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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셀의 책 중 가장 널리 읽힌 책
‘인기 없는 에세이’라는 역설적인 제목이 붙은 이 책에서 러셀은 간단하고 명쾌하며 위트가 넘친다. 물론 그 바탕엔 뛰어난 학식과 신중한 논리, 그리고 특유의 용기가 탄탄하게 자리잡고 있다. 러셀은 철학과 정치를 넘나들며 인류에게 도움을 주었거나 해를 끼친 사상을 나열하고, 지적인 쓰레기를 개관하는가 하는 등 흥미로운 글들을 매력적인 필치로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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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장 이 모든 게 정치와 무슨 상관인가?
2장 초보자를 위한 철학 3장 인류의 미래 4장 철학자들의 은밀한 속셈 5장 억압받는 자들의 미덕 6장 현대적 정신에 관하여 7장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8장 위대한 스승이 되려면 9장 인류에 도움이 된 관념들 10장 인류에 해를 끼친 관념들 11장 내가 만난 유명인들 12장 스스로 쓴 부고(1937년) |
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B.A.W. 러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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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이나 가치관에 관한 문제는 모두 잠시 미뤄 두기로 하자. 세상에는 순전히 이론적인 문제들, 시간에 침식되지 않은 채 열렬한 관심을 끌어 모으는 문제들이 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과학은 적어도 지금 당장은 답을 제시하지 못한다.
우리는 어떤 의미로든 죽음을 극복할 수 있는가? 극복할 수 있다면 잠시뿐인가, 아니면 영원토록인가? 정신은 물질을 지배할 수 있는가? 아니면 물질이 정신을 완전히 지배하는가? 그도 아니라면 이 둘은 혹시 제한적으로 독립된 것이 아닐까? 우주는 목적을 지니는가? 아니면 필요에 따라 맹목적으로 돌아가는가? 혹시 우주는 무질서한 혼돈일 뿐이고, 우리가 발견했다고 착각하는 자연 법칙들은 그저 질서를 사랑하는 우리 마음이 빚어 낸 환상이 아닐까? 만약 우주적 규모의 계획이라는 것이 있다면, 생명은 우리가 천문학의 힘을 빌려 상상하는 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차지할까? 아니면 생명을 강조하는 자세는 그저 편협한 자만일 뿐일까? 나는 이러한 문제의 답을 알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리라고 믿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러한 문제들을 잊어버리거나 적절한 증거 없이 확실한 답을 얻게 되면, 인류의 삶은 피폐해질 것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 흥미를 유지하고 제시된 답안들을 검증하는 것이 바로 철학의 한 가지 기능이다.--- 「2장 ‘초보자를 위한 철학’」 철학자가 단지 사색만으로 사실을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의 근거는 언어와 언어가 의미하는 대상 사이의 혼돈 외에도 한 가지가 더 있다. 바로 세계가 윤리적으로 만족스러운 것이어야 한다는 확신이다. 《캉디드》에 나오는 팡글로스 박사 같은 낙관주의자는 자기 서재에 앉아 나름의 사고방식에 따라 어떤 식의 우주가 가장 훌륭한지 규명할 수 있다. 또 자기 서재에 머무르는 한, 그는 우주가 그의 윤리적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 예정되었다고 확신할 수도 있다. 숨을 거둘 때까지 영국 철학계의 권위 있는 지도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버나드 보즌켓 또한 그의 저서 《논리학》에서 겉으로는 논리적 토대를 유지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예컨대 근대 유럽 및 그 식민지처럼 발달된 문명을 파괴할 만한 어떤 대재앙이 일어나리라고는 믿기 힘들다.” 이처럼 이른바 ‘사고의 법칙’이 기분 좋은 정치적 귀결을 가져오리라고 믿는 능력은 철학적 편견의 한 지표이다. 과학과 반대로 철학은 일종의 자기주장에서 비롯된다. 