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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긴이 말 |출판 설명 |『대원만선정청정휴식거해』 서문
1부 수행의 준비 제1강 서론|역자의 해설|무엇을 휴식이라고 하는가|청정원만은 무엇인가|휴식과 선정|큰 수레에 같이 타고 해탈성에 들어가다|경례의 의미 제2강 두렵고 떨림으로 법왕을 마주하다|대행의 보현여래|몸과 지혜가 하나가 되어 작용을 일으킨다|변하지 않는 광명청정|자성에 정례하고 자성을 공경하라|불법의 성취는 스스로 지혜를 증득하는 것|환경과 계절|수행의 처소 제3강 부적합한 수행의 처소|네 가지 도량|광선과 수행|지관을 수행하는 장소|누가 법기인가|법기가 아닌 사람에게 법을 전하지 말라 제4강 무념에 대한 잘못된 이해|무념 수행법의 세 단계 중 사법|무념 수행법의 지법과 일월 정화의 채집|희론을 떠나야 공성이 생겨난다|무념 수행법의 수법, 어떻게 공을 수지하는가|사람의 몸은 얻기 어려우니 서둘러 수행하라 제5강 불법 수행과 스승의 중요성|계율과 위의|굳건하게 믿고 성실하게 믿고 경건하게 행하라|팔풍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어야|부지런히 수행하여 마음의 의혹을 없애다|생명을 낭비하지 말고 수시로 정념을 일깨우라|힘써 정진하고 서둘러 수행하라|번뇌는 견고하고 복은 얻기 어려우니 2부 정定의 수행과 관정 제6강 스스로 불법의 체계를 세우고 조절하라|염리심과 대비심이 수행의 전제 조건|지혜는 삼유에 머물지 않고 자비는 적멸에 머물지 않는다|어떻게 전행을 수행하는가|관정의 중요성|관정은 도의 근본이다|비밀관정, 희론을 떠나 공도 유도 아님을 깨닫다 제7강 수행은 반야지혜를 얻고 공성의 깨침이다|능과 소, 몸과 마음이 전일하다면|기와 명점|정화하여 성숙시키는 관정|스승의 법보시가 관정이다|생기차체는 명심견성을, 원만차제는 진공묘유를|습기를 전화하면 성불한다|주문, 염송, 관상은 행위와 마음을 일치시키는 것 제8강 상사상응법의 수지와 그 공덕|정성스럽고 간절한 마음이 가행이다|전행 수행법의 네 단계|정행도의 수행법|공과 낙, 삼맥사륜 수행법|백골관의 결정적 순간 제9강 정륜 후륜 심륜 제륜. 사륜에 관해|좌맥 우맥 중맥, 삼맥에 관해|삼맥사륜과 대락법|백골관의 오묘함|공성의 깨침과 자성광명의 드러남|공락정의 수행법 제10강 중맥 심륜을 여는 수련|공명정의 수행법|삼매진화와 광명의 경계|제심하처 후 지혜광명|빛은 어디에서 오는가|자성광명을 얻은 후의 네 가지 공력|수지의 공덕으로 장애를 끊고 신통을 얻다 제11강 무념법을 수지하다|무엇이 진정한 무념인가|신통은 무념으로부터 온다|대원만 선정 수행법의 단계|낙, 명, 무념은 평등하게 수지해야 한다|낙, 명, 무념이 한쪽으로 치우치면|낙을 수지할 때의 치우침 3부 편향과 조치 제12강 명을 수지할 때의 편향|명이 치우쳐서 일어나는 장애|무념 수지로 인한 편향과 과실|어떻게 편향을 대치할 것인가|어떻게 과실을 조치할 것인가 제13강 생사와 열반은 꿈같고 환상 같다|일체가 환상임을 아는 상근기의 수행법|마음을 한곳에 집중하는 중근기의 수행법|일체의 수지 장애를 대치하는 법 제14강 법에 머무르지 않다|수음 경계의 낙, 명, 무념|정을 흘려버림에 관해|다시 공락정 수지를 말하다|공락정 수지의 대치법과 조치법|공명정 수지의 대치법과 조치법 제15강 무념법의 수지를 다시 말하다|둔근의 수행법|칠지좌법과 몸의 조절|몸과 관련된 낙, 명 수지법|장애가 있을 때 물품을 이용한 조치 제16강 약물과 수행|유법의 마지막은 일념과 경계를 놓아 버리는 것|공락, 공명, 무념이 의지하는 조건|몸을 닦아 얻는 대락의 경계|수기법은 한곳에 묶어 두기 위함이다|마음이 무념 상태가 되는 수기의 방법|기가 중맥으로 들어간 후 공덕의 드러남 제17강 안팎의 기를 닦는 수행법과 주의점|수도의 세 요점|광명은 무엇인가|어떠해야 무념이라고 부르는가|외부의 힘에 기대지 않다 제18강 법을 전한 사람과 일|심념을 수습하는 다섯 단계|정행을 수습하는 세 가지 요점|무념법의 수지를 또 말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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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을 배우는 사람들은 자신의 공덕과 행원이 충분치 못하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해도 진보가 없습니다. 이 점을 여러분들은 특별히 유의해야 합니다. 흔히 열심히 하는데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면서 오로지 수련에서만 구하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는 구하지 못합니다. ‘행’의 공덕을 실천하지 않으니, 다들 자신을 위하는 생각은 많고 다른 사람을 위하는 생각은 너무도 적습니다. 그렇게 해서 성불할 수 있다면 정말로 천리(天理)가 없는 것이니, 저 역시도 불법을 배우지 않을 겁니다.
