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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장 노동조합 상황과 지역대책위원회의 활동
1. 2007년 말~2008년 조합원 상황 2. 2007년 말 집행부의 석방과 분열된 노조 3. 쟁의대책위원회와 조합원 총회 4. 재정사업 5. 지지연대 세력과 지역대책위원회의 활동 7장 ‘사랑의 교회’ 천막농성과 월드컵점 천막농성 1. ‘사랑의 교회’ 앞 천막농성(2007년 12월 21일~2008년 5월 15일) 2. 총선 비례대표 후보전술 3. 비정규투쟁사업장의 공동투쟁 4. 홍콩원정투쟁 5. 이랜드 매각과 홈플러스의 인수 6. 월드컵점 앞의 천막농성 8장 순천분회의 510일 파업투쟁 1. 2007년 6월 이전의 노조활동 2. 순천분회의 파업과 뉴코아 순천지부와의 공동투쟁 3. 천막농성 돌입(7월 19일) 4. 이랜드매장 매출제로투쟁 5. 설맞이 집중투쟁과 부당해고에 맞선 복직투쟁 6. 복귀자와 함께하는 투쟁 9장 울산분회의 510일 파업투쟁 1. 2007년 6월 울산분회 파업투쟁과 매출제로투쟁 2. 천막농성 돌입과 김학근 분회장의 구속 3. ‘찾아가는 선전전’과 울산노동자 결의대회 4. 김학근 분회장의 석방과 화요일의 투쟁문화제 5. 2008년 부당해고 항의투쟁과 추석집중투쟁 10장 홈플러스와의 교섭과 타결 1. 홈플러스와의 교섭과정 2. 잠정합의안을 둘러싼 조합원 찬반투표 11장 현장복귀와 510일투쟁의 의미─조합원들의 목소리 1. 복귀 후의 현장 상황과 노조 복구 2. 510일투쟁 경험과 투쟁의 힘 3. 510일투쟁의 의미 사진으로 보는 저항과 연대 부록 - 이랜드일반노조 관련 자료 - 이랜드-뉴코아투쟁 관련 피해 내역 현황 - 구술자 명단 - 문헌 자료 - 투쟁 연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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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컵지대위 구성원들은 조합원들, 특히 월드컵분회 조합원들에게 많은 의지와 위로가 되었다. 분회 결성 때부터 만난 관계였지만, 이들은 투쟁과정 내내 조합원들의 옆에 있어서 언제든지 의지할 수 있었고, 같이 얘기를 나누면서 위로가 돼 주었다. 또, 조합원들은 지대위의 여러 토론 자리에도 참석하여 투쟁을 둘러싼 상황, 노조운동과 비정규투쟁을 새롭게 이해하기도 했다.
(지대위는) 저희하고 모여서 얘기도 많이 나누고. 월드컵에서 집회하면 만나서 먹을 거 사다 놓고 먹으면서 서로 도닥이고 그런 작업. 연세대 살맛 학생들, 사회진보연대, 다함께, 우리가 마포구니까 민주노동당의 지역구에서 많이 오셨어요. 항상 플래카드 하나씩 들고 오고, 피켓 만들어서 오고. 우리는 그냥 몸만 가서 하면 돼요. 항상 그분들이 다 준비해 주고. 그리고 지대위 자체 회의 있으면 우리도 거기 참석해서 돌아가는 상황이나 이런 것도 듣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도 하게 되고. 그런 거는 저를 포함해서 한두 명을 그분들이 꼭 찾아요. 왜냐면 우리 얘기를 하니까 우리가 있어야 하니까. 그거 하면서 12시 이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거의 없는 거 같아요. (황선영, 월드컵) --- 「6장 노동조합의 상황과 지역대책위원회의 활동」 중에서 이처럼 조합원들이 경제 문제, 가족 문제 등 심각한 상황으로 몰리면서 점차 현장으로 복귀하는 이들이 늘어났다. 순천분회가 파업을 시작한 2007년 6월의 조합원 수는 92명이었다. 투쟁과정에서 초기에는 한두 명 정도가 복귀하였기 때문에 투쟁에는 큰 타격이 없었다. 그러나 2007년 9월 추석집중투쟁을 하면서 해결을 기대했지만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고, 오히려 투쟁이 장기화되자 생계가 어려운 이들이 복귀하였다. 결국, 투쟁이 마무리될 때까지 남아 천막을 지켰던 조합원은 박영광?김경민?송태광?이혜숙?고준 5명이었고, 그 외에 5명 정도가 천막농성장을 드나들었다. 