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이 정화되는 기분으로 읽었다. 글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좋을까. 이 책은 먼저 지금 우리에 필요한 생생한 고발이다.
--- p.4
나는 ‘아버지폭력’의 피해자다.(‘아버지폭력’은 말 그대로 아버지가 자녀에게 양육 과정에서 물리적인 위해를 가하는 모든 폭력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한 말이다. 기존의 ‘가정폭력’이라는 단어로는 그 뜻을 정확히 표현하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새롭게 규정한 개념이다.)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주 어린 시절부터 아빠로부터 맞으면서 자랐고, 스물세 살이 되던 해에 폭력을 못 이겨 아빠를 경찰에 신고했다. 이후 관련 기관의 도움으로 가정폭력 피해자 쉼터에 들어가 6개월을 보냈고 시설과 제도의 지원을 받아 가해자가 있는 공간으로부터 독립해 나만의 안전한 공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내가 집을 나온 것도 아빠가 그간의 폭력에 대해 반성의 의지를 보여준 것도 아직은 모두 하나의 시작일 뿐이지 우리 가족은 지금도 서로 날선 말을 주고받을 때가 있다. 자주 부딪치고 갈등한다.
--- p.8
더럽고 추하고 검은 기억부터 슬프고 애틋하고 순수하던 기억까지 다 기억해서 보존하고 싶다. 많은 기억들 중에서 보기 좋은 것들만 선별해서 ‘이게 바로 진짜 나야’ 하고 우기고 싶지도 않다. 자기기만, 자기연민, 자기혐오 그 어떤 것에도 매몰되고 싶지 않다. 나는 그냥 솔직하고 자유로워지고 싶다.
--- p.11~12
언어가 통한다고 마음까지 통하는 건 아니다. 같은 언어로 이야기한다고 해서 모든 말이 이해되는 건 아니다. 내가 그때 간절히 바랐던 건 좋은 집도, 좋은 음식도, 많은 돈도 아니고 다만 맞지 않고 사는 안전한 생활이었다.
--- p.30
“가을아 너 좀 웃어.”, “너는 말하는 게 왜 그렇게 힘이 없고 느려?”, “넌 항상 지쳐 보여. 힘들어 보여.” 그런 말을 내게 했을 때 나는 뭐라고 해야 했을까.
“나도 그 문제에 대해 오랜 시간 생각해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겪은 이런저런 일들 때문인 것 같아. 나 어려서부터 많이 맞고, 억압당하고 비난받아 왔거든. 그 시간 동안 만들어진 감정과 생각들이 나의 표정, 말투, 눈빛, 행동에 스며들어 있나 봐.”
이렇게 말을 해야 했던 것일까. 아니. 나는 그냥 그 말을 내뱉는 목소리 앞에서 씁쓸하게 웃고 “그러게.” 하면서 얼버무리고 다른 주제로 이야기를 전환하는 수밖에 없었다.
--- p.31
김현경 작가가 쓴 『사람, 장소, 환대』에 따르면 ‘체벌에 동의한다는 것은 너의 몸은 온전히 너의 것이 아니며 나는 언제든 너에게 손댈 수 있다는 가르침을 수용한다는 뜻이 되어 모욕당하는 자가 모욕에 동의하는 순간 모욕은 더 이상 모욕이 아니다. 그것은 의례와 질서의 일부가 된다.’고 한다. 나와 동생들은 폭력에 저항할 힘을 잃고, 폭력이 잘못됐다는 생각도 잃었다. 그리고 의도치 않았지만 “당신이 폭력을 쓰는 이유에 동의합니다. 맞을 만한 짓을 했습니다.” 하고 암묵적으로 폭력에 동의하는 것처럼 되었다.
--- p.33
나는 무엇보다 나보다 어린 동생들을 살려내고 싶었다. 아빠가 나와 동생들의 목을 죄어올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동생이 다시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육교 난간에 서지 않게 하려면 내가 뭘 할 수 있을까. …당장 바뀌는 것이 없더라도 그날그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잊지 않고 꼭 하려고 노력했다. 실어증 걸린 것마냥 말을 잃어버렸는데 던져진 질문들을 천천히 고민하고 그것에 대답을 해가며 아주 천천히 내 언어를 찾아갔다.
--- p.111~112
아빠는 내 눈앞에서 우리를 때릴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때리고, 우리는 맞아야 할 의무가 있는 사람들처럼 맞고 있는데 그런 권리나 의무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생각했을까? 그 사람들처럼 되려면 어떻게 행동하고 말해야 할까? 하는 질문들에 대한 답이 그 속에는 있을 것만 같았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그 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오래된 건물을 부수듯 가지고 있던 부정적인 사고를 부수고, 재조정하고 새로 내면세계를 짓고 싶었다. ‘폭력이 나쁘다.’라는 말이 내 세상에서는 하나도 당연하지 않았기 때문에 증거가 필요했다. 나는 지식과 경험, 지혜가 아빠가 휘두르는 폭력에 대응할 방패와 무기가 되어 나를 보호해줄 거라고 믿었다. 아마 그런 것들이 간절하게 필요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세상이 무섭고 공포스럽기만 한 곳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넘어진 자리를 툭툭 털고 다시 걸어가 볼 수 있는 곳처럼 느껴졌다면 그렇게 간절하지는 않았을 거다.
