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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판 저자 서문
들어가며 제0장 귀를 기울일 만한 말은 어디에 있는가 제1장 지식인은 왜 침묵하는가? 제2장 일본의 쇠퇴를 멈추기 위해서는 제3장 ‘있을 수도 있었을 세계’에 관해서 생각하는 지성 -무라카미 하루키의 세계- 제4장 글로벌리즘에 ‘끝’은 있는가? 제5장 요시모토 다카아키의 지혜를 어떻게 후세에 계승할 것인가 후기를 대신해서 -대립 속에서 화해의 말을 계속 찾는다는 것 한국어판 저자 후기 옮긴이의 말 |
Tatsuru Uchida,うちだ たつる,內田 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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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론이 폭주하는 것은 그것 때문이야. 그럴 때는 정말로 눈 깜짝할 사이에 수십만, 수백만이 똑같은 말을 하게 되지. 그런데 자신보다 강한 사람과 무서운 사람이 ‘입 다물어!’라고 일갈하면 전원이 일제히 입을 다물어버려.
여론에는 ‘최후의 한 명으로 남더라도 나는 이 말을 계속하겠다’고 하는 개인이 없어. 나는 여론을 그렇게 정의해. 그리고 지금 언론은 ‘여론’을 말하는 장치가 되었다고 생각해. 민주주의 이전은 어떤 시대였는가 하면 독재자의 시대 혹은 귀족정치의 시대였지. 그 시대로부터 빠져나오는 원동력으로서 데모크라시는 발전해온 거야. 거기까지는 좋았어. 그런데 이제는 데모크라시가 ‘무책임의 원흉’이라고 해야 할까, ‘무책임의 체계 그 자체’처럼 되어버렸어. 데모크라시로부터 나오는 말이 여하튼 가벼워지고 만 거지. 우리는 데모크라시 ‘이후의 뭔가’를 발견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고 생각해. 그리고 그런 절호의 시스템은 아직 없을지도 몰라. 근대의 데모크라시라는 것은 ‘그러한 특수한 시대의 산물’이라고 생각해. 그래서 데모크라시가 적절한 정치 원리이기 위해서는 ‘개인이 일반 의지를 내면화해야 한다’는 조건이 필요하지. 그 조건이 데모크라시를 작동시키고 유지되게 해. 그런데 이미 이제는 그러한 조건은 성립하지 않잖아. 지금의 민주 국가에서는 국가의 ‘일반 의지’와 ‘국민 한 명 한 명의 특수 의지’가 괴리되어 있어. ‘자신이 자신이기 위해서는 조국이 이러이러한 나라이지 않으면 안 된다. 조국이 이러이러한 나라가 아니면 자신은 자신으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소수파라고 해야 하나 멸종 위기종이라고 해야겠지. 타자에 관해서 말할 때 자신이 서명한다는 것은 자신도 똑같은 장소까지 가서 거기서 어떤 행동을 했을지를 실감하는 것이라고 생각해. 이러한 태도야말로 ‘비평성이 있는지 없는지’를 나누는 분기점이라고 생각해. 지금 시대의 문제는 ‘비평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거야. 비평성이 결여되어 있다 보니까 비평이 만연하고마는 역설paradox이 벌어지고 있어. ‘말하는 게 정합성이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비상식적이다’라는 비판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해. 말하는 것은 틀리지 않았어. 그런데 좀 비상식적이다. 그래서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말이라는 게 있잖아. ‘표현의 자유’는 확실히 중요한 원리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언명(言明)이 표현의 자유라는 명분으로 옹호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그 경우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은 신체 감각밖에 없다고 생각해. ‘표현의 자유’나 ‘기본적 인권’은 추상도가 높아서 보편적인 진리라고 간주하지만 현실의 정치적 행위라는 문맥에서 사용될 때는 종종 각자 입맛에 맞게 이용되는 면이 있단 말이야. 만약 표현의 자유라는 정치적 올바름에만 매달리면 비상식적인 선동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버려. 이른바 보편주의의 딜레마지. 선동은 그 틈을 뚫고 들어오지. 비상식 이전에 비겁한 방식이야. 미국의 서해안에서 맥도날드라든지 스타벅스에 가보면 계산대에 있는 것은 흑인과 히스패닉, 손님은 백인으로 나뉘어 있어서 외부인으로서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어. 