그런데 순천분회는 다른 분회가 복귀자에 대해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던 것이 투쟁에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을 보았고, 2008년 들어 투쟁하는 조합원 수가 10명 안팎이었기 때문에 투쟁하는 조합원들이 고립될 것을 우려했다. 이에 순천분회는 복귀자들이 현장에서 조합원으로서의 소속감을 잃지 않도록 방침을 세웠다. 즉, 복귀자들도 현장에서 투쟁을 하는 것이므로, 파업대오의 주요 일정에는 참여할 것을 제기했다. 복귀자들은 이를 받아들였다. 그뿐만 아니라 복귀자들은 일하면서 받은 월급에서 일부를 투쟁기금으로 모아 순천분회에 보내기도 했다. --- 「8장 순천분회의 510일 파업투쟁」 중에서 이에 울산분회는 “홈에버 사측이 노동자를 쓰다 버리는 비품으로 여긴다”면서, 몇 개월만에 교섭이 이뤄졌고 매주 1회 노사집중교섭을 하기로 합의한 상황에서 다시 부당해고를 자행해 장기파업 사태를 조장하고 있다며 회사를 비판했다. 부당해고는 단체협약 위반이며, 특히, 부당해고자 5명 중 최설경 비정규직 여성조합원은 지나가던 울산점장에게 몇 마디의 하소연을 했다는 이유로 징계위원회에 회부되어 업무 복귀 2일 만에 해고통보를 받은 것이다. 파업 중인 조합원에 대한 집단해고는 이번이 세번째였다. 울산분회 5명을 포함해 전국적으로 9명이 해고통보를 받았다. 노조는 재심청구 및 노동부 진정을 통해 부당해고라는 것을 밝히겠다면서, 회사는 부당해고를 철회하고 교섭에 성실하게 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9장 울산분회의 510일 파업투쟁」 중에서 (본인은 정규직인데 왜 길게 투쟁을?) 그게 중동점에서 가장 큰 자랑이에요. 비정규직은 그때 몇 명 없고 다 정규직이야. 왜냐면 매장이 제일 오래됐고 정규직이 빨리 됐고. 그런데도 비정규직 문제를 외치면서 하는 거에 대한 자부심도 좀 있었고. 우리는 대외적으로도 “우리는 정규직도 비정규직을 위해서 같이 싸운다”고 말을 많이 했고, 당연히 같이하는 걸로 생각을 했죠. 같은 조합원이니까. 조합도 잘 모르고 했지만 “다 그렇게 하는 거구나”, 생각했죠. (내 일자리가 위태롭다는 생각은 안 해보셨어요?) 다 찾아줄 수 있을 것 같은 거죠. (……) 뭐 끝내는 우리가 다 얻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있었고. (지도부를 믿고?) 위원장님이 같이 근무했던 과장님인데 심지가 있었고, 거기에 이학범도, 또 조은옥 님이 영향력 있었어요. 굉장히 사람들을 포용하는 게 있었고. 그러니까 믿었죠. (김용임, 중동) 투쟁을 계속할 수 있었던 건 같이 있던 사람들, 그 사람들 믿고 하는 거죠. 내가 뭐, 신념이 있다고 해도 옆에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할 수 없는 거지. 가족의 이해는 이미 포기했으니까. 그거라도 있었으니까 버티고 있었죠. 제일 컸던 게, 사람들이었죠. (백종근, 순천) 투쟁이 본인에게 준 영향은?) 저는 투쟁 끝나고 어깨에 엄청 힘이 들어가서, 인제, 회사에서 뭔가 건드리면 그냥 들이대는 거예요. 복귀해서 약간 쌈닭이 됐던 거 같아요. 좋게 말하면 자신감인 거죠. 매니저 상대로 굽신거리거나 그렇지 않고, 할 말은 하고 따질 건 따지고, 그런 자신감이 생겼던 것 같아요. 몇 년간은 그랬어요. 점장이고 뭐고 대들 건 대들고. (웃음) 그리고 평가나 돌아보거나 그러지는 않았는데, 했던 분들은 상처를 받으신 분도 계시고, 면목점 점거할 때 허리 다치신 분들도 계시고, 그리고 경찰서나 구치소도 다녀오고. 그런데 구치소 다녀온 것은 의외로 굉장히 “나 구치소 다녀왔어!” 투쟁 얘기하면 그거를 막 자랑스럽게 말하고. “나 이런 투쟁으로 이렇게 갔다 왔다!”라는 게 있고. 구치소에 같이 머물렀던 분들은 나름 끈끈한 게 있으신 것 같아요. 나름대로 전우애 같은 거. (마수경, 면목) --- 「11장 현장복귀와 510일투쟁의 의미_조합원들의 목소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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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의 말
