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이 두 번째 은둔 생활이다. 3년의 시간이 100m 달리기를 하듯 빨리 지나갔다. 세상과 거리를 두고 살면 모든 게 순식간에 흘러간다. 유미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첫 번째 은둔 생활도 그랬으니까.
서랍장 앞에 앉은 유미가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어느덧 머리카락이 어깨 위까지 자라 있었고, 앞머리는 눈을 거의 다 덮은 상태였다. 애매한 길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유미는, 서랍에서 은색 가위를 꺼내 익숙한 듯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다. 어깨 위까지 자란 머리카락은 귀 바로 아래까지 자르고 앞머리는 눈썹 높이까지 잘라 냈다. 그리고 완성된 모습에 만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유미가 바닥에 떨어진 머리카락을 주워 안방을 나왔다. 잠시흙 마당을 걸으며 머리카락을 휙 던지고는, 마당 한가운데 서서 살며시 두 눈을 감는다. 주먹 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싼 뒤 가슴팍에 가져다 대며, 그 자세로 무언가를 조용히 속삭였다. 그리고 몇 초 뒤 다시 눈을 떴다.
마당의 모습은 그대로였다. 한쪽의 수돗가도 뒤쪽의 기와집도 모두 그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바뀌지 않은 풍경을 보며 유미가 허탈한 듯 피식 웃었다. 발끝으로 바닥을 툭툭 차면서 홀로 밀려드는 아쉬움을 달랬다.
두 가지의 마음이 그녀를 혼란스럽게 했다. 다시는 마법을 할수 없다는 서운함과 마법 능력이 사라져 다행이라는 안도감. 전혀 접점이 없어 보이는 두 마음이 가슴 속에 공존하며 살고 있었다.
유미는 디딤돌에 올라 신발을 벗고 툇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에휴.”
부스스한 단발머리로 한숨을 푹 내쉬고는 습관처럼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다시 꺼낸 손에는 검은색 머리끈이 함께 놓여 있었다. 그것을 보자 마음이 한결 편안해지면서 이유 모를 포근함이 그녀를 감싸 왔다. 이 머리끈을 볼 때면 항상 그랬다.
--- 「프롤로그」 중에서
주원은 새벽 2시만 되면 밖으로 나가 거리를 걸었다. 일종의 산책이었다. 하루 종일 환기가 잘되지 않는 좁은 집 안에서 생활 하는 탓에, 건강이 걱정되어 하루 한 번 바깥 공기를 마시는 시간을 정해 놓았다. 딱히 산책을 방해하거나 변수가 될 만한 일은 없었기에, 지금까지 별 탈 없이 그 계획을 잘 실천해 왔다.
방으로 가 옷걸이에 걸려 있는 얇은 외투와 모자 그리고 마스 크까지 착용하고 거실로 나왔다. 여전히 소파에 누워 있는 휴대 폰도 외투 주머니에 넣었다. 하지만 바로 출발하지는 않았다. 주원은 그 전에 거실을 가로질러 커튼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커튼을 살짝 걷어 내자 숨겨져 있던 베란다 창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밤거리는 곳곳에 설치된 가로등으로 환하게 빛났고 드문드문 지나다니는 차들이 생기를 불어넣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길거리에, 특히 자신이 주로 다니는 곳에 사람이 있는지가 제일 중요했다.
일단 빌라 입구부터 살폈다. 창문에게 냄새를 맡으라는 듯 정수리를 갖다 댄 채 아래를 봤지만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다음은 좀 더 먼 곳을 살폈다. 빌라 마당부터 24시간 열려 있는 출입구 앞 길, 그리고 그 길에서부터 쭉 이어지는 도로변까지. 다행히 사람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주원은 지금이 적절한 타이밍이라고 판단했다. 곧장 커튼을 치고 반대편 현관으로 빠르게 걸어가 급히 신발을 신은 뒤 문고 리를 잡았다. 그리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이때가 가장 힘든 순간이었다. 머리와 가슴에서는 여러 가지 마음이 소용돌이치며 뒤엉켰다. 지난 1년간 매번 이곳에 서서 나갈지 말지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래도 그는 자신과의 약속을 잘 지켜 왔다. 새벽에 30분 동안 바깥을 걷자고 한 약속을.
--- 「1. 은둔 생활」 중에서
“그건 그렇고, 너 앞으로 어떻게 하려고 그래?”
“응?”
“언제까지 이렇게 집구석에 처박혀 살 거냐고.”
엄마의 다그침에 주원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푹 숙였다.
“아빠가 지금 벼르고 계셔.”