--- p.63-64 여러분이 깨달은 도리는 부처님의 도리이지만 여러분이 직접 수증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부처님의 경계와 비슷하다고는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저 지혜만 이르러서는 아무 쓸모가 없고, 몸과 지혜가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몸은 사대가 한데 합쳐진 것입니다. --- p.69 만약 여러분이 확실하게 믿지 못한다면 서둘러 부처님께 절하고 서둘러 머리를 조아리고 서둘러 좋은 일을 하십시오. 여러분의 지혜가 밝고 예리해진 후에 다시 돌아오면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믿을 수 있는 것은 지혜에 달렸고 공덕에도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신심(信心)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그것은 여러분의 지혜와 공덕이 충분하지 않은 것입니다! --- p.81 외계의 환경이 심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장소[地]에 의지하지만 서로 다른 점이 있으므로 단계마다 적절한 수련이 있어야 합니다. 심경의 공령(空靈)함을 수행하고자 하면 높은 곳에 있어야 하고, 심경이 안정되어 움직이지 않게 하려면 낮은 곳에 있어야 합니다. 광선, 처소, 기온 모두를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같은 범인은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만약 이것에 의거해서 수행하고 걸음을 빨리하여 노력한다면 정혜(定慧)가 비로소 자라나고 비로소 도를 깨닫게 될 것입니다. --- p.102 이 자리에서 부처님을 배우는 많은 분들 가운데 과연 어떤 사람이 조건에 부합할까요? 부처님을 배우는 데에는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먼저 출리심을 일으켜야 하는데 여러분 가운데 어떤 사람이 출리심을 일으켰습니까? 하나같이 자기 수명을 약간 늘려 주고 복보를 조금 더해 주기만 원할 뿐입니다. 조금 고명하게 말한다면 구하는 바가 없고 그저 지혜만 구한다고 말합니다. 말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구하지 않습니까? 탐내지 않습니까? 지혜는 복보보다 더 큰 것입니다.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생과 겁에 걸쳐서 수행으로 얻는 것입니다. --- p.129-130 여러분이 염불을 해서도 힘을 얻지 못하고 주문을 외워서도 힘을 얻지 못하고 타좌를 해서도 힘을 얻지 못한다면, 왜 힘을 얻지 못하는 걸까요? 공덕이 충분하지 못하고 심력(心力)의 배양에 성공하지 못해서입니다. 마음은 하나의 ‘힘[力]’이고 업(業) 또한 일종의 힘입니다. 그래서 업력(業力)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 같은 일반 중생은 모두 업력 업보에 색신이 지배를 받습니다. 만약 자신을 전화시켜서 자신의 심력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여러 불보살의 지혜와 공덕의 신통한 묘용입니다. --- p.174 번뇌는 청정하기가 가장 어렵고 망념은 떨쳐 버리지 못하며 아집은 비우기가 어려우니, 이것이 바로 고해(苦海)의 근본입니다. 번뇌의 바다는 깊고 아집의 바다는 더 깊은데, 여러분은 자신이 ‘무아(無我)’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어디 말처럼 그리 쉽습니까! --- p.225 생명은 자기가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죽은 후를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낮 동안의 일도 마음대로 하지 못합니다. 외부 경계에 촉발되면 희로애락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데, 이것이 바로 윤회의 고통입니다. 수명이 무상하고 세상일이 무상하고 중생은 윤회 가운데 있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하며, 자신도 윤회 속에서 각종 번뇌와 고통을 받고 있음을 알아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가엾어 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됩니다. --- p.244 공(空)을 말해 놓고 왜 또다시 대비(大悲)를 일으켜야 한다고 할까요? 대비(大悲)는 공(空)이 아닌가요? 대비심을 지니고 있으면 공이 아니지 않습니까? 논리적으로는 마땅히 그러합니다. 이 둘은 모순적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경은 우리에게 비(悲)와 지(智)를 쌍운할 것과 이 둘이 평등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공성(空性) 가운데의 대비심은 공(空)을 증득하고서 대비심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진실한 대승법이고 이것이 바로 불심입니다. --- p.247 우리가 타좌를 하다가 가장 좋은 때에 도달하면 아주 편안하지 않습니까? 