이는 곧 우리의 목적은 우주의 목적과 중요한 관계를 가지며, 따라서 길게 보면 모든 사건의 과정이 오롯이 우리의 소망대로 될 수밖에 없다는 신념이다. 과학은 이런 식의 낙관주의를 폐기했지만 또 다른 낙관주의로 끌려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가 지성의 힘으로써 이 세계를 우리의 욕망이 거의 충족되는 곳으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이다. 이는 형이상학적 낙관주의와 반대되는 실용적 낙관주의이다. 나는 이러한 낙관주의가 미래 세대의 눈에 팡글로스 박사의 낙관주의처럼 어리석은 것으로 비치지 않기를 바란다.--- 「4장 ‘철학자들의 은밀한 속셈’」 나는 정부가 행동에 나서서 일반 대중으로 하여금 믿게 할 수 있는 헛소리의 영역에는 한계가 없다고 확신한다. 만약 적절한 규모의 군대와 이들에게 평균보다 나은 급여 및 식사를 제공할 권한이 있다면, 단언컨대 나는 30년 안에 대다수 사람들로 하여금 어떠한 허튼소리도 믿게 할 수 있다. 2 더하기 2는 3이라거나, 물은 뜨거워지면 얼어붙고 차가워지면 끓는다거나, 그 외에도 국가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처럼 보이는 헛소리라면 무엇이든 상관없다. (……) 오로지 최고위층의 공직자들만이 불콰하게 취한 얼굴로 서로의 귀에 대고 이게 다 웬 쓰레기 같은 소리냐고 소곤거릴 것이다. 그러고는 껄껄 웃으며 다시 술잔을 비울 것이다. 오늘날 일부 국가의 정부에서는 이러한 묘사가 결코 풍자에 그치지 않는다.--- 「7장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내가 특별히 경애하는 여성 예언자가 한 명 있다. 1820년 당시 미국 뉴욕 주 북부의 호숫가에 살던 여성이다. 그녀는 수많은 신도들에게 자신이 물 위를 걸을 수 있다고 선언한 다음, 날짜를 정하고 그날 오전 11시에 실제로 보여 주겠노라고 제안했다. 약속한 시간이 되자 독실한 신도 수천 명이 호숫가에 모여들었다. 그녀는 신도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모두 제가 물 위를 걸을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까?” 그들은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믿습니다.” 그녀가 말했다. “그렇다면 굳이 보여 줄 필요가 없겠군요.” 그리하여 신도들은 모두 큰 가르침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돌아갔다. --- 「7장 ‘지적 쓰레기들의 간략한 계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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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 없는’이라는 수식어
책 제목에 관해 한마디. 나는 앞서 발표한 책 《인간의 지식》의 서문에서 내가 전문 철학자들만을 위해 글을 쓰지 않으며, “철학은 본래 지식층 일반의 관심사를 다룬다”라고 적었다. 서평가들은 이 말을 빌미로 나를 꾸짖었다. 그들이 보기에 내 책에는 어려운 내용이 일부 들어 있는데 저런 말로 독자들을 속여 책을 사게 했다는 것이다. 이런 비난을 또다시 마주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므로 고백하건대 이 책에는 보기 드물게 멍청한 열 살배기 아이라면 좀 어렵게 느낄 만한 문장이 몇 군데 들어 있다. 이러한 까닭에 다음의 에세이들이 인기를 끌 만한 글이라고 하기는 힘들 듯싶다. 그렇다면 ‘인기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밖에. - 버트런드 러셀 ‘20세기의 볼테르’ 버트런드 러셀 그리고 《인기 없는 에세이》 ‘우아하고 재치 있는 문장가, 능란하고 섬세한 논객, 성도덕에서 자녀 양육법을 거쳐 외교 정책과 경제 계획에 이르는 여러 문제에 대해 파격적이고 과감한 견 해를 지닌 명백한 진보주의자’ ‘비길 데 없는 지성’ ‘열정적이고 강직한 진보 이념’ ‘러셀은 천박할 수도, 따분할 수도 없다.‘ 195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버트런드 러셀은 이 새로운 책 《인기 없는 에세이》―명백히 잘못 정한 제목임이 밝혀졌다―에서 그만이 할 수 있는 방법으로 독단론의 위험과 어리석음을 파헤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때로는 경박해 보이겠지만, 이 진지한 목적이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엄숙하고 오만한 사람들과 제대로 싸우기 위해서는 엄숙과 오만을 버려야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반어적인 책 제목에 대해서는 “이 책에는 보기 드물게 멍청한 열 살배기 아이라면 좀 어렵게 느낄 만한 문장이 몇 군데 들어 있다. 