그리고 당연한 말이지만 게르만계와 백인 내에서도 빈부 격차가 벌어져서, 그 원인으로서 찾기 쉬운 것이 이민자의 임금을 낮추고 있다는 것. 이건 정말로 복잡하고 다루기 힘든 문제로 글로벌리즘의 부정적인 측면이 여실히 드러났다고 생각해. 국민국가라는, 국민을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동등하게 맞이해서 보호하는 국민국가적인 안전망이 작동하지 않게 되어 버렸어. 이민족이 국민으로서 피가 섞이는 것이 이상적인데 실제로는 한 나라 안에서 분단되고 말았지. 이 사실을 기뻐하는 것은 대기업뿐으로, 대기업은 국민국가의 틀을 가뿐히 밟고 넘어서서 거대 복합 기업이 되어 가고 있지. 무솔리니가 등장했을 때의 다큐멘터리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굉장하더군. 무기를 만드는 금속이 부족해지자 부인들이 앞을 다투어 반지와 목걸이를 내놓았고 러브레터까지 썼지. 히틀러가 정권을 잡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생각하는데 무솔리니의 경우는 단숨에 폭발했다는 느낌이었어. 무솔리니는 섹슈얼한 매력도 있어서 그것을 이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똑같은 이탈리아인들이 밀라노 광장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무솔리니의 시체에 돌을 던졌다는 거야. 물론 그 당시의 파시즘과 이번의 데모가 결코 똑같은 것은 아니지만 아무래도 동질적인 면은 있는 것 같아. 시간 축을 길게 보고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해. 감정적인 것의 최대의 특징은 그것이 장시간 지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니까. 그것이 화든 슬픔이든 시간의 경과와 함께 마모되어 가는 것이 인지상정이야. 그러다가 거기서 무엇이 이루어졌는지를 알았을 때는 이 감정은 반대 감정으로 쉽게 바뀌고 말아. 이런 현상은 전중, 전후에 세계 곳곳에서 일어난 일이기도 해. 견문이 좁은 인간은 눈앞에서 펼쳐지는 현실을 보고 곧바로, ‘이것은 전대미문의 사태’라고 안절부절못하거나 역으로 너무 기뻐서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일도 있지. 그런데 지식인은 역으로 무엇을 봐도 ‘이것은 어딘가에서 본 적이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점부터 음미해. 그리고 어떤 문맥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과거의 사례를 참조하면서 이해하려고 하지. 인터넷 세상이 되어서 ‘세상의 수십억 사람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환상을 갖게 되었지. 그래서 세상 물정 모르는 아이도 ‘이미 세상일에 대해서는 대략 간파했다’라는 우쭐함을 가지게 되었어. ‘세상일에 대해서는 구석구석 다 알고 있다’라고 진심으로 생각하고 있는 아이가 이상할 정도로 증가했어. ‘가족 같은 것 없어도 상관없다’고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예외적으로 윤택하고 안전한 사회가 실현되었기 때문이야. 가족 해체는 경제적 번영의 귀결인 셈이지. 예전에는 가난하기 때문에 가족이 딱 서로 붙어서 살았어. 그런데 윤택해지니까 모두 각자 방에 틀어박혀서 따로따로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어. 그러니까 가족 해체와 경제 성장은 일종의 맞교환인 셈이지. 어딘가에 모든 책임을 내가 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이 공동체를 건전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절대로 필요해. 그러지 않으면 공동체라는 건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기 위해서 몸을 서로 맞대고 있을 뿐인 취약한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고 언제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가를 추구하는, 따돌림의 에토스가 지배하는 숨 막히는 곳이 되고 말지. ‘돈을 버는 게 뭐가 나빠?’와 같은 생각은 틀린 감정도 아닐뿐더러 누구든지 그렇게 느끼고 있어. 그렇지만 거기에는 ‘타자’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 합리적이긴 한데 돈을 버는 재능을 좀 더 다른 곳에도 사용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 거지. 