편안함이 바로 욕(欲)이니 그렇다면 이는 욕계에 머무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무념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면 좋겠지요? 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모두 수련을 합니다. 다만 스스로 정사유를 하지 않고 견지가 철저하지 못하기 때문에 멍청하게 앉아 있는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지금 말하는 이것이 바로 큰 법입니다. --- p.247-248 환경이 여러분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단장(壇場)을 장엄하게 꾸며 놓음으로써 여러분이 들어갔을 때 그 숙연함에 절로 공경심이 일어나게 한다면, 이미 절반의 공덕이 생겨난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형식은 여전히 중요합니다. --- p.268 수많은 사람이 의식 경계의 청정을 약간 얻으면 그것이 바로 선이고 바로 불법이라고 생각해서, 산림 속의 청정으로 달려가고 그것이 옳다고 여깁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생각을 비우고 생각을 움직이지 않으려고만 합니다. --- p.294 현교 소승의 교리는 습기를 끊어야 비로소 득도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승의 교리 특히 유식에서는 “습기를 어떻게 끊을 수 있느냐!”고 말합니다. 습기를 끊을 수 있다고 할 것 같으면 부처의 본성도 끊을 수 있으니, 그렇게 되면 단견(斷見)이 되어 버립니다. 그것은 끊어 내는 것[斷]도 아니고 항상 있는 것[常]도 아니며 오로지 습기를 전화할 뿐입니다. 번뇌를 전화하면 그것이 곧 보리이고, 식(識)을 전화하면 지(智)를 성취합니다. --- p.300-301 여러분은 일체의 본존이 여러분의 참 지혜 속에 녹아 들어가 있음을 아셔야 합니다. 여러분이 염주를 집어들 때 여러분의 심신은 곧바로 염주로 들어가서 심물(心物)이 융화됩니다. 부처님까지도 그 속에 들어가게 됩니다. --- p.307 여러분은 부처님이나 관음보살이 바로 내 앞에 있다고 생각해야 하는데, 소리를 지르면 마치 그가 듣자마자 금방이라도 올 것 같은 그런 의경을 지녀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입으로는 주문을 외우지만 마음속으로는 망상을 하고 있으면 죽어라 외워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극한 정성과 지극한 공경의 마음이 있으면 부처님께서 찰나의 순간에 여러분에게 오시고 서방 극락세계가 금방 여러분에게 도래합니다. --- p.310 여러분은 선종이 ‘펑’ 하고 단번에 깨닫는 것이며 깨달은 후에는 별거 없다고 생각하지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닙니다. 수지는 대단히 어려운 일이며 영원히 자신을 다스릴[調理] 줄 알아야 합니다. 많은 친구들이 열심히 수지하면서도 스스로 다스릴 줄을 모릅니다. 다스린다[調理]는 것은 수시로 조정할 줄 알아야 함인데, 때로는 마장(魔障)이 일어나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특히 수련이 깊어질수록 수도(修道)가 진보할수록 미세한 마장은 스스로도 잘 알지 못합니다. 그 마장들은 너무나 미세해서 자신이 느끼기에는 번뇌도 일어나지 않고 마음도 흔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이미 일찌감치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 p.324 이것은 정신의 경계이고 유심(唯心)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물질적 현상으로 변해서 옵니다. 정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래쪽 단전에서 따뜻한 불이 일어나면 위쪽에서는 감로가 흘러내려야 합니다. 어느 정도까지 흘러내려야 할까요? 명치 아래까지 흘러내려야 합니다. 여러분은 오로지 이 생명의 의식(意識) 기능을 인정하고 일체의 변화에 관여하지 않아야 합니다. 실제로 여러분이 정말로 관여하지 않는다면, 온 전신의 기맥이 안팎에서 모조리 변화해서 탈태환골합니다. --- p.351-352 일반인들은 수지하면서 이것을 알지 못하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특히 정토종을 수행하거나 선종을 수행하는 사람은 고집이 대단해서 여러분이 이런 방면을 이야기하면 그들은 여러분을 외도라고 말합니다. 사실 그는 어떤 도도 알지 못합니다. 결국 자기 스스로 마음속으로 거절했을 뿐 아니라 이미 악과(惡果)의 인(因)을 심었습니다. --- p.375 바꾸어 말하면 저는 더 이상 놀 거리가 없어집니다. 