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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 프루스트
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 17 할머니 37 프루스트에 의한 프루스트 44 “만약 루브르 박물관에 프랑스 회화의 명예의 전당을 만든다면” 49 “만약 당신이 노동자로 일해야 한다면 어떤 직업을 선택하겠습니까? ” 52 “만약 세상에 종말이 온다면 무엇을 하겠습니까? ” 55 존 러스킨과 성당 러스킨 순례길 59 러스킨의 『아미앵의 성서』 역자 서문 66 성당의 죽음 97 살아남은 성당들 113 독서 『생트뵈브에 반박하여』 서문 127 자크에밀 블랑슈의 『화가의 이야기』 서문 137 플로베르의 문체에 관하여 169 가브리엘 무레의 『게인즈버러』 서평 199 폴 모랑의 『연한 새순』 서문 203 독서의 나날 227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가 설명하는 『스완네 집 쪽으로』 241 『스완네 집 쪽으로』 이후의 집필 계획에 대하여 247 해설 다양한 글로 만나는 프루스트의 입체적 모습 _유예진 259 |
Marcel Proust,Marcel Valentin Louis Eugene Georges Prou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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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 있는 대상을 향한 우리의 사랑은 간혹 매우 엉뚱한 원인으로 시작되지만 일단 사랑에 빠지면 미화된다. 한 남자가 무슨 이유에서건 그 여자 자체와는 관계없으나 그녀가 해줄 수 있는 일 때문에 그녀를 만난다. 이어서 그는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그녀 자체를 사랑하게 되어, 그가 그녀를 만난 근본적인 이유이자 그녀가 그를 도와서 도달해야 할 목적은 뒷전이 된다.
--- p.90 자동차가 여행객에게 부여한 가장 소중한 선물은 원하는 시간에 출발하고, 원하는 장소에 멈출 수 있도록 허락하는 독립성이다. 바람이 거칠게 부는 어느 날, 폭풍우에 얻어맞으며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시내의 무기력한 도로 대신 뺨을 내리치듯 거칠게 휘몰아치는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를 보고자 하는 어찌할 수 없는 욕망을 경험해본 이는 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것이다. --- p.121 매일 나는 지성에 중요성을 덜 둔다. 매일 나는 작가가 예술의 유일한 질료인 과거의 인상을 되찾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 자신의 내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지성 외의 것으로 해야 한다는 사실을 더 잘 이해한다. 지성이 과거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과거가 아니다. 영혼이 육신을 떠나면 특정 사물로 옮겨간다고 믿는 대중들의 민담처럼 우리 삶의 매 시간은 죽으면 특정한 사물에 깃든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다시 그 사물을 대면하지 않는 한 우리의 삶을 이루는 시간들은 그 사물에 영원히 갇힌다. 그것을 통해 우리는 잃어버린 시간을 알아보고, 그 시간의 이름을 부르면 그것은 자유를 찾는다. --- p.127 책을 읽는 내내 발자크의, 플로베르의 리듬에 길들었던 우리 내면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그들이 말하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이런 욕망을 막아서는 안 된다. 그것이 지속되는 한 일정 시간 그것을 허용해야 한다. 즉 의도적 모작을 함으로써 그것이 지나갔을 때는 다시금 본인의 목소리를 낼 수 있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작가는 평생 의도하지 않은 모작만을 계속하는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다. --- p.187 제게 소설은 평면 심리학이 아닌 시간 속에서의 심리학과 같습니다. 저는 시간이라는 보이지 않는 본질을 끄집어내고자 했고, 그걸 가능케 하기 위해서는 그 경험이 지속성을 띠어야 했습니다. 제 소설의 마지막에는 첫 번째 권에서 완전히 다른 세계에 속했었던 두 인물이 결혼하는 것과 같은 사소한 사회적 사건을 통해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드러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 p.241~242 이런 측면에서 보면 제 소설은 일련의 ‘무의식에 관한 소설들’을 다룬 이론서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제가 원했다면 ‘베르그송 식의 소설들’이라고 홍보했을 수도 있었겠지요. 당연한 얘기지만 어느 시대에나 문학은 당대에 유행하는 철학을 따르기 마련이니까요. 하지만 그 표현은 제 소설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 작품은 의도적 기억과 비의도적 기억의 차이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죠. --- p.243 문체는 몇몇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저 미사여구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문체는 기술적인 문제조차도 아닙니다. 문체는 화가들에게 있어 색과 마찬가지로 세상을 보는 방식이자,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고 오로지 각자만이 보는 고유의 우주를 드러내는 것입니다. --- p.2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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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칼럼, 서문, 편지, 수필 등