“무슨 말이야?”
“올해 안으로 특별한 변화 없으면 집으로 끌고 가겠대.”
“에휴.”
주원이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그나마 올봄까지 기다린다는 걸 엄마가 연말로 늦춘 거야.”
“응…….”
“엄마랑 아빠는 네가 나가서 산다길래 특별한 다짐이라도 한 줄 알았어. 대학 가는 대신 남들보다 빠르게 사회 진출을 하려 나 보다 싶어서 허락해 준 거라고. 누나랑 매형도 그렇게 우릴 설득했고. 그런데 이게 뭐야. 차라리 그냥 학교 다녔으면 어디든 대학은 갔을 거 아냐. 너 도대체 뭐 하려고 이렇게 나와서 사는 거야?”
“그, 그게…….”
“아니면 검정고시라도 봐. 그럼 기다려 줄 수 있어. 검정고시 합격하고 내년부터 무슨 일이라도 하겠다 하면 얼마든지 기다 리지. 근데 지금 넌 아무런 계획 없이 그냥 집에만 박혀 있잖아.
언제까지 이러고 살 거야. 사람도 안 만나고. 그럼 일단 밖에 나가서 사람을 좀 만나든가.”
“나갈 거야. 얼마든지 나갈 수 있어.”
정말 그렇게 생각했다. 얼마든지 마음만 먹으면 밖으로 나가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주원은 확신했다. 다만, 지금 은…….
“겨울잠을 자고 있는 거라고. 남들보다 조금 긴 겨울잠.”
“네가 개구리냐?”
엄마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감정이 격해져 토해 내듯 얘기한 주원이 금세 머쓱해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 줘.”
--- 「2. 은둔 생활을 하기까지」 중에서
유미는 또래에 비해 어른스러운 아이였다. 자신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노력했고, 눈물이 나오려 할 땐 이를 악물고 참았다. 옹알이만 겨우 하는 아기일 때도 눈물을 밖으로 토해 내지 않았다. 무얼 알고 그러는 건지 최대한 속으로 삼켰다. 그 모습에 부모님은 유미를 무척이나 안쓰러 워했다.
유미는 눈물을 흘리며 학교 운동장을 홀로 걸어 다녔다. 운동 장을 크게 세 바퀴 돌고 나자 서서히 마음이 풀리기 시작했다.
엄마와 아빠의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놀이공원에 가지 못해 아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운동장 정중앙으로 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유미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곳이 놀이공원이면 얼마나 좋을까.’ 유미가 아이다운 소원을 빌기 시작했다. 어디서 본 것인지 눈을 꼭 감은 채, 주먹 쥔 왼손을 오른손으로 감싸며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잠시 뒤, 유미가 눈을 떴다. 아이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있는 곳의 모습이 완전히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다. 정글짐이 있던 운동장 구석엔 범퍼카가 있었고, 축구 골대가 있던 자리엔 바이 킹이 있었다. 그리고 유미 앞엔 회전목마가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이게 무슨 일이지?’ 유미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두눈을 마구 비비기도 하고 감았다 뜨기도 했다. 그런데 아무리 봐도 꿈이 아니었다. 그토록 원하던 놀이공원이 실제로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유미는 망설임 없이 놀이기구로 향했다. 놀이기구를 타면서도 지금의 상황이 믿기지 않아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리둥절하면서도 행복했다. 한 시간 정도 즐겁게 놀고 나자, 갑자기 정중앙에서부터 놀이공원의 모습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 다. 그리고 이내 학교 운동장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이때부터였다. 유미는 같은 마을 친구들에게 자신의 능력을 자랑했고 매일 하루에 한 번씩 마법을 부렸다. 친구들이 원하는 장소로 데려다 주기도 했고, 자신이 가고 싶은 곳으로 만들기도 했다. 그건 마을 아이들에게 가장 크고 재미난 놀이가 되었다.
어느 누구도 할 수 없는 놀이.
시간이 흘러 그 놀이는 어른들에게까지 전파되었다. 어른들은 단순히 즐기기 위해 유미를 찾은 것은 아니었다. 각자의 사연들이 있었다. 어떤 아주머니는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 가장 좋았던 데이트 장소를 원했고, 파일럿이 꿈이었던 어떤 아저씨는 비행기 조종실을 원했다.
어느 순간 자신이 아닌 주변 사람들을 위해 마법을 쓰게 되었고, 그럴수록 유미는 행복했다. 남들을 도와주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를 그때 처음 알았다.
--- 「2. 은둔 생활을 하기까지」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