제가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여러분을 속일 수 있었겠습니까! 그 속에 아주 깊은 비밀이 들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이것은 속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참회할 줄 알아야 하고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세상의 어떤 부처님도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특히 여러분이 심신(心身)의 성명(性命)의 학문을 조금 배웠다고 해서 이거면 됐다고 생각한다면, 저는 탄식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 p.375 심기(心氣)가 충만해져야 비로소 맥을 수지할 수 있습니다. 맥을 수지한 후에 비로소 명점을 수지할 수 있고, 명점을 수지한 후에 졸화를 일으켜야 색신이 비로소 전화해서 이 경계에 도달합니다. --- p.383 기를 어떻게 수지하고 맥을 어떻게 수지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지 원리를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여러분은 대원만을 이미 배웠는데 어째서 조금도 효과가 없는 거지, 하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작용이 있는지 듣기만 한 것이니 여러분에게 약간의 법연(法緣)을 맺어 주었을 뿐입니다! 이런 학리(學理)들에 대해 여러분은 단지 이런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을 뿐이며 수지를 거론하기에는 아직 이릅니다! 모두 잘 수지해야 합니다. 불법을 배운다는 것은 길거리에서 들은 것을 남에게 아는 체하며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 p.383-384 전행(前行)은 상사의 관정을 받는 것과 장소를 선택하는 것 등의 가행(加行)입니다. 전행에 대해 알았고 참된 증득[眞證]에 도달했다면 더더욱 삼맥칠(사)륜의 도리를 진정으로 알아야 합니다. 기맥은 혈관이나 신경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경이나 혈관은 기맥에 속합니다. 이 이치를 먼저 이해해야 비로소 수지할 수 있습니다. --- p.404 호흡을 전수해서 마음과 호흡이 서로 의지함으로써 명심견성과 염주(念住)에 도달하고자 하면, 느리게 호흡해야 하며 매우 부지런히 수지해야 합니다. 팔만사천법문 가운데 하나의 법문이지만, 오로지 이 삼맥칠륜을 수행하고 기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똑같이 성불합니다. --- p.411 여러분이 천태종을 수행하든 정토종을 수행하든 상관없이 수지가 경지에 도달하지 않으면 실제의 경상(境相)은 나타날 수 없습니다. 만약 실제의 경상이 없는데도 맥이 열렸다고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이는 짓이니 생사를 막아 내지 못하고 아무 소용없습니다. 생사가 찾아와도 막아 내지 못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 육신의 사대조차 변화시키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 p.417-418 저 역시 여러분과 똑같은 사람인데 저는 왜 마음을 써서 그런 것을 외우려고 할까요? 외울 뿐 아니라 좋은 법문이건 나쁜 법문이건 모두 스스로 체험해 보고 수련해 봅니다. 해 보면 어떻게 하는 것이 옳지 않고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 p.429 그렇다면 삼계가 꿈같고 환상 같으면 누가 변화하고 있을까요? 자아의 업력(業力)이 변하고 있습니다. 육도윤회의 중생은 주재(主宰)가 없고 자연이 아니며 일체 인연이 변한 것입니다. --- p.534 참으로 수지하는 사람은 찰나의 순간이라도 산란하는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산란하지도 않고 혼침하지도 않으면서 정념(正念)을 얻어 머무른다면, 그러한 정념의 경계는 낙·명·무념이니, 이것이야말로 정(定)이라고 부릅니다. --- p.538 무념경의 수행법은 일체에 집착하지 않는 것이 요점입니다. 제법(諸法)에 의지하여 집착하지 않으면 아주 쉽게 무념에 도달하는데, “어리석은 마음을 인식하여 살피고 관조하는[認識癡心諦觀照]” 것이 수행법입니다. 사람은 왜 무념에 도달할 수 없고 청정할 수 없을까요? 바로 중생의 심리 근본이 무시이래의 치심(癡心) 망상이기 때문입니다. --- p.588 이것이 바로 ‘유’법(有法)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이 형상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겠지요? 당연히 형상에 집착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먼저 수지에 성공해서 이 수준에 도달할 수 있어야 비로소 이런 형상을 지니게 됩니다. 