자신의 돈을 버는 재능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지도 모른다고는 생각하지 않아. 뭔가 착각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어른이라는 것은 그런 존재가 아니잖아. 성숙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으로 말하자면 단적으로 ‘좀 더 복잡한 생명체가 되는 것’이니까. 아이 때 긴급피난의 감각으로 조형한 ‘자기다움’ 같은 것에 매달려 있으면 복잡하게 될 수가 없는 거잖아. 즉 전하려고 하는 콘텐츠 이상으로 전하는 방식에 그 사람의 도량(度量)이라고 해야 할까 인격이 드러나지. 말투와 리액션에는 그 사람이 인생에서 쌓아온 경험이라든지 지성과 같은 것을 전하는 정보가 아주 많이 포함되어 있어. 그런데 그것을 읽어내는 힘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콘텐츠가 중요하다고 열을 올려 말하는 거야. 콘텐츠라고 말하니까 뭔가 있어 보이는 것처럼 들리지만 요컨대 ‘말할 거리’지. 처음에 말을 딱 놓으면 세계에 하나의 직선이 그어졌다는 느낌이 들어. 그러다 보면 그때까지 분화되지 않았던 것이 왠지 모르게 두 개로 나누어지지. 그걸 보고 또 하나의 말을 놓아 보고. 그러면 또 세계가 나누어지고, 뭐 그런 느낌으로 이야기라는 것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사실은, 독자가 제대로 이 작가가 만든 리듬에 올라타 주면 되는 거야. 리듬이 작가와 독자에게 맞으면 재미있는 작품이 되고 역으로 맞지 않으면 역시 재미없는 작품이 되는 게 아닐까. 저주도 그렇고 지벌도 그렇고 신도 그렇고 악령도 그렇고 결국은 인간이 발명한 개념이야. 그래서 거기에는 철저하게 인간적인 의미가 있어. 신 그 자체는 인간의 지력을 넘어서 있지만 ‘인지(人知)를 넘어선 신이라는 개념’은 인간이 만든 것이지. 이것이야말로 인지의 결정판이라고밖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어. 인간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이 우주에 의미의 얼개를 제공하기 위해서 그런 개념을 발명한 거야. 인간들이 각자 나름대로 평화롭게 공동적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환상적인 장치가 필요하게 돼. 개인이 자신의 신체를 그대로 드러내서 세계와 자연과 타자와 관계를 맺을 수는 없어. ‘국민’이라든지 ‘국가’ 같은 것은 개인과 세계 사이를 가르는 일종의 차폐막 같은 것이야. 갑옷 같은 것이지. 갑옷이기 때문에 무겁고 방해가 되고 삐걱삐걱 소리가 나고 손질 하는 것도 예사일이 아니지. 그런데 이것이 없어서 맨몸이 ‘그대로 드러나게 되면’ 인간은 살아갈 수가 없어.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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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가 시작됨과 함께 우치다 타츠루라는 ‘사상가’가 출현했다. 나는 우치다 씨의 등장으로부터 얼마 안 있어 우치다 씨의 책을 읽고, 정말로 깜짝 놀랐다. 그리고 구할 수 있는 우치다 씨의 책을 전부 모아서 읽었다. 그 감상을 한마디로 한다면 ‘이런 사람을, 계속해서 계속해서 기다리고 있었다’이다. - 다카하시 켄이치로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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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는 프랑스 현대사상을 비판적으로 섭취했을 뿐 아니라, 그것을 삶의 지식으로서 자신의 살과 피로 만들었다고 느끼는 것은 나 한 사람만이 아닐 것이다. - 가시마 시게루 (불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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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치다 타츠루는 사상의 안마사이다. 당신의 뭉친 곳을 풀어준다. - 마스다 사토시 (음악미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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