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손에 들었다면 아마도 여러분은 트라우마를 직접 경험했거나 목격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혹은 가족이나 소중한 지인에게 그런 경험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이런 주제의 책을 통해 트라우마의 고통으로부터 회복과 변화를 얻고 싶은 마음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트라우마를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마음, 그저 다 지나간 일처럼 묻어 두고 싶은 마음도 있을 것입니다. 묻어 두고 싶지만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남아 있는 상처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현실을 고려해 보면, 지금 이 책을 들고 트라우마의 주제를 고민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매우 용기 있는 회복의 한 걸음입니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우리의 트라우마를 치유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의 때일 수도 있습니다.
트라우마의 고통이 있는 사람이 하루아침에 그 고통에서 벗어나는 경우는 없습니다. 그래서 트라우마입니다. 짧은 시간에 극복할 수 있는 문제는 트라우마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충분히 애통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진정한 치유와 성장은 충분한 애통의 시간이 지난 후에 비로소 가능합니다. 어두움 한가운데서는 주변이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어두움을 지나고 난 후 돌이켜 볼 때 비로소 우리는 그 어두움 가운데서도 함께하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볼 수 있습니다.
--- p.32
트라우마는 기회가 아닙니다. 트라우마는 상처이고 아픔입니다. 트라우마가 아니라 악을 선으로 이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새롭게 하는 힘입니다. 트라우마가 기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의 기회입니다. 트라우마가 성숙의 발판이 아니라, 하나님이 성숙의 근원입니다.
--- p.37
트라우마의 고통은 들려져야 하고 공감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다시 회복되고 새롭게 변화되어야 합니다. 트라우마 너머에계신 하나님의 섭리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그분의 일하심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합니다. 트라우마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공동체와 함께 안전하고 건강하게 다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 문제와 아픔을 묻어 두지 마십시오. 홀로 괴로워하지 마십시오. 당신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한 형제와 자매의 아픔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된 공동체 전체의 아픔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공동체와 함께 그 문제를 들여다보고 회복과 변화, 성장의 여정을 시작하기를 소망합니다.
--- p.60-61
트라우마로부터 그분의 자녀들을 구원하시는 이는 그리스도시며, 트라우마 가운데 모든 신자가 닮아 가야 할 이도 그리스도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상황 속에서 우리가 닮아야 할 가장 온전한 인간성의 완성이십니다. 그리스도는 인간적인 관점에서 십자가 고난이라는 트라우마적 사건을 경험하셨지만, 어떤 트라우마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음은 트라우마의 현실 속에서도 회복과 성장을 경험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인 치신 하나님의 치유 방법입니다.
--- p.89-90
십자가 위에서 말없이 고난당하신 그리스도를 묵상할 때 우리는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고난 중에 그리스도가 침묵하심은 그분이 우리를 고난 중에 내버려 두심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히려 그분이 우리의 고통을 함께 지고 계시다는 “존재의 충만함(fullness of presence)”을 나타냅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의 침묵은 트라우마의 고통으로 할 말을 잃어버린 이들을 그분이 결코 혼자 두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 고난의 무게를 함께 지고 계심을 나타내는 강력한 치료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트라우마의 무게에 넘어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강하고 담대하게 트라우마 가운데서도 성도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지금까지 우리와 함께하셨고, 영원토록 단 한순간도 우리를 떠나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섭리 밖에 있는 고통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 p.103
우리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수용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겸손히 우리의 삶 가운데 초청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상처를 삶의 일부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상처를 타인의 회복과 변화, 또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루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면, 우리의 트라우마 경험은 비록 너무나 고통스럽고 다시는 경험하고 싶지 않은 일임에는 분명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도구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회복과 성장은 부인하거나 회피함으로 얻을 수 없습니다. 회복과 성장은 트라우마의 본질에 직면하고 그것을 내 삶으로 수용할 때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 그렇게 그리스도 닮음을 실천하는 성도에게 있어서 트라우마의 흔적은 십자가의 흔적이 됩니다. 성도의 트라우마는 마치 그리스도의 몸에 새겨진 못과 창 자국과 같습니다.
--- p.137-138
우리가 죄 사함의 은혜를 가장 분명하게 경험하는 순간은 언제입니까? 그 순간은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날 때입니다. 죄 없으신 그리스도가 죄인 된 우리를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는 자신의 죄가 얼마나 큰지 비로소 알게 되고, 우리를 향한 그분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 알게 됩니다.