형상의 수지에 성공해서 형상이 생겨난 후에 다시 그것을 놓아 버려야 형상에 집착하지 않는다고 부릅니다. 여러분은 시작하자마자 곧바로 형상에 집착하지 않겠다고 하는데, 처음부터 아예 이런 형상이 없었는데 무엇에 집착하겠습니까? --- p.623 즐거움의 경계를 이끌어 내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만약 욕념이 있다면 낭패이니, 그것은 범부의 경계입니다. 그러므로 약간의 욕념조차 있어서는 안 됩니다. 욕념이 있으면 기(氣)가 거친 기[粗氣]로 변해서 사용할 수가 없으며, 의념 또한 축생도로 가버립니다. 욕념은 없으면서 즐거움을 일으켜야 하니, 교묘함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 p.629-630 기가 중맥으로 들어간 후에는 일체의 공덕이 모두 겉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은 비밀 법문이니 함부로 퍼뜨려서는 안 됩니다. 특히 계(戒)를 지켜야 하며 이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헐뜯어서는 안 됩니다. 남이야 허풍을 떨든 밥을 먹든 상관하지 말고 내버려 두십시오! 들추어내서도 안 됩니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요구는 엄격해야 합니다. 자신은 엄하게 책망하고 다른 사람은 관대하게 대하며, 절대로 입을 함부로 놀려서는 안 됩니다. --- p.644 무엇을 마(魔)라고 부릅니까? 집착하게 되면 곧 마라고 부릅니다. 이것이 바로 도(道)라고 생각하는 순간 여러분은 마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적게 얻은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기백이 큰 사람은 성취도 큽니다. --- p.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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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가모니 부처님이 불법을 일으킨 지 2500년. 불법은 인도에서 중앙아시아로 스리랑카로, 그리고 중국과 티베트, 한국과 일본, 인도차이나 반도로, 오늘날엔 유럽과 미국으로 지역의 범주를 넓혀 왔다. 학문적으로는 프랑스와 일본이 가장 앞선 나라들인데, 바다 건너 유럽의 불교 이해는 동양의 우물 안 개구리 식 추측을 넘어선 지 오래다. 대만에서는 이 법본(강의 원본)이 인쇄되어 나오자 많은 사람이 ‘비법을 공개해서는 안 된다’며 욕을 했는데, ‘고도 근시 사람들’은 이 법본의 프랑스어 번역본이 이미 백여 년 전 번역되어 전해졌다는 사실을 몰랐다. 어떻게 서양인이 불교를 깊이 이해하고 있느냐고 의아해하지만, 서구는 이미 200년 전에 불교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시작하여 불경의 번역에서부터 놀라운 성과를 보였다. 이제는 더 이상 연구할 것이 없다는 말까지 나온다고 한다.
그런 서구에서 요즘 특히 관심을 끌고 있는 것이 티베트 불교다. 8세기경 인도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후에 티베트에서 독자적으로 발전시킨 불교인 이른바 ‘밀교’다. 밀교는 티베트가 불교를 받아들일 때 인도의 후기 불교인 밀교를 수입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밀교에 대한 이해와 오해 밀교는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쉬운 단어다. 문자 그대로 보면 ‘숨은 가르침[密敎]’이니 뭔가 어두운 구석이 있는 것 아닌가 싶고, 실제로 남녀 쌍수(雙修)라는 오해도 적지 않다. 하지만 오해는 오해일 뿐이다. 밀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말씀을 전승한 불법이요 가르침이다. 누구나 존경하는 노벨 평화상 수상자 달라이 라마 14세가 바로 밀교 수행승이다. 세간의 오해로 인해, 또 중국 선종사에 대한 좁은 상식으로 인해 한국에서 밀교는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다행히 지난 30여 년 동안 밀교 서적이 일부 번역되었지만 실제 수증과는 거리가 있는 원론적인 가르침이 대부분이었다. 『밀교 대원만 선정 강의』에 많은 분이 의아할 수 있다. 남 선생이 선종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는 일찍이 20대 중반, 깨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티베트로 들어갔다. 티베트 곳곳에 흩어진 많은 고승 대덕 활불(活佛)과 만나서 초심자의 자세로 밀교 수행을 했다. 법문무량서원학, 그 서원의 일환이었다. 굳이 티베트 밀교의 대사(大士)임을 증명하는 인정서(印定書) 아사리 계(戒)까지 받은 것은, 대사의 자격이 필요해서가 아니라 불법을 장엄하기 위해서였다. 저자는 세상에 불법을 펼쳐 온 지 30년 가까운 1979년에야 비로소 밀교 강의를 공개했는데, 그 강의를 글로 옮긴 것이 이 책이다. 