무엇’이 되고 싶다는 꿈이, 꼭 ‘무엇’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니까. 다만 '한 우물을 파는 것'이 미련하다고 말해지고, 한 두 가지 장기가 아니라 여러 방면에서 뛰어난 멀티형 인재를 바라는 분위기 속에서, 사실 하나만 잘 하기도 힘들었던 우리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삶의 정조를 자연스럽게 그곳으로 흐르도록 하는 ㅂ 에게서, 말하자면 '퓌시스'의 몇몇 순간들을 목격한 것이다. 당연히 그 순간 우리는 그게 뭔지 몰랐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게 정말 가치 있었던 이유는, 그것이 한 순간의 반짝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필요한 각각의 단계에 알맞은 충분한 노력을 들이고 실패도 과정의 일부로 만들어 결국은 원하는 바를 성취해 냈다는 데 있다.

지원했던 대학에 마지막 추가 합격 하기까지의 떨리던 나날들, 우리가 졸업한 학교에서 교생실습을 하게 됬다던 들뜬 목소리, 임용고시가 쉽지 않았고, 그래서 한 때는 '가르치는 것'만이 자기의 몫이라고 생각해 입시 학원에서 일했던 시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선생님'이 할 수 있는 일에 미련을 버리지 못해서 결국은 다시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기까지. 한 때 옆에서 지켜봤고, 이제는 간간히 주고 받는 소식으로만 듣는 ㅂ 의 이야기는 여전히 빛나던 그 때의 얼굴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한다.

하지만 그 빛나는 얼굴을 기억하는건 여기서 나뿐일테고(당연히). 마치 잘 다듬은 위인전처럼 줄기만 뽑아낸 ㅂ 의 이야기가 넘쳐나는 엄친아, 엄친딸의 자기 계발(자랑) 스토리와 별다를 바 없이 느껴지는 사람이라면, - 물론 이건 글쓴이의 탓이 크겠지만 - 대신 『모든 것은 빛난다』를 읽어봐도 좋을 듯싶다. 꽤 재미있는 조합의 이 두 저자는 불안과 무기력이 넘쳐나는 이 시대, 호메로스가 보여주는 신들의 세계가 보여주는 삶의 성스러움은 물론, 아가페적 사랑을 통해 세계를 드러내는 예수적 방식, 혹은 자신의 욕망을 충분히 단련함으로써 우리 안에서 이를 조율할 수 있다고 믿었던 단테적 방식을 통해서도 세상은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중세 서구 기독교 세계에서 한 사람의 정체성은 신을 통해 결정되었다. 이것은 누군가 입증해낸 신념 체계도 아니고, 한 인간으로서 받아들이거나 거부할 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도 아니었다. 하지만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를 문제로 삼았던 1600년경, 그리고 그로부터 대략 한 세대쯤 지나 데카르트가 우리가 알고 있다고 믿는 모든 것을 의심해야 한다고 주장하기에 이르렀을 때, 더 이상 실존의 문제는 중세적 믿음들 만으로는 답이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신이 죽었다'고 말한 니체를 거쳐 온 현대인들은, 실존의 기본 문제들에 대해 이미 답을 가지고 있었던 문화와는 너무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다. 실존적 물음에 처해 있다는 것 자체가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모던타임즈 이래로 더 이상 놀랍지도 않은 '개인의 부품화', '인간의 수단화'는 결국 그러한 실존적 물음을 통해 답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뭐 꼭 그렇게 거창한 단어를 쓰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는 충분히 어제 같은 오늘을 살았고, 오늘 같은 내일을 살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러한 ‘실존’의 의미들을 하나로 축소하거나 어느 쪽으로 편향되게 하지 않는다는 데서 주목할만한 이 책은 다신주의polytheism를 내포한다(물론 여기서 ‘다신’이라고 하는 용어가 종교적으로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이들은 개인 중심, 주체 중심을 경계하고 '신'으로 표현되는 타자 내지 자연과 함께 다수의 주체가 어우러지는 과정 속에 삶의 의미가 있다고 믿고 있다. 타인을 위해 망설임 없이 위험을 무릅쓰는 행동, 경기장에서 하나가 되어 환호하는 기쁨,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를 마신 즐거움, 그리고 한 소녀가 자신의 꿈을 따라 가는 여정까지, 세상의 의미 있는 것들은 이미 각자의 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단지 우리가 스스로를 자율적인 주체라 믿고 이들의 부름으로부터 자신을 닫아버림으써 ‘신들이 사라진 언덕’에 내던져진 것이다. 추방된 것은 ‘우리’가 아닌 ‘신’들 이기에, 아마도 지금 필요한 물음은 ‘신이 왜 인간을 저버렸는지’가 아니라 ‘왜 인간은 신으로부터 등을 돌렸는가’가 아닐까. 다시금 무수한 ‘신’들이 던지는 성스러운 순간을 발견할 때, 우리는 빛나는 모든 것들 가운데 자리할 것이다.