--- p.112~113
“진형아, 나도 매일 버틸 뿐이야. 네가 집을 나가고 내가 뭘 그렇게 즐거울 일이 있겠어. 그냥 한번 웃고 말면 말았지. 나라도 정신 차리고 미래 생각해야지. 그래야 널 도와줄 수도 있지.” 그렇게 대답하긴 했지만 ‘왜 나랑 같이 불행하지 않아? 어떻게 그럴 수 있어?’라고 말하는 것만 같은 동생을 보고 있는 게 힘들었다. 나 역시 그 순간까지도 한 번도 마음을 편하게 가져본 적이 없다. 나도 매일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안고 사는 기분으로 경계하고 긴장하며 사는데, 더 큰 폭탄을 가지고 사는 존재를 보면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 무렵 일기장에 쓴 이런 조각 글도 나의 그런 마음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제 가족 걱정 말고 내 인생 걱정하고 싶다.
쫓기는 거 싫다. 무서운 거 싫다.
따뜻한 데서 살고 싶다. 진짜.
이제 추운 건 그만해. 나 그냥 돈 걱정할래.
뭐해먹고 살지 그런 거 걱정할래.
그니까 그만 찾아와. 나도 숨 좀 고르고 살고 싶어.
이런 상황에서도 바르게 가는 사람 있으면
누가 알려줬으면 좋겠다.
없으면 안 되는데
--- p.145~146
싸늘하게 식은 감정과 두려움, 망설임이 혼재된 마음으로 핸드폰으로 손을 뻗어 112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는 손이 계속 떨려왔다. 핸드폰을 손에서 놓칠 것만 같아서 두 손으로 붙들었다. 이 와중에 114를 눌러서 옆에 있던 여름이가 112에 해야 한다며 번호를 교정해주었다. 순간 다소 정신이 없었던 것 같다. “무슨 일이시죠?”
--- p.151
‘애초에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좋은 선택지가 있었나? 행복할 기회가 담긴 선택지라는 게 애초에 우리에게 있었어?
--- p.153
한 사람의 우울과 슬픔을 감당할 수 있을까? 생각이 아니라 행동으로 도울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이 내가 했던 무수한, 그리고 무기력한 질문 중에 있었다. 전보다 강해졌으니, 의식도 성장했으니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어려움이 와도 견뎌낼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다가도 막상 폭력이 닥쳐오면 정신이 공포와 두려움과 흐물흐물해지면서 그냥 쓰러지고만 싶어졌다. 현실이, 나의 나약함이 원망스러웠다. 불안하고 힘들어서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폭력도 무섭고 동생이 사라지는 것도 무서웠다. 금방이라도 정신줄을 놓고 안 좋은 생각을 해버릴 것 같은 동생을 바라보는 게 힘들었다. 같이 진흙탕으로 빠져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았다.
--- p.144
인간은 고통 속에서 성장한다느니 그런 말을 하고 싶지는 않다. 고통 속에서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이렇게 고통스러운 마음을 통해서만 강해질 수 있는 거라면, 강해지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편안한 삶만 주시면 안 돼요? 하고 되묻고 싶었다. 한 개인이 견디기에 압도적인 고통이 있다. 내 고통이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많은 고통들을 보고 있으면 고통스러운 일들이 참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은 고통을 딛고 성장하고 고통을 이겨내서 큰 사람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지만, 어떤 사람은 고통 속에서 그저 고통을 느낄 뿐이다. 좌절하고, 절망하고, 아파하고, 사람에 대한 믿음을 잃고, 세상을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채로 그대로 살아갈 뿐이다. 그냥 그렇게 될 뿐이다. 성장이 아니라 삶의 무의미함을 견디는 일에 무뎌질 뿐이다.
--- p.187
우리 여기서 우리 세상을 만들자. 규칙이나 행동 규범을 우리가 다시 새로 만드는 거야. 그리고 진흙탕에 빠졌던 사람들이 이 땅에 찾아오면 언제든지 반겨주자. 그리고 우리는 저 사람들처럼 이 땅에 제한 같은 건 두지 말자. 진흙탕에 온몸이 빠져본 사람만 들어올 수 있다느니, 발만 담가본 사람들은 올 수 없다느니 그런 말은 하지 말자. 그냥 그 사람 이야기를 들으면서 온몸의 수분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울고, 그 눈물을 머금고 자란 땅에서 난 것들을 먹고 마시자. 거기서 만나자.
--- p.244~2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