“이러한 주체 개인들의 평가가 노조 차원에서 서로 소통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그 때문에 구술작업을 통해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으려 했고, 구술작업 과정에서 구술자 모두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했다. 우선 투쟁을 마무리하는 과정에서 노조지도부는 해고당했다. 투쟁은 성과도 있었지만 잃은 것도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현장에 복귀한 주체들은 어떤 상태였으며, 다른 직원들과 회사는 복귀한 이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투쟁 직후의 주체들 상태와 현장 상황을 확인하는 질문을 했다. 다음으로 긴 투쟁과정에서 주체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또 상처도 받았다. 그럼에도 주체들이 긴 투쟁을 할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이었는지 질문했다. 이는 투쟁의 주체인 여성, 특히 기혼여성노동자들의 특징을 확인하려는 것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510일투쟁이 주체들에게 미친 영향이나 의미에 대해 질문했다. 이는 주체들 스스로가 이 투쟁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지, 또 개인의 삶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 확인하려는 것이었다. 이와 맞물려 노조의 역사에서 510일투쟁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지, 현재의 노조활동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확인하려 했다. 이러한 질문을 통해 주체들의 510일투쟁에 대한 평가, 투쟁 이후 현재까지 노동조합의 상황에 대해서 가늠할 수 있었다. 이에 대해 다음에서는 질문내용에 따라 주체들의 목소리를 담은 구술자료로 정리했다.” 『510일: 2007~2008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 지은이 인터뷰 1. 이 책은 2007~2008년 510일에 걸쳐 파업을 했던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저항과 연대의 이야기인데요, 10년도 훌쩍 지난 지금 이 ‘510일투쟁’을 책으로 내시게 된 이유가 있을까요?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510일투쟁은 노조지도부들이 해고를 받아들이는 대신 투쟁하던 조합원들을 현장에 복귀시키는 것으로 마무리됐어요. 이 과정에서 노조지도부는 투쟁 이후 노조를 유지하기 위해 다음 지도부를 세우려 했고, 각 분회(현재 지부)를 복원시킬 수 있는 이들을 복직시키려 노력했어요. 그런데 노조지도부를 세우는 건 회사의 반대로 안 되어서 조합원들이 복귀한 이후 노조의 지도력은 약화하였고, 조합원들은 긴 투쟁으로 지치고 거기에 경제문제, 가족문제 등 쌓인 문제가 많았던 거 같아요. 그러면서 10여 년간 노조활동이 침체 되었죠. 그런데 다행스럽게 각 분회의 분회장들이 복귀했거든요. 그러면서 각 분회에서는 투쟁했던 이들이 분회를 복원시켰어요. 그 뒤에 이들 분회가 중심이 되어 2018년에 새로운 집행부를 세워냈고, 조합원들도 적극 노조활동에 참여하면서 다시 노조가 활기를 되찾아요. 그 결과로 2019년에는 노조가 파업을 통해 비정규직노동자들의 정규직화를 확보해내요. 510일투쟁에서 이뤄내지 못한 과제를 조합원들의 힘으로 실현한 거죠. 이 과정에서 510일투쟁에 대해 노조 차원에서 공유하거나 평가한 적이 없었어요. 그 때문에 510일투쟁을 했던 이들 중에서 노조의 역사, 특히 510일투쟁에 대해 정리하자는 요구가 있었고, 노조가 역사 정리작업을 하기로 하고 저에게 제안한 거죠. 저는 여성노동 문제에 관심을 두고 연구해 오면서, 510일투쟁이 여성노동자들의 투쟁이기에 관심이 있었지요. 