다양한 글을 통해 만나는 프루스트의 내면세계 이 책은 총 4개의 부로 구성되어 있다. 프루스트의 개인적 면모를 들여다볼 수 있는 〈‘나’, 프루스트〉, 러스킨 번역가로서 나름의 문학론을 펼치는 〈존 러스킨과 성당〉, 당대 사교계의 중심인물이자 문예평론가로서 썼던 여러 서문과 서평, 문예론을 모은 〈독서〉, 프루스트 자신이 작품의 내용과 이후의 집필 계획을 직접 설명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나’, 프루스트〉에서 우리는 인간 프루스트, 개인 프루스트를 만날 수 있다. 그는 주변인들에게 일어난 사건을 보고 어머니와 할머니에 대한 깊은 사랑을 드러내는가 하면 여러 질의응답을 통해 삶의 가치관을 표출하기도 한다. 책과 같은 제목의 「어느 존속 살해범의 편지」에서 프루스트는 이전에 몇 차례 편지를 주고받은 적 있는 지인의 죽음을 신문 기사로 접한다. 섬세한 영혼의 소유자인 지인이 어머니를 살해하고 자살했다는 소식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이 존속 살해범에게 연민을 느낀다. 제대로 된 직장도 없이 병약한 자신이 어머니의 근심거리라고 생각했던 프루스트는 이렇게 말한다. “근원적으로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근심을 안김으로써, 걱정으로 가득한 애정을 불러일으킴으로써 매일매일 그들을 불안에 떨게 하고, 나이 들게 하고, 결국은 그들을 살해한다.”(35쪽) 〈존 러스킨과 성당〉은 존 러스킨에 대한 애정을 엿볼 수 있는 부분이면서 프루스트 자신의 문학론을 살펴볼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러스킨의 책을 직접 번역 소개할 만큼 큰 영향을 받았음에도, 옮긴이 서문에서 러스킨의 우상숭배를 가차 없이 비난하는 모습을 보면 그가 자신만의 문예론을 얼마나 강고히 확립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프루스트가 번역 작업을 통해 확보한 ‘러스킨 전문가’라는 명성보다 더 값졌던 것은 ‘성당’이란 존재의 재발견이다. 그는 수 세기에 걸쳐 완성되는 성당이라는 건축물에서 이상적인 예술의 양상을 보았다. 즉 시간이라는 요소가 가미된 종합적 예술 작품으로서 자신의 소설 또한 성당과 같은 구조를 갖추리라 생각하고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이를 구체화한다. 〈독서〉에는 프루스트가 여러 책에 쓴 서문과 서평이 실려 있는데, 여기서 그의 다양한 문학적 시도들을 만날 수 있다. 『생트뵈브에 반박하여』 서문에서 그는 전기적 비평의 대표자였던 생트뵈브를 비판한다. 하지만 그보다 이 글이 더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여기에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번째와 마지막 에피소드가 언급된다는 사실 때문이다. 소설을 집필하기도 전에 그의 머릿속엔 이미 작품의 처음과 끝이 모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그는 형식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글쓰기를 보여주는데, 이를테면 어린 시절부터의 친구인 자크에밀 블랑슈가 쓴 『화가의 이야기』 서문에서 어린 시절 자주 가곤 하던 외종조부 댁의 인상과 더불어 자신의 유년기를 섬세하게 묘사한 것이 그 예이다. 마지막 부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는 이 대작 소설에 관한 프루스트의 생각과 계획을 직접적으로 읽을 수 있다. “요즘 아파트에 넣기에는 너무 큰 양탄자를 가지고 있어서 그것을 어쩔 수 없이 잘라버린 사람과 같은 처지입니다”(241쪽)라는 말은 너무 긴 분량 때문에 완간된 형태로 한 번에 책을 출간하지 못한 그의 안타까운 심정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첫 권을 출간했을 당시 평단과 독자의 무관심 속에서도 그는 소설이 나아갈 방향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고, 그 확신은 두 번째 권이 출간되었을 때 공쿠르상 수상이라는 반응으로 돌아온다. “예술가가 우리에게 주는 즐거움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의 또 다른 우주를 보여주는 데 있습니다”(246쪽)라는 프루스트의 말처럼 이 산문집은 많은 독자들에게 그가 빚은 세계에 다가서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토록 보편적인 요소들을 그토록 특별한 그만의 방식으로 구체화한 프루스트의 세계에 한 걸음 가까이 다가가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