이러한 까닭에 다음의 에세이들이 인기를 끌 만한 글이라고 하기는 힘들 듯싶다. 그렇다면 ‘인기 없는’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릴 밖에.”라고 설명한다. 그가 남긴 수많은 저작들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도 러셀은 철학자들이 무조건적으로 지켜야 할 세 가지 강령을 과감히 무시한다. 그는 간단하고 명쾌하며 위트가 넘친다. 이 책에서 러셀은 자신에게 세계적인 명성을 안겨준 이전의 책들에서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학식과 신중한 논리, 그리고 특유의 용기를 가지고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룬다. 그는 철학과 정치, 초보자를 위한 철학, 철학의 숨은 동기 등을 논하고, 현대 정신을 지닌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야기하며, 그가 생각하기에 인류에게 도움을 주었거나 해를 끼친 사상을 나열하고, 지적인 쓰레기를 개관하는가 하면, 교사의 기능을 정의하고 인류의 미래를 파고든 뒤, 테니슨, 브라우닝, 글래드스턴, 윌리엄 제임스 등으로부터 아인슈타인과 레닌에 이르기까지 그가 알고 있는 유명인들에 대한 사담을 적기도 한다. 이어 책의 끝에는 1962년 6월 1일 《타임스》에 발표될 자신의 부고 기사를 그 자신이 직접 작성해 수록하고 있다. 그 스스로 작성한 부고에서 그는 자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러셀은 한평생을 천방지축으로 살았지만 그 삶은 시대에 뒤떨어진 방식으로 일관성이 있었고, 이 때문에 우리로 하여금 19세기 초의 귀족 출신 반역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신념은 기묘했으나 그의 행동은 늘 신념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사생활에서 그는 자신의 글에 가시처럼 돋은 신랄함을 전혀 보여 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진솔한 대화 상대이자 인간적 공감 또한 넘치는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친구가 많았으나 거의 모두 그보다 일찍 세상을 등졌다. 하지만 아직 살아 있는 친구들에게 그는 비상하게 오래 산 사람치고 몹시 재미난 인물로 여겨졌는데 여기에는 의심할 것도 없이 그의 변치 않는 건강이 큰 공헌을 했다. 이는 또한 정치적으로 만년의 그가 왕정복고 이후의 밀턴만큼이나 고립되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이미 숨을 거둔 시대의 마지막 생존자였다.” 1950년도 노벨상 수상자 버트런드 러셀에게 바치는 글 _어윈 에드먼(미국의 철학자, 수필가) 철학에는 노벨상이 없지만, 올해의 노벨문학상은 버트런드 러셀에게 수여되었다. 발표문은 그 상이 지금으로부터 거의 한 세대 이전에 ‘수리 논리학의 발전에 기여한 버트런드 러셀’에게라기보다 ‘위대한 인문주의자 버트런드 러셀’에게 수여되는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러셀이 그처럼 높이 평가받는 것은 적절하고 당연하다. 그는 존 스튜어트 밀, 데이비드 흄, 버클리에서부터 홉스, 베이컨에 이르는 영국 철학의 오랜 전통을 잇는 가장 최근의 인물이다. (……) 철학은 위대한 전통 가운데 문학의 일부이자 한 측면―어쩌면 가장 지적인 측면―이라는 생각이 노벨 위원회 몇몇 위원들의 마음속에 들어 있었음이 분명하다. 철학은 문학과 마찬가지로 담론의 한 형식이다. 그것은 지식과 그 대상, 정당한 이유, 자연 그 자체의 성격 등에 관한 우리의 근본적인 생각을 신중하게 분석하는 담론이다. 러셀은 신비주의자라기보다 논리학자이며, 시인이라기보다 분석가이다. 지난 과거에 발표된 그의 글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가 다른 철학자들의 견해에 얼마나 깊게 공감하며 뛰어난 상상력을 발휘하여 글을 쓰는지,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을 얼마나 놀라운 위트와 활기로 꾸미는지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중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