그동안 왜 밀교 강의를 하지 않았을까? 그 이유는 선생의 말에서 드러난다. “저는 일반인이 밀종을 배우는 것에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선종을 수행해서 성공하지 않고서, 선종의 명심견성이라는 이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고서 밀법을 배우면 마도(魔道)로 빠지지 않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중국과 티베트 간 학술 교류로 밀교 수행법이 대중에게 이미 공개되었고, 또 서양에 널리 전파되어 “불법을 배운다면서 밀종을 모르는 사람들을 학자이면서 외국 과학을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는 ‘실로 기이한 유행’이라 할 만한 문화도 있었다. 이 사람 저 사람이 몰래 베끼다가 결국 원래 모습을 잃어버리면 법본이 없어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등 뒤에서 ‘아무개가 밀법을 공개한다니 큰일이다’ 하는 비난을 감수하고 공개하기로 했다. 출가자의 첫걸음, 수행자의 마음자세 1979년에 이루어진 이 강의는 출가 수행자들의 요청으로 시작되었다. 평상시와는 다르게 대단히 엄격했고 늘 경계의 말을 반복했다고 한다. 다른 강의와 달리 녹음도 허락하지 않았고 수강자들의 강의 기록을 점검하고 바로잡아 주기도 했는데, 함부로 전파하거나 단장취의하는 것을 염려해서였다. 출가자가 대상이었기에 수행자의 자세, 요즘 사람들의 수행의 문제점을 누누이 강조했다. 또 수행의 준비 이전의 가행(加行)은 집을 지을 때 골격을 세우는 것이라며 수행의 기초가 전혀 없는 현대인들에게 수행하려는 절실한 마음이란 무엇인지 말한다.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수지가 그토록 어렵습니까? 솔직히 말해서 대부분 전행의 기초는 아예 준비하지 않고 그저 감정적으로 출가했습니다. 이성적으로 출가했다면 이러한 수지의 전행이 아주 엄격했을 것이고 많은 불경을 봤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가 경전을 보는 태도는 대강 훑는 정도입니다. 현대인은 특히 빠른 것을 좋아해서 빨리 할 수 있으면 좋아하고 기초적인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전행의 수지를 소홀히 여깁니다.” 또 정성을 다해 공경하는 마음조차 일으키지 못하며 그런 것을 미신에 가깝다고 여기니 “위로는 제일류의 최상의 지혜에 이르지 못하고 아래로는 맨 아래 수준의 수행법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기본을” 닦지 않으니 성취가 어렵다는 것이다. 남 대사는 자신의 수행 경험을 말하며, 맹목적으로 믿지는 않았지만 대단히 성실했는데 “마땅히 해야 할 것은” 곧바로 했고, “절대로 자신을 총명하다 여겨서 형식주의로 흐르지 않았으며” “밀종의 공양을 할 것 같으면, 언제 물을 공양해야 하고 차를 끓여 공양해야 한다면, 저는 그 시간에 반드시 공양”했음을 밝혔다. 시대가 변해 옛 규칙을 그대로 따른다면 그것은 안 되지만 세태를 감안한 방법 역시 문제여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이 기초를 따라 걸어가게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은 사람을 그르치고 말았다며 점점 수행하기 어려운 현실을 예견했다. 염리심과 대비심을 일으켰는가 수행의 준비 단계에서 가장 중요한 조건이 염리심과 대비심이다. 저자는, 불법을 배우고 수행을 한다고 하지만 대부분은 세상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다고 일갈한다. “가끔 스스로 너무 실망해서 떠나고 싶어질 때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것은 뜻대로 되지 않아 실망감을 느끼는 것일 뿐, 실망하는 마음이나 싫어하는 마음은 염리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염리심(厭離心)은 인생을 참으로 꿰뚫어 보고 거기에서 떠나려는 마음이자 생사의 근본에 대한 끊임없는 질문이다. 죽음이 두려운 것은 범부의 마음이지만 생사의 문제를 캐묻고 분명히 해결하려는 것은 해탈을 추구하는 마음으로, 염리심 없이는 불법을 배워도 절대 성취를 이룰 수 없다. 비심(悲心)은 염리심이 있어야 일으킬 수 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싫어해 떠나려 해야 하고, 정말로 꿰뚫어 볼 수 있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탐진치만의의 오독 속에서 “머리 없는 파리처럼 속세의 그물 안에서 구르는” 것을 보고 가엽게 여기는 마음이 생겨야 비로소 비심을 일으킬 수 있고 대승의 종자가 시작된 것이다. 위장을 가벼우려면 좀 적게 먹는 수밖에 없듯이 불법을 수지해서 효과를 얻으려면 염리심과 대비심을 조금이라도 일으켜야 한다. 