특히, 기혼 여성노동자들의 활동이라 더 관심이 있었죠. 거기에 510일투쟁은 2007년 7월 1일 비정규직법이 실행되기 전날인 6월 30일에 이들이 월드컵점 점거투쟁을 했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었어요. 그래서 노조의 제안으로 이 투쟁을 여성노동자들의 역사로 기록하고 기억할 수 있게 하려는 생각으로 책 작업을 한 거죠. 2. 직접 ‘510일’이라는 시간 파업을 했던 당사자 분들을 만나서 구술작업을 하시고, 이 책을 쓰셨습니다. 510일투쟁의 주체들을 만나셨을 때 선생님께서 받으셨던 느낌과 들었던 생각 등을 말씀해 주셔요. 구술자들은 대부분 투쟁을 끝까지 한 사람들이에요. 투쟁하다가 노조에 등을 돌린 사람들은 구술작업에 참여하려 하지 않아요. 구술자들은 대부분 510일투쟁과정은 힘들고 어려웠다고 하면서도 그 투쟁을 긍정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어요. 아주 큰 자긍심을 갖고 있었거든요. 구술자들의 말을 인용하면 “나는 510일을 끝까지 다 참여했다”는 거죠. 그래서 현장에 복귀해서도 아주 당당했다고 하고 노조활동도 계속하고 있었어요. 2008년 11월 510일투쟁이 끝났을 때 보통 절반의 승리, 절반의 패배라고 평가를 하더군요. 노조지도부가 해고된 것이나 완전한 정규직화를 확보하지 못한 것이 패배라면, 조합원들이 현장에 복귀하고, 회사가 단체협약에도 있는 18개월 근무한 비정규직을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하기로 한 것도 인정하지 않았는데, 투쟁으로 16개월 근무한 비정규직은 무기계약직으로 전환한다는 등 고용조건과 노동조건이 개선된 것은 절반의 승리라는 거죠. 그러니까 현장 복귀하면서도 투쟁했던 여성노동자들은 당당했고, 오히려 회사나 투쟁에 참여하지 않았던 직원들이 이들의 눈치를 봤다고 해요. 현장에서 이들은 투쟁 이전에는 회사에서 시키는 대로 하던 모습과는 달리, 자신들의 목소리를 당당하게 내고,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해서 확보해내기도 한 거죠.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510일투쟁에서 배운 거죠. 투쟁과정에서 힘든 것도 있었지만 노동자가 같이하는 투쟁의 힘, 노동조합의 힘을 알게 된 거였어요. 거기에 구술작업을 하면서 저도 알게 된 건데, 여성노동자들이 현장에서 자기 권리를 주장하게 되면서 노동조건도 많이 달라졌지만, 사회의 시선이나 소위 고객들이 마트 여성노동자들을 바라보는 시선도 달라졌다고 해요. 투쟁 이전에는 갑질 고객들의 횡포도 많았고, 마트에서 일하는 여성노동자들을 ‘점원’ 취급하면서 무시했는데, 510일투쟁을 거치면서 이들도 인격을 가진 노동자라는 시선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거죠. 그게 마트 여성노동자들이 투쟁을 통해 자신들의 ‘목소리’를 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이처럼 구술자들은 긴 투쟁과정에서 상처받기도 했지만, 투쟁 이전에는 사회적 시선 앞에서 위축되고 관리자들 앞에서 주눅 들어 있었는데, 투쟁을 거치고 난 뒤에는 마트에서 일하는 노동자로서 자신의 주장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모습으로 변한 것이 가장 크게 다가왔어요. 3. 2007년 당시 홈에버 월드컵점을 20일간 점거했던 일은 노동계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에 큰 이슈가 되었는데요. 노동조합의 ‘노’ 자도 몰랐던 여성노동자, 그것도 대다수 기혼 중년 여성들이 1박 2일로 예정된 점거일정을 스스로 바꾸어 20일간의 점거를 할 수 있었던 동력은 무엇이었다고 생각하세요? 한국까르푸가 이랜드자본에 매각되면서 여러 방식의 구조조정이 진행되었는데, 거기에 더해 비정규직법안이 통과되면서 여성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심각하게 위협받는 상황이었어요. 