책 속으로

많은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가 현대의 삶이 이룩한 위대한 진보의 표식 가운데 하나라고 지적할 것이다. 그리고 확실히 이런 견해에는 어느 정도 진실이 담겨 있다. 비참한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선택의 여지도 없기 때문에 어떤 종류의 음식을 먹을지에 대해서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직업 선택의 자유란 것도 극심한 경제 불황으로 일자리가 없을 때는 의미가 없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특징은 우리들 대다수에게 그 이전보다 선택―어떤 사람이 될지, 어떻게 행동할지, 누구 줄에 설지―의 폭이 더 넓어졌다는 바로 그 점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이런 종류의 실존적 선택에 직면했을 때, 저것 아닌 ‘이것’을 선택하게끔 해주는 참다운 동기가 없다는 점에 있다.--- p.20

19세기 이래로 서양의 역사는 어쨌건 진보에 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와 이후 시대야말로 이런 발전의 정점에 이른 시대라고 배워왔다. 자유의 자기충족성, 이성의 투명성,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세계의 안정성, 이 모든 것이 역사의 진보를 가리킨다고 배워왔다. 그러나 이 이야기 반대편에는 또 다른 이야기도 존재한다. 즉 현재 우리가 처해 있는 탈마법화된 상태야말로 끝없는 쇠퇴와 상실의 결과라고 보는 시각이다. 이 시각은 탈마법화된 오늘의 세계를 거부하고 과거의 마법적인 시대를 지지한다. 자유의 대가로 안게 된 홀로서기의 짐, 이성의 거침없는 행진이 닦아놓은 무미건조하고도 무자비한 길, 남김없이 설명되고 통제되는 세계의 생기 없는 얼굴, 이 모든 것이 역사의 퇴보를 가리킨다는 시각이다. 그러나 그 어떤 이야기도 옳지 않다면? 즉 경이와 매혹이 저 멀리로 사라졌다는 생각이 현대 세계를 오해한 결과라면?--- p.161-162

우주의 궁극적 스토리는 우주가 우리에게 무관심하다는 데 있지 않다. 비록 에이해브가 만난 모비 딕처럼 우리에게 무관심한 신도 있지만 말이다. 어린 선원 핍이 외롭게 버려진 미아처럼 바다에 조난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떠올렸던 생각, 즉 세상은 “그의 신처럼 냉담하다”는 생각을 상기해보자. 하지만 그런 신과 달리 세상에는 또 다른 신들, 즉 즐겁고 성스러운 신들과 사악하고 복수심에 차 있는 신들도 있다. 우주는 번갈아가며 이런 신들의 모습을 띤다. 우주가 그 신들 가운데 궁극적으로 어떤 신이냐고 묻는다면, 어떤 하나의 신도 아니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신들의 만신전(萬神殿)일 것이다.--- p.320