아무리 부드럽게 지적해도 누군가가 죄를 지적하면 우리는 수치심과 죄책감에 방어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를 대신 지고 죽으신 그분의 십자가 사랑과 용서 앞에 감격할 때, 우리는 죄를 부인하거나 숨기려던 마음을 내려놓고 그분 앞에 우리의 죄를 분명하게 직시하게 됩니다. 더 나아가 그분의 십자가 고통에 애통하면서 자기 죄에 대한 정서적 혐오감을 갖게 됩니다. 그렇게 죄를 인지하고 죄를 미워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진정으로 죄 행위를 삶에서 제거하는 구체적인 실천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 p.156-157
법정적 용서는 우리의 권리가 아닌 오직 하나님의 주권입니다. 따라서 법정적 용서는 공의로우신 심판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심리적 용서는 분노와 미움, 복수의 마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 내려놓음으로써 그 부정적 마음으로부터 상처 준 대상을 놓아 줄 뿐 아니라 용서하지 않을 때 경험하는 부정적 감정의 멍에로부터 자신을 놓아 주는 실천입니다. 관계적 용서는 혼자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상처 준 사람의 진정한 사과, 책임 있는 변화, 적절한 배상이 없는 상태에서 관계적 용서가 시도되는 경우, 오히려 2차 트라우마를 야기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하지 않은 선택이 됩니다.
따라서 트라우마의 현실 가운데 실제적으로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용서의 모습은 법정적 용서는 하나님께 맡기고, 관계적 용서가 항상 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하며 지혜롭게 행하고, 심리적 용서를 통해 부정적인 감정의 늪으로부터 자유를 얻는 것입니다.
--- p.187-188
트라우마 가운데 있었을 때 우리는 누군가의 돌봄이 필요했습니다. 누군가의 위로와 공감, 돌봄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섬김의 실천을 하면서부터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누군가에게 돌봄을 제공해 주는 사람이 됩니다. 돌봄을 받는 자에서돌봄을 주는 자로서의 삶을 새롭게 시작하는 것입니다.트라우마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현재 트라우마를 경험하고 있는 타인의 존재는 그저 지나치는 이방인이 아닙니다.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트라우마를 둘러싼 고통, 불의, 아픔을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비슷한 아픔을 지닌 이들이 어떤 마음인지, 어떤 어려움이 있는지, 어떤 필요가 있고, 어떤 돌봄이 적절한지 경험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누구보다 더 깊은 공감과 위로, 구체적인 돌봄을 제공할 수 있습니다.
--- p.208-209
성도 된 우리는 그리스도의 한 몸 된 교회입니다. 교회의 한 지체가 경험하는 트라우마는 공동체의 경험과 분리되지 않습니다. 한 지체의 트라우마 문제는 공동체 전체의 문제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이룸으로써 서로를 향한 사랑과 돌봄을 실천하는 공동체의 선한 의식을 깨우고, 오늘날 사회에 만연한 악한 구조와 문화에 직면하여 개혁하는 하나님 나라를 향한 교회의 선지자적 사명을 일깨워 줍니다.
따라서 교회는 한 지체의 트라우마 문제에 직면하면서 공동체의 역할과 사명을 돌아보고 구체적인 돌봄과 섬김, 개혁을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는 한 지체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지고, 서로 돌보며,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 p.230
고통당하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정론에 대한 지식적 논쟁이 아닙니다. 그들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어떤 해석이 아니라, 위로와 공감이며 애통할 수 있는 안전한 공간과 진실한 관계, 실제적인 돌봄입니다. 트라우마의 현실 앞에서 벌어지는 지식적 신정론 논쟁은 고난당하는 욥에게 그의 친구들이 범했던 동일한 오류를 범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신정론 문제의 본질은 지식적이라기보다 실천적입니다. 그렇다면 신정론 문제는 이성적 논쟁으로 접근하기보다 악의 현실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선하심과 전능하심을 드러내는 실천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이런 접근을 ‘실천적 신정론’(practical theodicy)이라고 합니다.
--- p.242
기독교 병리학(Christian pathology)은 트라우마가 깨뜨리는 다차원적인 인간의 창조 질서를 이해하고 진단하는 데 도움을 줍니다. 기독교 병리학은 성경을 중심으로 기독교 전통의 유산을 진지하게 탐구하고, 현대 심리학의 합리적인 발견들을 창조 은혜 안에서 비평적으로, 또한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인간 병리에 대한 전인적 진단 체계입니다.
기독교 병리학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도록 창조하셨으나 타락으로 왜곡된 인간의 현실, 그러나 여전히 섭리 안에서 하나님이 운행하고 계신 이 세상에 대한 성경적 이해를 바탕으로 합니다. 이 접근은 영적 현실을 고려하지 않는 자연주의적 관점이나 모든 세속적 관점을 거부하는 극단적인 영적 환원주의를 피합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 병리학적 접근은 성경의 계시를 중심으로 자연과학적 인간 이해를 일반은총의 범주 아래 비평적으로, 건설적으로 활용하는 관점을 갖고 있다는 것입니다.
--- p.261-262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으신 적이 없고, 하나님이 주인 되지 않으신 적이 없습니다. 고난의 순간에도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하시고, 고난 너머 하나님의 비밀스럽고 놀라운 섭리를 갖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고통을 바라볼 때, 우리는 고통 중에도 일하시는 하나님의 크심을 보게 되고, 고통 속에서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고, 고통 가운데 우리를 위로하시고 보호하시고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풍성한 삶은 고통이 없고 문제가 없는 삶이 아닙니다. 성도의 풍성한 삶은 그런 삶의 정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돌보심을 경험하며 말씀과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입니다.
--- p.295-2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