그 때문에 여성노동자들은 자신의 일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절박함이 가장 중요한 동력이었던 거 같아요. 마트에서 일하는 게 노동조건이 좋아서라기보다는, 당시 40대 전후의 기혼 여성노동자들이 일할 수 있는 곳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었죠. 물론 지금도 같은 상황이지만. 거기에 다수의 여성노동자들이 가정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노동조건도 안 좋은 비정규직이라는 그 일자리가 중요했던 거죠. 그래서 이들은 노동조합에 가입한 거고, 이랜드노조, 뉴코아노조와 공동투쟁을 하면서 많은 노동자가 같이 싸우는 것에서 자신들의 힘을 조금씩 알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이랜드 자본이 지속해서 노동자들을 무시하는 태도에 쌓인 분노가 표출된 거죠. 그래서 기혼여성노동자들인 조합원들이 1박 2일 월드컵점 점거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거죠. 거기에 6월 30일 회사 측의 방해에도 600여 명의 조합원들이 월드컵점의 계산대 사이사이에 박스를 깔고 앉아 매장을 점거했을 때, 자신들의 힘을 느낀 거죠. 보통 노동자들이 파업으로 회사를 멈췄을 때,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현장의 힘이 누구에게 있는지 알거든요, 그런데 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은 파업을 하면서 바로 관리자들을 쫓아내고 매장을 점거하니까, 회사가 매장문을 닫아요. 그러니 여성노동자들은 정말 자신들이 매장을 움직여왔다는 걸 확인한 거죠. 거기에 다른 노동조합의 노동자들, 노동사회단체들, 진보정치인들이 매일 연대 오고, 더욱이 언론이 집중해서 보도하는 등의 상황도 여성노동자들의 자신감을 북돋워 준 거죠. 이렇게 점거농성 과정에서 또 다른 동력을 확보하는데, 수년을 일하면서도 서로를 알지 못했던 여성노동자들이 같이 밥 먹고 자면서 서로를 챙기는 일상을 공유하죠. 그러면서 서로의 삶과 현실, 그리고 노동현장에서 겪은 어려움을 알아가면서 강한 ‘동료애’가 형성된 거죠. 이렇게 일자리를 지키려는 요구가 투쟁동력이었고, 점거투쟁 과정에서 형성된 동료애와 연대가 또 다른 중요한 투쟁의 동력이었던 거 같아요. 4. 510일투쟁을 정리하는 책을 내시면서 선생님께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사건이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또 가장 기억에 남는 분은요? 당연히 월드컵점 점거투쟁이고요. 특히 점거 다음 날에 조합원들이 스스로 무기한 점거투쟁을 하겠다고 결정하는 과정이 가장 인상적이었어요. 원래 노조의 계획은 1박 2일로 월드컵점을 점거하고 나오는 거였고, 이 역시 노조간부들이 결의해서 결정한 거였어요. 그런데 노조지도부는 그조차도 가능할까 걱정하고 긴장했거든요. 조합원의 대부분이 기혼여성이라서 가정을 비우고 외박을 하는 게 가능할까 싶었던 거죠. 노조활동 경험도 없었고. 그런데 600여 명의 조합원이 일시에 월드컵점 점거에 성공하고, 많은 연대세력도 오면서 여성노동자들이 자신감을 가진 거죠, 그래서 점거 첫날 잠을 자고 났는데 여기저기서 “계속 점거해야 하는 거 아니냐”며 술렁였던 거죠. 그러다가 이들이 먼저 노조지도부에게 점거를 계속하자는 요구를 한 거죠. 결국, 노조지도부는 분회별 토론을 거친 뒤 총회에서 계속 점거할 것을 결정한 거죠. 사실 조합원들이 투쟁경험도 없었고 노조지도부 역시 투쟁을 길게 할 준비가 안 된 상태였기 때문에, 조합원들이 토론을 통해 내린 결정을 지도부가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죠. 그런 점에서 노조지도부 역시 대단했던 거 같아요. 그리고 정규직노동자와 비정규직노동자들이 같이 510일투쟁을 할 수 있었던 중요한 역사적 조건이 있어요. 한국까르푸 때부터 정규직노동자들의 노조가 비정규직의 노동조건개선을 위해 투쟁하다가 2005년에 비정규직노동자들도 노조가입을 할 수 있게 확보해낸 것 역시 인상에 깊게 남죠. 510일투쟁 이전의 노조 역사는 그동안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저도 몰랐어요. 