오늘날의 역사 단계에서는 특별한 삶의 기술이 필요하다. 이 기술은 우리에게 있는 성스러움의 양태들 각각을 공평하게 대우하는 기술이다. 세계가 지닌 다차원적인 성스러움들 속에서 사는 장인은 어떤 순간에 전자레인지가 필요하고 어떤 순간에 감사의 축제가 필요한지를 반성 없이 즉각 이해할 수 있다. 그는 거칠고 열광적인 스포츠의 신들에게 자신을 내맡기는 동시에, 광적이고 위험한 선동가의 웅변에 이끌리지 않도록 구별하는 기술도 습득하고 있다. 그의 삶은 빛나는 사물들에 조율되어 있으며, 따라서 신들이 돌아올 수 있는 장소를 열어두고 있다. (…) 하지만 고립적이고 자율적인 주체로서의 자기 이해는 신들을 추방하는 결과를 빚어왔다. 세계 안에 이미 존재하는 성스러운 것들에 대한 우리의 감수성을 덮거나 막아왔다는 얘기다. 신들은 여전히 우리를 부르고 있음에도, 우리가 듣기를 멈춰버린 것이다.

--- pp.374-375

출판사 리뷰

“아마도 이 책은 올해 최고의 책이 될 것이다.” - 《뉴욕타임스》

-삶의 의미와 무의미의 문제

『모든 것은 빛난다』는 우리들 현대인의 실존 상황, 우리의 문화적 위기를 저 어두컴컴한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끄집어내어 성찰한 책이다. 튼튼하게 고정된 닻 하나 없이 부유하는 우리의 일상, 우리들이 매일처럼 겪고 있는 삶의 불안과 무기력증과 허무―즉 삶의 의미와 무의미의 문제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책이다. 저자들이 던지고 있는 질문은 단 하나다. 우리들이 아무런 의심 없이 찬양하는 “개인의 자율성”, “자유로운 존재로서의 자아”는 우리 삶에 무슨 의미를 가져다주는가? 이 질문은 정말 충격적이다. 개인이 어떤 외적 강제도 없이 스스로를 책임지고 자유와 행복을 구가할 수 있다는 생각은 데카르트와 칸트 이래, 그리고 프랑스 인권선언 이후 인류의 신성불가침한 이상 아닌가?

저자들은 아니라고 한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허무와 우울의 시대적 병증은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라는 그릇된 신념이 최종적으로 봉착한 지점이라고 한다. 개인으로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책임과 선택의 짐을 오롯이 개인에게 지운 결과라는 것이다. 인간은 자율적 존재이기에 홀로 의미의 원천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삶의 피로감을 넘어 심각한 허무주의, 의미의 상실로 이어진다는 얘기다. 물론 우리가 처한 정치적, 경제적 한계 상황이 개인의 삶을 질식하게 만드는 직접 원인으로 작용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상황이 해소된다고 해서 우리 삶이 회생할 것인가? 또다시 그런 상황이 찾아올 때마다 우리 삶은 파탄을 맞이해야 하는가? 이렇게 보면, 성과주의의 피로감을 성공과 성취감이라는 프로작 약물로 마취시키는 사회를 비판한 『피로사회』나 『우리의 노동은 왜 우울한가』의 진단은, 그에 앞서 인간 존재에 대한 근본적 진단을 필요로 하는지도 모르겠다.

-서양 고전에서 읽어내는 우리 존재의 빛

이 책의 저자들은 개인들이 이렇게 살지 않아도 각자가 성스러운 존재로서 충분히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시대가 있었다고 말한다. 저자들은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시작하여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과 단테의 『신곡』, 그리고 허먼 멜빌의 『모비 딕』에 이르기까지 빛나는 서양 고전들을 다시 읽어냄으로써, 어떻게 인간의 삶이 고대의 성스럽고 빛나는 경험 세계로부터 창백하고 우울한 피로 사회로 떨어져버렸는지를 이야기한다. 한 마디로 저자들은, 의미의 다양한 생산지를 하나의 원천으로만 응집시키려 한 서양 사상사의 시도야말로 허무주의의 주범이라고 말한다. 의미의 원천을 초월적인 신의 사랑에서 찾으려 한 중세나, 자율적 개인의 내면에서 찾으려 한 근현대의 시도가 모두 그렇다는 것이다. 저자들은 말한다. 우리가 “자각된 개인” “계몽화된 개인”이라는 내면의 견고한 영웅주의에 취해서 스스로를 꽁꽁 닫지 않는다면, 그리하여 세상이 던져주는 빛들에 대해 열린 존재가 된다면, 성스러움을 다시 회복하고 삶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다고.