수명이 무상하고 세상일이 무상함을 알고 윤회의 고통을 생각하면 일어나는 것이 대비심으로, 자신과 남을 이롭게 하는 마음이다. 이것을 마음에 일으키는 것이 발심이고, 발심을 하면 불법의 감응과 수지의 감응이 몸에 나타난다. 발심이 바로 첫 번째 단계의 전행이다. 몸을 씻고 마음을 씻다 - 관정 염리심 하나만 마음속에 제대로 잡혀도 수증은 크게 진보하리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것은 관정(灌頂)에 대한 이해와 맥을 같이 한다. 관정은 무엇일까? 왜 밀교에서는 “어떤 일파의 밀종이 되었든 어떤 밀법을 수행하든 공동으로 반드시 얻어야 하는 것”이며 “밀법을 배우는 데에 관정은 첫 번째 단계이지만, 실제로는 최초이면서 최후”라고 할까? 초보적으로 관정은 주문을 외우고 병에 든 물을 정수리에 붓는 것으로, 말하자면 세례(洗禮)와 같은 것이다. 이 동작은 무엇을 가리킬까? 바로 우리로 하여금 약간 청량한 경계 아래에서 즉시 “색심여환(色心如幻)”을 깨닫게 하는 행위이다. 이 두 가지는 상호 영향을 미치는데 이 관정을 통해 우리는 심리(心理)와 생리(生理)가 모두 환영 같고 꿈같음을 알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한 관정은 이런 형상(形相)이 필요하지 않는데 수련이 어느 단계에 도달하기만 하면 불보살이 자연스럽게 우리에게 관정을 해 준다고 한다. 사실 관정은 설명이 어려운 수증의 높은 단계다. 예를 들어 도를 깨닫고 명심견성을 해야 비로소 부처님 심법(心法)의 비밀을 참으로 알게 되는데, 그것이야말로 정말로 비밀관정을 얻은 것이다. 이처럼 밀교에서 말하는 관정은 한 가지 현상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논리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이치를 깨닫는 것을 표현하기도 한다. 물론 그 이치는 반드시 몸에 현현한다. 현교든 밀교든, 지관이든 정토든 수행이 일정 단계에 이르면 관정법을 수행하는데 그때 대지혜가 열린다. 심신에 큰 즐거움이 생기고, 몸과 마음이 모여 하나가 되고 부처님 경계의 청정함으로 들어가는 것, 그것이 관정의 힘이다. 저자의 강의를 따라가다 보면 절감하는 이치가 하나 있다. 몸으로 체험하는 만큼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감응을 못 받는다고 한다면, 특히 밀교의 중요한 수행법 하나로 강조하는 ‘상사상응법’을 읽고도 실제로 수행에서 관정은 물론이고 감응이 몸으로 오는 것조차도 체감할 수 없다면, 그것은 ‘감응’이라는 단어를 읽긴 읽되, 눈과 머리로만 읽고 있음에 틀림이 없다. 밀교는 먼저 몸을 닦는다 - 왜 기맥이 중요한가 밀교는 몸을 중시하고 몸으로 접근한다. 불교 용어로 몸은 색신(色身)인데, 이 색신을 먼저 닦는 것을 중시하여 “어느 하나의 법이라도 색신의 기맥 수행에 기초하지 않은 것”이 없다. 그러는 과정에서 마음도 정화되고 나아가서 해탈도 깨침도 이룰 수 있다고 본다. ‘마음을 보라’는 선종의 가르침과는 순서가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선종에서는 누군가 기맥(氣脈)을 이야기하면 고개를 젓는다. 기맥은 몸의 공부이기 때문이다. 물론 강조점이 다를 뿐 어느 쪽이 맞고 틀린 문제는 아니다. 밀교의 선정 수행법을 강의하는 이 책에서 핵심을 이루는 것이 기맥이다. “지난번에 삼맥칠륜(사륜)에 대해 말씀드렸는데 기맥에 관한 문제가 가장 어렵습니다. 평소 사람들이 많이 질문하는 부분이잖습니까! 사실 모든 수행법 가운데 기맥을 수행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저자는 기맥에 대해 지금까지 그 어느 강의에서도 말하지 않았던 세세한 수준까지 묘사한다. “더더욱 삼맥칠(사)륜의 도리를 진정으로 알아야 합니다. 기맥은 혈관이나 신경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경이나 혈관은 기맥에 속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수련을 제대로 해내면 삼맥을 알게 됩니다. ‘약맥과 장맥[若·蔣]’은 바로 좌우의 두 가닥 맥으로서 콧구멍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좌우의 맥이 두정(頭頂) 중간에 이르면 이 두 가닥의 맥은 한데 합쳐지며 모두 중맥을 위주로 한다고 합니다.” 이번 강의도 저자의 다른 강의와 마찬가지로 중국의 고전이 등장한다. “해저에서부터 똑바로 두정에 이르기까지 이 중맥을 주체로 삼습니다. 비유하자면 장자가 ‘독맥을 따라서 법도로 삼는다[緣督以爲經]’고 하면서 독맥(督脈)을 위주로 하는 것과 같습니다. 독맥은 척추 신경이 위로 올라와서 뇌 아래 눈에까지 도달한 것이지만, 독맥 역시 중맥에 의지해서 생깁니다.” 하지만 초점이 다른 강의와는 다르다. 중국 고전이나 도가의 기맥 이론을 가져 오는 이유는 오로지 수증을 위한 방편으로서만 거론한다. 한마디로 불법의 수증에 오로지 집중했다. 대원만 선정 수행법, 공 낙 명 무념과 관상 책의 중점은 정(定)에 있다. 선정, 삼매라고도 하는 정(定)이 밀교 대원만 수행 법문의 핵심이다. 