대공장이나 대규모 사업장에서 정규직노동자들의 노조는 비정규직이 가입할 수 없어서 비정규직노동자들이 따로 노동조합을 만들어왔거든요.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 사내하청노조, 대우자동차 비정규직지회처럼. 이런 노동조합운동의 분위기하고 다르게 거의 조직력도 없었던 한국까르푸노조가 비정규직과 같이하려 했던 활동도 인상적이었어요. 이런 활동이 비정규직노동자와 정규직노동자들이 같이 510일투쟁을 할 수 있었던 역사적인 힘이기도 했고요.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많은 분이 여러 이유로 기억에 남고, 그분들의 경험에서 나온 말들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요,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은 시흥분회의 임재윤 조합원하고 울산분회의 이해욱 대의원이에요. 두 분은 510일투쟁 직전에 노조에 가입했고 510일투쟁을 끝까지 했어요. 임재윤 조합원은 가장 역할을 하고 있었고 정규직이었어요. 시흥분회에서 첫 비정규직 해고자가 나오면서 투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했고요. 투쟁하면서 수입이 없고 집이 더 어려워지자 큰아들이 학비가 없어 학업을 중단하고 군대에 갔대요. 엄마인 임재윤 조합원이 아들이 군대 있는 동안 면회 한번 못 갔다고 하더라고요. 엄마가 투쟁하면서 아이들도 같이 어려움을 겪는 상황이었죠. 그런데도 투쟁에는 빠지지 않고 끝까지 했죠. 자신이 빠지면 빈자리가 늘어날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죠. 그런 자신의 상황을 신뢰하던 분회장(직무대행)에게도 말하지 않고 저녁 시간과 주말에는 호프집에서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며 코피를 쏟기도 하고. 그런 상황을 듣는 내내 마음이 아팠죠. 그렇게 자신의 상황은 어려워지는데 투쟁은 길어지고 이랜드 자본은 계속 노동자들을 무시하며 교섭을 하지 않자 분노가 극에 달했더라고요. 자신의 마음마저 다칠 정도로. … 그래도 내가 옳고, 우리가 옳으니까 투쟁을 그만둘 수 없었대요. 자존심 때문에 투쟁을 그만둘 수 없었다고 해요. 이 분은 투쟁 이후 마음치유를 해야 했어요. 구술작업을 하면서 눈물도 많이 흘렸는데. 그래도 그 이후 자기 치유를 하기도 하고 노조활동도 열심히 하면서, 구술작업을 하던 2019년에는 지부장으로 활동하고 있었어요. 그리고 울산분회의 이해욱 대의원도 아이를 키우고 있었고, 더욱이 아프신 어머니를 매일 병원에 모시고 다니면서 돌봐드려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그런데 조합원들의 지지로 대의원이 되었기 때문에 자신의 상황을 말하지도 못하고, 대의원의 역할, 맏언니의 역할을 성실하게 했어요. 조합원 대부분이 여성이다 보니 여성간부의 역할이 크거든요. 특히 울산분회는 분회장이 두 번이나 구속되어서 이 분의 역할이 아주 컸던 거 같아요. 그 과정에서 자신의 내면갈등을 깊게 겪었어요. 상처로 남을 정도로. 자신의 상황을 감당하기 어려우니 투쟁을 정리해야 한다는 생각과 투쟁현장에 가면 대의원으로서 계속 같이 열심히 해야 한다는 생각 사이에서 많이 갈등했던 거 같아요. 또 그런 자기 내면의 모습을 계속 들여다보면서 솔직하지 못하다고 힘들어하고 스스로 생채기 내고 했던 거 같아요. 저에게는 자신의 어려운 상황을 껴안고 긴 투쟁을 해야 했던 이 두 사람이, 한 사람은 이랜드 자본에 대한 극도의 분노로 표출하면서 내상을 입은 거 같았고, 다른 한 사람은 자신의 내적 갈등을 계속 지켜보면서 내적 상처를 입는 모습으로 다가왔어요. 두 분 다 같은 무거움으로 기억에 남아 있어요. 5. 이 책을 접하실 독자분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해주세요. 