지하철 선로에 떨어진 취객을 보고 순간의 망설임조차 없이 뛰어드는 행동, 야구장 관중석에서 하나 되어 환호하는 기쁨, 아침에 정성스럽게 내린 커피 한 잔의 즐거움이 그런 빛들이다. 『모든 것은 빛난다』는 이것을 고대의 다신적(多神的) 사고와 같은 것이라고 설명한다.(‘다신적’이라는 것이 종교적 신을 말하는 것이 아님은 물론이다.) 우리는 세상의 무수한 신들이 던져주는 의미의 순간들을 만끽하고 감사함으로써 성스러운 존재로 살아갈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을 의미의 생산자나 부여자로 보지 말고, 세상이 일으켜 보여주는 의미들의 발견자로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생각만 바꾼다고 해서 저절로 그것이 가능한 것은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매순간 스쳐지나가는 사건들(physis)에 대해 우리의 지성과 신체를 끊임없이 밀착시키고 연마하는 활동(poiesis)을 함으로써, 광포한 감정의 선동이나 차디찬 이성의 명령 어느 한편에만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지키는 기술(meta-poiesis)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7장 참고). 그것이 바로 “모든 것은 빛난다”(All Things Shining)라는 말의 뜻이기도 하다.

내용 소개

1장 선택의 짐 ― 선택의 짐을 회피하는 두 가지 방식

“신이 없다면 모든 것이 허용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말은, 신이 없기에 모든 것을 인간이 책임져야 한다는 무서운 경고의 말로도 읽힌다. 이처럼 오늘날의 우리는 우리 앞에 닥친 모든 일을 스스로 선택하고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하지만 이런 실존적인 선택을 회피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선택 대신 완강한 자기 확신에 취해 있는 인간형이나, 대중오락, SNS, 약물 등에 매달려 자신을 잊는 유형이 그들이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사고현장에서 망설임 없이 자기를 희생하는 사람, 경기장에서 몰아적인 플레이를 행하는 선수처럼 주저 없이 선택을 행하는 영웅적 인간형도 많다. 그러나 어떤 태도를 취하건 선택의 상황 앞에서 주저하고 망설이는 개인의 모습은 지극히 근대적인 현상이다. 그리고 이런 선택의 상황을 회피하지 않고 극한까지 맞서는 사람은 일쑤 허무주의의 늪에 빠지곤 한다.

2장 우리 시대의 허무주의 ― 실존의 과도한 짐은 허무주의를 부른다
자살한 미국의 천재 작가 데이비드 포스터 월러스(David F. Wallace)는 아직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이 없지만, 그런 실존의 상황을 가장 극한까지 감당하려 했던 인물이다. 월러스는 끊임없이 선택을 하고 스스로 의미를 생성해야 하는 오늘날의 반복적인 삶에서도 끝까지 삶의 가치를 추구했고, 그런 과제로부터 주의를 빼앗고 정신을 중독시키는 모든 유혹을 거부하려 했다. 그러나 그러한 과제는 결국 월러스를 자살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그와 달리 『먹고 기도하고 사랑하라』의 저자 엘리자베스 길버트는 ‘의미의 창조자’라는 짐을 개인이 지는 것은 부당하며, 우리는 순수한 은총에 의해서 의미를 획득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둘 중 누구를 택해야 할까?