이 법문에서 정(定)을 이루는 요건으로 제시하는 것이 공(空), 낙(樂), 명(明), 무념(無念)인데, 공락을 얻는 방법으로는 기맥 수련을, 공명의 성취에는 중맥 수련을, 무념법으로는 관상을 말한다. 공과 무념은 의식의 측면을 닦는 것이고, 낙과 명은 몸을 수련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과정에서 강조할 것이 기맥과 관상(觀想)이다. 우리가 정에 들지 못하는 이유 하나는, 수행자가 정(定)의 조건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인데 그 조건이 바로 공락, 공명, 무념이다. 공, 낙, 명, 무념의 수지는 관상법과 함께 이뤄진다. 우리의 상상력을 통해서 수행하는 것이다. 물론 공, 낙, 명, 무념은 화두 등 현교 공부에서도 도달하는 것이다. 다만 밀교 강의는 관상법을 통해서 보다 쉽게 공, 낙, 명, 무념을 갖춘 정(定)의 경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한다. 관상법으로 우리는 어디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 관상의 실제를 몇 가지 다룬 후에 남 대사는 또 다른 사례에서 말하기를, 우주의 빛이 가슴속으로 와서 몸과 빛이 하나가 되는 것을 관상해 낼 수 있고 수시로 머물 수 있으면, 이 빛은 가슴 속에 자리 잡아 움직이지 않게 되고 이때가 되면 호흡도 상관하지 않고 자연스레 멈추는 상태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으로 생각이 머무르고 마음이 머무르는 염주요 심주이다. 이것은 팔만사천법문 중 하나이지만 삼맥칠륜을 수행하고 기를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색신이 부처님의 보신으로 바뀐다고 하였다. 하나하나 바로잡고 고쳐 나가는 것이 수행 선종의 역사에 익숙한 우리는, 불법 수행이 별로 많은 시간을 들이지 않고서도 할 수 있는, 스승의 한두 마디로 체득할 수 있는 것이라는 상식을 갖고 있다. 일반인들에게는 저자의 강의가 낯설다. 무엇을 가리키는지 파악하기 힘든 개념, 아무리 똑똑해도 12년은 걸린다는 고행의 시간, 호흡이 멈추고 혈관의 피가 천천히 도는 경계에 도달하는 기주맥정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지적 등은 받아들이기 힘든 얘기이다. 수행의 길은 실로 험난하다는 말 외에 다른 묘사가 있을 수 없다. 3년 무문관이 있고, 스님들의 동구밖 10년 불출(不出)이 있는 이유겠다. 책을 읽으면 그것을 절절히 이해하고 긍정할 수 있다. 그러기에 이 책을 읽은 독자가 실제 수행을 한다고 했을 때, 그 어려운 길에서 옆으로 미끄러지지 않는 방도 또한 있어야 할 것이다. 책의 뒷부분은 바로 그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실제 수증 과정에서 수많은 샛길로 빠질 수 있고, 오해로 가득 차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내용이다. 낙, 명, 무념이 고르지 않고 하나에 치우쳐서, 예컨대 무념에 치우쳐서 혼침으로 들어갔을 때에는 어떻게 조치해야 하는가. 정(精)의 누실은 어떻게 막아야 하는가. 이렇게 해도 잘 안 되고 저렇게 해도 잘 안 될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밝음[明]도 즐거움[樂]도 치우치면 병인데, 그때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등이다. 대치법의 실제를 만나고 이론적인 이해 또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갖가지 방편, 멀리 하는 자도 모르는 자도 도(道)에 들기는 어렵다고 하지 않는가. 밀교는 선종과는 전혀 다른 이치의 세계인 것처럼 보인다. 색신을 중시하는 밀교와 마음을 우선하는 선종은 서로 대척점이 서 있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길은 팔만사천 가지이지만 불법은 일미(一味)이기에 이치는 다를 수가 없다. 이 책에서 기맥을 강조하는 것 역시 하나의 방편이다. 하지만 실제 수증을 목적으로 하는 수행자에게 이 책은 보고(寶庫)임이 분명하다. 마음 깨침이 중요하니 기맥은 사소하다. 그리 말할지라도, 또 갖가지 수행법은 모두가 다 방편에 불과하다 할지라도, 여기 대원만 강의는 놓칠 수 없는 보고임에 틀림이 없다. 수행자는 일체법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이치를 여러분은 먼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여러분이 일체 마음을 지니고 있느냐고 말하는 것입니다. 일체 마음을 지니고 있고 거기에다 또 일체법으로 대치(對治)해야 합니다. 만약 나에게 일체 마음이 없다면 일체법이 무슨 소용 있습니까. 불법조차 쓸데가 없습니다.” 여기 이 책은, 일체법의 하나로, 티베트 밀교가 수행자에게 알려 주는 놀라운 수행 법문이다. 남 대사가 그것을 크고 넓은 안목으로 풀이한 것이다. 수행자라면 특히 일독, 아니 읽고 읽고 또 읽기를 권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