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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 만년에는 시보다 소설을 쓰고 싶어했다일러두기1. 단편소설사월이우장雨葬오산誤算이었다외로운 사람들결혼 전후하숙일편단심닭 쫓던 개2. 인물평전인간 월탄月灘전원시인 김상용팔로군에 종군했던 김명시 여장군의 반생기샘골의 천사 최용신 양의 반생半生오월의 여왕3. 문학론시詩의 소재에 관하여 문학의 처녀지處女地로시詩와 난해성難解性익명匿名 비평의 유행에 대하여우리 예술 확립에로 매진하자한하운 시집 『보리피리』 서평의제 좌익擬制左翼4. 일기일기병상일기부록노천명 생애(1912-1957)노천명의 생애 흔적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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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천명 시인은 평생 소설을 쓰고 싶어 했다어느 이름 없는 여인이 되고자 했던 사슴의 여인찬사와 비난을 동시에 받았던 암흑시대의 희생자여기에 수록된 8편의 소설은 노천명 시인이 그 당시 신문잡지에 기고했던 작품들이다. 보물 같은 이 소설들은 보존문서 속에 파묻혀 잊혀 질 뻔한 작품들을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민윤기 회장의 노력으로 찾아내 정리하여 공개하게 되었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우장雨葬」의 작품성은 한국 현대문학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손꼽히는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 필적하는 향토성 짙은 뛰어난 소설로도 평가하고 있다.노천명이 사랑했던 세 명의 남자남자들에게 까칠하게 대했던 노천명도 여자였다. 1938년 스물일곱의 노천명은 문인들이 출연하는 연극 무대에 서게 된다. 이 해에 그는 최정희가 사표를 냄으로써 공석이 된 조선일보 발행 월간잡지 ‘여성’에서 근무한다. 이 무렵 극예술연구회에 참여,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의 [앵화원櫻花園, 벚꽃동산]에서 모윤숙이 맡은 라네프스카야 부인의 딸 아냐 역을 맡아 연극 무대에 섰다. 이날 무대에서 노천명이 열연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보성전문 경제학과 교수 김광진(1902~1986)은 그만 노천명에게 반하게 된다. 김광진은 연극이 끝나자 노천명에게 꽃다발을 전했고 이것이 인연이 되었다. 노천명은 시인 김기림의 구애도 칼같이 거절했을 만큼 까칠하고 도도한 성격의 소유자였으나 의외로 김광진의 구애에는 흔쾌히 마음을 열었다. 처음 만난 두 사람은 이내 사랑에 빠져 결혼까지 약속했으나 안타깝게도 김광진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었다. 김광진은 노천명에게, 아내와 이혼하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김광진은 노천명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이런 상처를 입었는데도 노천명은 다시 두 번째 사랑을 하게 된다. 어느 파티에서 이성실이라는 남자를 만난다. 이성실은 1930년대에 큰 인기를 얻었던 ‘고향의 하늘’ ‘울지는 않아요’ ‘방랑자의 노래’ 등을 작곡한 작곡가 겸 가수였다. 파티가 끝나고 나오는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우산을 가지고 있던 이성실은 노천명과 같이 우산을 쓰고 비를 피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누었다. 이날 이후로 두 사람은 자주 만나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쩌랴. 이성실 역시 유부남이었다. 김광진처럼 이성실도 아내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노천명은 두 번 다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눈물을 머금고 이별을 선택한다.그 무렵 노천명은 안국동에 살던 집을 언니에게 내주고 누하동에 집을 사기 전이어서 옥인동에 사는 김수임(1911~1950)의 집에 기거하고 있었다. 잘 알려진 것처럼 김수임은 일제 강점기와 군정시대의 공산주의자이며 간첩 혐의로 사형당한 여성이다. 그런데 김수임은 노천명이 평양에서 김광진과 만날 때 함께 자주 어울린 사람 중 한 명이다. 아무튼 노천명을 잊지 못한 이성실은 밤이면 밤마다 옥인동 김수임의 집에 찾아와 노천명을 만나려 했으나 끝내 노천명은 만나 주지 않았다. 그리고 세 번째 사랑의 주인공은 (이것은 필자의 추측이기는 하지만) 그 유명한 시인 백석(1912∼1996)이다. 이화여전 동기인 모윤숙과 선배 기자이자 친구였던 최정희, 동료기자 이선희와 함께 백석을 자주 만났다. 이 네 사람은 입을 모아 백석을 ‘사슴’이라고 불렀다. 잘 생기고, 잘 배우고, 유능한 백석에게 반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항간에는 노천명의 대표작으로 평가되는 시 「사슴」은 백석을 위한 것이라는 평판도 있었다. 백석이 근무했던 영생고보 1939년 졸업생인 김희모 씨는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백석 선생님은 너무도 잘생긴 모습에 반할 정도였다. 머리는 올백을 하고 연회색의 산뜻한 양복을 입은 모습이었다. 당시에 학교 선생들은 사회의 지도층 인사였기 때문에 존경을 받았지만, 나이 어린 백석 선생님은 시인으로, 그리고 그 외모로 더욱 유명했다.” 이렇듯 백석은 여성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받았다. 당시 모윤숙은 백석을 이상형으로 생각한다고 했고, 노천명 역시 그를 바람직한 시인의 모델이면서 자신의 이상형으로 생각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언제나 점잖은 편 말이 없구나관이 향기로운 너는무척 높은 족속이었나 보다물속의 제 그림자를 들여다보고잃었던 전설을 생각해 내고는어찌할 수 없는 향수에슬픈 모가지를 하고 먼 데 산을 바라본다-노천명의 시 「사슴」전문, 1938우정을 나누웠던 문인들의 모임조선 후기의 뛰어난 학자이며 개혁가인 다산 정약용에게는 시詩짓기 모임 ‘죽란시사竹欄詩社’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친한 친구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시 짓기 모임을 가지곤 하였는데, 모이는 날짜가 매우 시적이었다. 그들은 ‘살구꽃이 처음 피면 모이고/ 복숭화꽃이 처음 피면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모이고/ 초가을 서늘할 때 서지(西池, 서대문 밖에 있던 연못)에서 연꽃 구경을 위해 모이고/ 국화가 피면 모이고/ 겨울철 큰 눈이 내리면 모이고/ 연말에 화분에 심은 매화가 피면 모인다’는 것이었다. 노천명에게도 이런 모임이 있었다. 당시 그녀와 친했던 여류문인들은 최정희(소설가, 1906~1990), 이선희(소설가, 기자 1911∼?), 모윤숙(시인, 1909~1990) 등이었다. 그들은 “비가 오면 비가 온다고 서로 찾고, 눈이 오면 눈이 온다고 서로 찾았으며, 서로 찾지 못하는 때면 편지로써 마음을 서로 알렸다”고 했다. 특히 노천명은 소설가 최정희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다. 한국전쟁 1.4후퇴 때 세간 살림 하나 챙기지 못하면서도 최정희와 주고받은 편지는 꼭 가지고 피난 갔을 정도였다. 모윤숙은 노천명이 사망하기 며칠 전 집으로 찾아와 자신이 외국 출장이 있으니깐 귀국할 때까지 건강하게 있으라고 했지만 노천명은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먼저 저 세상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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