3장 신들로 가득한 세상 ― 호메로스의 행복했던 세상
호메로스가 『오디세이아』에서 칭송한 인물들은 그런 현대적 실존 상황이 전혀 문제되지 않는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다. 헬레네는 파리스와 연정에 빠져 도망쳤다가 다시 집에 돌아와 아무렇지도 않게 남편의 칭송을 얻는 여인이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사랑의 신 아프로디테와 가정의 신 헤라가 한 인물을 동시에 지배하듯이, 신들이 정해주는 정조(mood)에 자신의 전 존재를 조율(tunning)하며 살았던 사람들의 특징이었고, 그것이야말로 현대의 윤리적 관점으로는 재단할 수 없는 고대의 미덕(arete)이었다. 그들은 그런 신들의 은총에 대해 경이와 감사를 바침으로써 자기 문화에 온몸으로 참여했고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4장 유일신의 등장 ― 기독교가 바꿔놓은 삶의 가치
호메로스 시대의 충만했던 삶은 그리스 전성기인 아이스킬로스의 시대와 초기 기독교를 거치면서 통일적이고 일원론적인 인간 이해로 나아가게 된다. 아이스킬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은 복수와 분노가 지배하던 고대의 원시적 정념들이 공동체의 안녕을 위한 아폴론의 법질서로 수용되는 과정을 보여준 역작이다. 예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대 공동체의 율법 질서를 인간의 내면적 욕망의 문제로 돌림으로써 문화의 획기적인 재설정을 이룬다. 호메로스 시대의 무질서한 정조들은 아이스킬로스의 그리스 문화와 유대 문화를 거치면서 공동체의 법적 질서 안에 포섭되었지만, 다시 예수와 바울이 등장하면서 인간의 내면적 욕망이라는 한 가지 기준만이 인간의 삶을 평가하는 잣대가 된다. 물론 그 욕망은 신에 대한 아가페적인 사랑으로 수렴될 때만 인정될 수 있었으며,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은 개인의 욕망을 신의 사랑과 일치시키려고 한 내면적 투쟁의 기록이었다.

5장 자율성의 매력과 위험 ― 악마의 특징이 인간의 미덕으로 변하다
예수와 바울,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치면서 인간을 이해하는 초점이 된 내면의 욕망 문제는, 육체와 물질로 이루어진 인간의 현세적 삶과 신의 정신적 사랑을 일치시킬 수 없다는 문제에 늘 봉착하곤 했다. 단테에게도 이 문제는 여전히 큰 난제였다. 단테는 『신곡』에서 인간이 자신의 의지에 따라 실존의 상황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을 악마의 특성으로 돌린다. 단테는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제일 운동자’를 신의 특성이라 보고, 신의 사랑의 움직임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자유를 주장하는 개인의 의지를 꽁꽁 얼어붙은 지옥의 것으로 돌린다. 인간의 욕망은 그의 연인 베아트리체에 대한 지순한 사랑을 거쳐 신에 대한 사랑에 이르는 것처럼 신의 은총 안에서만 일치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단테는 이렇게 자율성을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지옥에 가둔 반면, 인간의 의지로써 순수성에 이를 수 있다고 본 마르틴 루터를 거쳐 데카르트와 칸트에 이르면, 자율성은 인간의 가장 존엄한 특징으로 복권된다. 칸트에 이르러서야 비로 인간은 “스스로 세운 도덕 법칙에 따라서만 행동하고 평가될 수 있는 자율적 주체”가 된다.

