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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순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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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6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248쪽 | 268g | 115*210*14mm
ISBN13 9788932922607
ISBN10 8932922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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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이라는 아마도 좀 더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오늘날도, 열다섯 난 딸이 따로 검열하지 않은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도록 허락하는 것이 현명한 일인가에 대해 의심하는 부모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 아버지는 허락했다. 몇몇 사실에 대해, 그는 아주 간략하게, 아주 수줍게 언급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읽고 싶은 것을 읽으라〉고 말해 주었고, 그 자신의 표현을 빌리자면 〈초라하고 무가치한〉, 하지만 분명 다양했던 그의 많은 책들을 허락받지 않고도 다 읽을 수 있었다. 좋아하는 책들을 좋아하니까 읽는다는 것, 실제로 좋아하지 않는 책들을 좋아하는 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 그것이 독서에 관한 그의 유일한 지침이었다.
--- p.19~20 「레슬리 스티븐, 집 안에서의 철학자」 중에서

유령 하나를 찾아다니는 이 짧은 시간 동안, 말다툼이 수습되었고, 연필을 샀으며, 길거리는 완전히 텅 비었다. 삶은 꼭대기 층으로 물러났고, 가로등이 켜졌다. 인도는 물기 없이 단단했으며, 길은 망치로 두드려 편 듯한 은빛이었다. 그 황량함을 지나 집으로 걸어가면서, 난쟁이와, 맹인과, 메이페어 저택의 파티와, 문구점의 말다툼을 되새겨 볼 수 있다. 그 각각의 삶을 우리는 그저 조금 뚫고 들어가 볼 수 있을 뿐이지만, 사람이 하나의 마음에만 묶이지 않으며 잠시나마 다른 사람들의 몸과 마음을 취할 수 있다는 환상을 가져 보기에 충분하다. 세탁부도, 술집 주인도, 거리의 가수도 되어 볼 수 있다. 자아라는 곧은 길을 벗어나, 검은딸기나무와 굵은 나무둥치들 아래로 이끄는 저 오솔길들을 따라서 저 야생의 짐승들, 곧 우리 동료 인간들이 사는 숲 한복판으로 들어서는 것보다 더 큰 기쁨과 경이가 있겠는가?
--- p.186 「런던 거리 쏘다니기」 중에서

내 생각에 지금처럼 아름다운 순간에는 항상 일말의 초조함이 깔려 있는 것 같다. 심리학자들에게나 설명을 구해야 할 일이다. 문득 쳐든 눈길이 기대를 한참 넘어서는 아름다움에 압도될 때 ─ 지금은 배틀 위로 분홍 구름들이 지나가고, 들판에는 대리석처럼 얼룩무늬가 져 있다 ─ 우리의 감각은 마치 공기를 불어넣어 팽창한 풍선처럼 급속히 부풀었다가, 모든 것이 최고조로 부풀어 아름다움, 아름다움, 아름다움으로 팽팽할 때에, 바늘에 살짝 찔리듯이 터져 버리고 만다. 하지만 무엇이 바늘인가? 내가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바늘이 자신의 무력감과 연관이 있다는 것뿐이다. 나는 아름다움을 파악할 수 없고, 표현할 수도 없고, 그저 압도될 뿐이다. 그 어디쯤에 불만이 도사리고 있다. 그것은 사람의 본성이 자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에 대한 지배력을 요구한다는 생각과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지배력이란 지금 서식스 위쪽 하늘에서 보이는 것을 다른 사람도 공유할 수 있게끔 전달하는 능력을 뜻한다. 또다시 바늘이 찔러 오고, 또다 시 기회를 놓치고 만다. 왜냐하면 아름다움이 오른쪽에, 왼쪽에, 뒤쪽에도 펼쳐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항상 달아나기만 했다. 욕조를, 호수를 가득 채울 만한 급류에 기껏해야 골무 정도를 내밀 수 있을 뿐이었다.
--- p.190~191 「서식스의 저녁: 자동차 안에서 한 생각들」 중에서

한 여성의 목소리가 〈여성들은 정치에 대해 입도 뻥끗 못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내각에는 여성이 한 명도 없고, 책임 있는 어떤 직책에도 여성이 없다. 아이디어가 효과를 발휘하게 할 만한 위치에 있는 모든 아이디어 메이커들은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생각할 힘이 빠져 버리고,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들기도 한다. 왜 머리를 베개에 파묻고, 귀를 틀어막고, 아이디어를 만드는 따위의 헛짓을 그만두어 버리지 않는가? 왜냐하면 장교 테이블이나 회담 테이블 말고도 다른 테이블들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개개인이 생각하는 일, 티 테이블을 둘러싸고 생각하는 일이 부질없어 보인다고 해서 포기해 버린다면, 영국 청년들에게 어쩌면 소용이 될지도 모르는 무기 하나를 주지 않고 내버려 두는 셈이 되지 않겠는가? 우리가 우리의 무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능력을 발휘해 봤자 비난과 경멸을 당하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정신적인 싸움을 그치지 않겠다〉고 블레이크는 썼다. 정신적 싸움이란 시류에 휩쓸리지 않고, 오히려 시류에 역행하여 사고하는 것을 의미한다.
--- p.215~216 「공습 중 평화에 관한 생각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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