저는 이 책을 정리하면서 노동조합, 연대, 여성노동자, 역사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하고 있어요.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만든 게 노동조합이고, 노동조합을 통해 기업주들에게 요구하고, 그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투쟁하고 협상하기도 하죠. 이런 권리는 노동3권으로 보장되어 있는데도 1970년대, 80년대 군사독재정권 시기에는 ‘빨갱이’, ‘불순세력’ 운운하면서 탄압을 했거든요. 그런데 사회가 민주화되었다고 하는 2000년대 전후에도 노동조합을 인정하지 않았죠. 한국까르푸 노조가 그 예이기도 해요. 회사 측은 노조를 없애려고 노동자들을 매수하고 협박하고, 현장에서 불이익을 주기도 하고 해고하고. 지금도 그렇잖아요? 노동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모를 뿐만 아니라, 노동조합을 만들면 기업주 측은 탄압해서 와해시키려 하죠. 이런 사회 분위기에서 여성노동자들은 노동조합에 참여하고 특히 510일투쟁을 경험한 뒤에 노동조합이 어떤 의미인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통해 단결하면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스스로 확인한 거죠. 510일투쟁 이후 복귀한 여성노동자들은 회사 측에 당당하게 맞설 수 있었다는 것이 공통된 얘기였거든요. 이들은 노동자들이 개인은 약한데, 노동조합으로 모여 목소리를 내면 그 힘이 무척 크다는 것을 경험으로 확인한 거죠. 지금은 아르바이트하는 10대부터 경비, 택배, 청소, 식당, 돌봄노동 등에 종사하는 50~60대, 아니 70대까지 모두 노동하잖아요. 일하는 영역은 달라도 일하면서 임금을 받기 때문에 모두 노동자예요. 그래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모두 자신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노동조합을 만들고 참여했으면 좋겠어요. 또 노동조합은 노동자 개인들이 연대하는 것이라고 할 수도 있죠. IMF 이후 한국사회는 많은 노동자를 일자리에서 쫓아냈고, 지금도 진행 중이지요. 그러나 그 어려움을 공감하고 연대하는 분위기가 약해졌었죠. 그런데 여성노동자들의 510일투쟁에서는 사회 각계각층의 개인과 단체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연대가 이어졌다는 것을 확인하면서, 연대가 이 사회에서 모두 같이 살아가는 방법이라는 걸 새삼 확인했어요. 그리고 ‘여성노동자’에 대한 문제인데요. 510일투쟁을 이후 마트 여성노동자들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그들을 노동자로 인정하기 시작했죠. 여성들이 하는 노동을 바라보는 인식도 바뀌어 갔어요. 하지만 지금도 여성노동자들이 사회에 나와 일하는 것을 ‘반찬값’을 벌기 위한 것으로, ‘부업’으로 규정짓는 인식이 여전히 강하게 있어요. 510일투쟁 주체들을 통해서도 알 수 있지만, 이들 중 다수는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는 가장 역할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도 자신들의 일에 애정과 자긍심을 갖고 있었죠. 남성이든 여성이든 사회활동, 노동하면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거는 마찬가지잖아요. 그런 면에서 여성들의 노동에 대한 인식이 바뀔 필요가 있다고 봐요. 마지막으로 이 투쟁을 정리하면서 역사 속의 사건에 대한 평가를 그 사건 자체로만 평가할 수 없다는 걸 새삼 확인했어요. 510일투쟁의 주체들을 통해서 이런 모습이 아주 잘 나타나요. 510일투쟁의 결과는 노조 지도부가 해고를 받아들이면서 분회장들과 조합원들을 복귀시켰잖아요. 처음에 저는 이 지점에서 멈춰 이 투쟁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를 고심했어요. 그런데 이 투쟁은 510일로 마무리되면서 끝난 것이 아니라, 이후 10년이 지나서야 다시 그 영향이 나타났어요. 