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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수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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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07월 20일
판형 양장?
쪽수, 무게, 크기 572쪽 | 594g | 124*178*35mm
ISBN13 9791155814925
ISBN10 1155814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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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무엇보다도 뉴욕은 대도시였고 대도시에서는 오페라하우스에 일찍 도착하는 것이 ‘관례에 어긋나는’ 행동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뉴랜드 아처가 사는 뉴욕에서 ‘관례’에 어긋나느냐, 그렇지 않으냐는 수천 년 전 선조들 운명을 지배했던 토템에 대한 불가사의한 공포만큼이나 중요하게 작용했다.
--- p.11

“그래요. 예전 생활은 벗어던지고 이곳에 사는 다른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요.”
아처의 얼굴이 붉어졌다.
“당신은 이곳에 사는 사람들처럼 되지 않을 겁니다.”
그가 말했다. 부인은 곧게 뻗은 눈썹을 살짝 치켜 올렸다.
“아, 그런 말은 하지 말아요. 내가 다르다는 걸 얼마나 싫어하는지 당신도 알면 좋을 텐데!”
부인의 얼굴에서 어느새 비극 속 가면처럼 침울한 분위기가 풍겼다. 부인은 몸을 숙여 야윈 두 손으로 무릎을 감싸며 아처에게서 시선을 돌려 어둡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 모든 것에서 벗어나고 싶어요.”
--- p.176

아처는 메이의 얼굴도 점차 흐려져 저렇게 불굴의 순수함을 발산하는 중년의 얼굴로 변하고 마는 것일까, 하고 자문했다. 아, 그래서는 안 된다. 메이가 저런 종류의 순수를, 상상력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생각을 봉인하고 경험에 저항하며 마음을 닫아버리는 그런 순수를 갖게 되는 것은 싫다!
--- p.234

그가 세인트오거스틴의 선교회 정원에서 깨달았듯이, 그런 깊은 감정과 상상력 결핍이 공존할 수 있다니 놀라웠다. 그러나 아처는 그때에도 메이가 양심을 짓누르는 짐을 내려놓자마자 금세 무표정한 소녀로 돌아가 그를 놀라게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메이는 새로운 경험이 다가올 때마다 최선을 다해 대처하며 삶을 헤쳐나가겠지만, 앞으로 닥칠 일을 흘낏 훔쳐보고 예견하지는 못할 것이다. 어쩌면 무지라는 그 능력 덕분에 메이의 눈동자가 그렇게 투명하며 얼굴도 한 개인이 아닌 어떤 유형을 대변하는 표정을 띠는 것이리라. 마치 시민의 미덕을 표현한 그림이나 그리스 여신의 모습을 그릴 때 모델로 선택된 사람처럼 말이다. 아름다운 피부 바로 밑에서 흐르는 피는 파괴적인 요소가 아니라 보존 용액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얼굴에 파괴되지 않을 젊음이 어린 덕분에, 메이는 매정하거나 우둔해 보이지 않고 원시적이면서도 순수해 보였다.
--- pp.302~303

이것은 ‘피를 흘리지 않고’ 목숨을 빼앗는 옛 뉴욕의 방식이었다. 질병보다 추문을 더 두려워하고 용기보다 품위를 우선시하며 ‘난동’보다 더 교양 없는 것은 오직 난동을 일으킨 사람들의 행동뿐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방식이었다. 이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르자, 아처는 무장 군대 한복판에 갇힌 죄수가 된 기분이 들었다. 그는 식탁을 둘러보며, 플로리다산 아스파라거스를 앞에 두고 보퍼트 부부를 거론하는 어조에서 그를 사로잡은 이들의 냉혹함을 짐작했다. ‘나에게 보여주려는 거야.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아처는 이렇게 생각했다. 직접적인 행동보다 암시와 비유가, 경솔한 말보다 침묵이 더 뛰어난 수법이라는 무시무시한 느낌이 가족 납골당의 문처럼 그를 옥죄었다.
--- pp.530~531

간단히 말해, 그는 사람들이 ‘선량한 시민’이라고 부르기 시작한 존재가 되었다. 뉴욕에서 지난 오랜 세월 동안 자선이나 시정, 예술과 관련해 새로운 움직임이 있을 때마다 사람들은 그에게 의견을 구하고 그의 이름을 원했다. 장애 아동을 위한 학교를 처음 세우거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을 개편할 때, 그롤리에 클럽을 설립할 때, 새 실내악단을 준비할 때 사람들은 “아처 씨에게 물어보자”라고 말했다. 하루하루는 충만했고 품위 있게 채워졌다. 그가 생각하기에 남자로서 더는 바랄 게 없는 삶이었다. 자신이 놓친 것이 있음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인생의 꽃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도달하기 어렵고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져서, 그 일로 한탄해봤자 복권에서 일등에 당첨되지 않았다고 절망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의 복권에는 무수히 많은 표가 있었고 그중에 일등은 단 하나였다. 너무나 확실하게 불리한 상황이었다. 엘런 올렌스카를 생각하면 책이나 그림에만 존재하는 가상의 연인을 떠올릴 때처럼 추상적인 느낌이 들었고 담담했다.
--- p.548

세상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왔는지 이보다 더 분명하게 보여주는 예시는 없을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개혁이나 ‘운동,’ 유행과 맹목적인 숭배와 온갖 하찮은 일들로 너무 바빠서 이웃들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게다가 모든 사회 구성원이 거대한 만화경 속의 똑같은 평면에서 빙빙 돌고 있는데, 다른 사람의 과거가 뭐 그리 중요하겠는가?
--- p.557

“저기, 아버지, 그분은 어떤 사람이었어요?”
아처는 아들의 뻔뻔스런 시선 밑에서 자신의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어서요, 솔직히 말씀해보세요. 아버지랑 그분은 친한 친구 아니었어요?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분 아니었나요?”
“아름답다고? 모르겠다. 부인은 달랐지.”
“아…… 바로 그거예요! 늘 그렇게 진행되기 마련이잖아요, 그렇지 않아요? 그 사람이 나타났는데 다른 거예요…… 이유는 모르죠. 패니에 대한 제 느낌이 딱 그래요.”
--- p.561

아들의 말을 듣는 동안 아처는 자신이 무능하며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한다는 느낌에 더욱 사로잡혔다. 아들이 둔감하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에게는 운명을 주인이 아니라 동등한 존재로 바라볼 때 생기는 능숙함과 자신감이 있었다. ‘바로 그거야. 이들은 모든 걸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자기들이 갈 길을 아는 거지.’ 아처는 아들을 낡은 표지물과 더불어 이정표와 위험 신호까지 전부 쓸어버린 신세대의 대변자로 여기며 생각했다.
--- p.5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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