6장 광신주의와 다신주의 사이 ― 개인 대 신의 싸움
이 책 6장에 이르면 우리는 “의미의 무한한 원천”이라는 자리를 두고 개인과 신이 벌이는 장엄한 투쟁을 볼 수 있다. 멜빌의 『모비 딕』이 바로 그 드라마가 펼쳐지는 장소다. 흰 고래는 무한대의 힘을 감추고 있지만 얼굴은 전혀 보여주지 않는,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같은 존재다. 반면 에이해브 선장은 자신의 다리(자신의 실존)를 물어뜯은 존재를 이해하고 정복함으로써 자신을 의미의 완성자로 세우려는 인물이다. 이런 영웅적 개인과 기독교적 유일신의 싸움은 기독교를 상징하는 배와 선장이 함께 침몰함으로써 파국을 맞는다. 신이자 우주의 비밀인 흰 고래는 여전히 알 수 없는 신비로 남는다. 그러나 『모비 딕』의 화자(話者)인 이슈메일이 있다. 그는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면서 언제든지 자신의 입장을 변화무쌍하게 바꿀 수 있는 위치에 있다. 그에게 고래는 의미의 원천일 수도, 그냥 무심한 우주일 수도 있다. 이슈메일은 유일신의 문화에 오염되지 않은 다양한 문화적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있는 감성의 소유자다. 저자들은 이슈메일에게서 다신적 사고의 가능성을 찾아낸다.

7장 우리 시대의 가치 있는 삶 ― 성스러움을 회복하는 길
이 대단원의 장에서 저자들이 집중하는 것은 다신적 사고가 현대에서 어떻게 가능한가 하는 점이다. 다신적 사고는 우선 퓌시스(physis)라는 세계의 존재방식을 이해하는 데서 출발한다고 한다. ‘자연’이라는 말로 번역되는 그리스어 ‘퓌시스’는 어느 날 피어났다 사라지는, 휙 스쳐가는 사건들을 표현하는 단어였다. 우리는 삶의 순간마다, 즉 야구장에서, 군중집회에서, 일의 몰입에서, 아침 식탁의 향기에서 늘 퓌시스를 경험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퓌시스는 거칠고 일시적인 힘의 형태로 나타나기에 그것만으로는 히틀러의 위험한 선동 같은 데 빠질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포이에시스(poiesis)라는 고도의 양육적인 기술을 갖춰야 한다. 원래 예술적 ‘창작’과 ‘제작’을 의미하는 포이에시스는 장인이 갖춘 기예처럼 숙련되고 안목이 높은 활동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삶에서 마주치는 모든 퓌시스의 계기들을 포이에시스로 함양함으로써 삶의 의미들을 성스럽게 가다듬고 균형감 있게 만드는 메타-포이에시스(meta-poiesis)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 삶의 사건들이 보여주는 구별과 차이에 대해 둔감한 사람은 의미의 구별도 할 수 없으며, 걸어다니는 자동기계와 다름없게 된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의 커피 마시기를 성스러운 의식(儀式)으로 행할 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이 던지는 다신적 의미를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 존재의 성스러움이란 이런 문화적 실천(praxis)들에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서 온다는 것이고, 이것이 허무주의와 무기력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다.

추천평

“허무주의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우리 시대에 삶의 의미를 찾아가는 매혹적인 통찰. 『모든 것은 빛난다』는 ‘축의 시대’ 이래로 전개된 인간?종교?윤리에 대해 근본적인 물음을 제기한다. 이 책은 가장 중요한 이슈들, 오늘날 우리의 삶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이슈들과 정면 승부하고 있다.”
― 찰스 테일러 (철학자, 『세속의 시대』 저자)

“굉장한 책! 지금까지 내가 읽은 책 가운데 가장 놀랍고 가슴 벅차며 아름다운 책이다. 나의 감동을 여러분과, 수천 명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나의 찬사, 아니 이 경외감을 말이다.”
― 찰스 반 도렌 (『지식의 역사』 저자)

“특출하고 영감이 가득한 책. 이 책은 우리 시대의 주요 문제들을 이해할 수 있는 최고의 틀을 제공한다. 어떻게 우리가 과거의 강렬하고도 의미 깊은 삶으로부터 망설임과 무기력의 시대로 넘어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저자들은 서양의 위대한 고전들을 통해 선택과 자율성과 광신주의와 오락중독 등 오늘날의 삶을 잠식하는 문제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오늘의 세계를 만든 고전들에 담겨 있는 불멸의 가치들을 통찰력 있게 파헤친다. 나는 도저히 이 책을 내려놓을 수가 없다.”
바턴 그레고리언 (카네기재단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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