물론 지금도 510일투쟁은 지속 중이고요. 그러면서 역사의 평가나 영향을 긴 시간 속에서 봐야 한다는 점을 다시 생각한 거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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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랜드홈에버 여성노동자들의 투쟁과 연대 이야기가 생생하게 담긴 『510일』의 출간은 우리의 눈물과 땀과 희망이 어떻게 자라고 익어 우리의 삶을 바꾸는지를 확인하는 또 하나의 역사적 증거입니다. 힘겨웠지만 빛나는 우리의 투쟁의 시간은 과거의 유물이 아니라, 비정규직 없는 일터, 노동자가 현장에서 주인 주체가 되는 시간을 누리는 힘찬 응원입니다. - 김소연 (비정규 노동자의 집 ‘꿀잠’ 운영위원장, 전 기륭전자 분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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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트에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 있음을 보여 준 510일.
태어나 가장 길었던 시간. 가장 많이 울었던 510일. 가장 많이 웃고 가장 사람다운 사람들과 함께했던 510일. 찬 바닥에 박스를 깔고 자고 반찬 없는 식은 밥을 먹으면서 가장 당당하게 가장 인간답게 살았던 510일. 투쟁은 끝났어도 역사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노동자라는 이름으로 살아가는 한은. -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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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노동자들 몇 분께 “이런 싸움을 다시 할 수 있겠어요?”라고 물었을 때, 어떤 분도 선뜻 대답하지 못하셨습니다. 회사와 공권력의 압박과 회유와 폭력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 컸기 때문일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깨달았습니다. 생애 처음으로 부당함에 저항하여 내 목소리를 냈던 싸움이었습니다. 오롯이 내 삶의 주인이었던 시간이었기에 상처만큼이나 자부심도 컸던 싸움이었습니다. 인생이 투쟁 전과 투쟁 후로 나뉘어 다시는 투쟁 전의 나로 돌아갈 수 없는 싸움이었습니다. 그 싸움의 주인공들에게 그 질문은 바보 같은 질문이었습니다. 510일의 시간 동안, 절망과 허탈과 무력감 속에서도 당당하던 노동자의 자존심과 빛나던 연대의 진면목을 확인하며 자주 코끝이 찡하고 관자놀이가 뻐근했습니다.
- 부지영 (영화감독, [카트] 연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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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0일은 세월 속에 흩어져 버린 것이 아니라, 우리 여성노동자들의 마음속에 무한한 긍지로 새겨져 있다는 사실을 책장을 넘기며 확인했습니다. 관리자의 부당한 지시에도 그저 “네”라고 답하고, 이름이 아닌 ‘무슨 아줌마’로 불리며 사측의 억압에 쉽게 움츠러들던 ‘점원’은 사라졌습니다. 그 자리에 “우리는 아주 당당해!”, “이건 아니지 않느냐?”라고 말하며, 함께 싸우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도 “우리 대신 고생해 준 동료들”이라고 품을 수 있는 존엄과 연대의 마음을 갖춘 ‘노동자’가 생겨났습니다. - 심상정 (정의당 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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