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밤이 머금은 습기는 무엇이든 풍부하고 스며들어 번지게 만든다. 달궈진 공기를 타고 가로등 불빛이 멀리 번지듯이. 그만큼 모든 감정이 팽창하는 것 같다. 가끔씩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이 폭발할 듯 팽창한 감정을 다른 형태로 뒤섞고, 다시 그 속에서 여러 형태로 결합하여 빛을 낸다. 꿈마저도.
---「장르는 여름밤」중에서
자주 창문을 연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을 느끼며 가만히 서 있다. 바람을 따라 파도가 밀려오길 바라는 사람처럼. 그 순간 잠시나마 바다를 꿈꾼다. 이 오랜 습관은 환기를 자주 하게 만든다. 공기든 생각이든 멈춰 서면 답답하니까.
---「푸른 공상의 위로」중에서
삶에서 매우 의미 있게 다가오는 찰나의 순간이 있다. 우리가 유한한 존재이며 유약한 인간이라 할지라도 어느 한순간에는 잠시나마 영원을 느낄 수 있다고 믿는다. 무언가를 알고 깨닫는 번뜩이는 순간이 있다. 그런 한순간만이라도 그대로의 너와 나를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 그런 순간엔 그대로의 너와 나를 사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대로의 너와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중에서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투명한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오후의 햇살과 잔향 가득한 기타 소리에 스며드는 작은 웃음소리.
---「은하서울」중에서
알면 알수록 살면 살수록 어렵다. 인생, 정말 어렵다. 정답이 없으니까 더 어렵다. 뭘 해야 하는지 모르니까 어렵다. 너무 어렵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 아무튼 어렵다. 정말 모르겠고 어렵다. 내 마음은 이제 조금 알 것 같은데.
---「그건 그때 가서 알 것 같다」중에서
비록 여름의 끝에 서 있는 내 잎사귀가 더 이상 자라지 않아도 뿌리는 자라겠지. 생각해 보면 어떤 식물이든 뿌리는 잘 보이지 않는다. 식물에게 뿌리만큼 소중한 건 없기 때문일까? 소중한 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법이니. 여름의 끝에서 내가 조금이라도 더 성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뿌리처럼 보이지 않는 것들을 키우는 일일 것이다. 가을을 위해, 겨울을 위해.
---「잎사귀가 자라지 않아도」중에서
당시 함께 음악을 듣곤 하는 여자아이와 통화 중이었다. 전화번호를 뭐로 바꾸면 좋을지 고민 중이라고 했더니, 그녀는 듣고 있던 CD 플레이어를 보며 ‘4106’이 어떠냐고 권했다. 사실 그 밴드를 많이 좋아한 건 아니었다. 취향에 맞기는 했지만 번호로 삼을 만큼은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전화번호 뒷자리를 ‘4106’으로 바꾸면 그녀가 연락을 자주 할지도 모른다는 뜬금없는 기대감이 올라왔다.
---「4106」중에서
결코 변하지 않는 둥근 달도 바라보는 이에 따라 모습이 변하듯 나도 다른 모습으로 변하곤 한다. 불변의 고유한 내가 있지만 이런저런 자극과 타인의 시선이나 그때그때 맡은 역할에 따라서 내 모습이 달라지는 것이다. 음악을 할 때는 뮤지션, 배울 때는 학생, 가르칠 때는 선생, 달릴 때는 러너, 버스에 타면 승객……. 하지만 어느샌가 그 모든 그림자에서 익숙한 나를 발견한다. 결국 나는 나라는 거겠지.
---「달과 나」중에서
멀리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외할머니였다. 처음에는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른다는 사실만으로 반가웠지만, 곧 엄마 목소리가 아니어서 섭섭했다. 그나저나 외할머니는 내가 여기 있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가까워질수록 고민이 깊어졌다. 울어야 하나? 화를 내야 하나? 아니면 더 깊은 산중으로 다시 도망쳐야 하나? 그 후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아무 잘못 없는 가엾은 외할머니의 목소리가 아주 가까워졌을 때, 무뚝뚝하지만 잘 들리도록 “왜에!” 하고 소리쳤겠지.
---「도망이 등산이 될 때」중에서
불꽃놀이가 남긴 희미한 흔적을 등지고 걷자니 왠지 기분이 이상했다. 아쉬움과 체념, 적막이 느껴졌다. 어쩌면 이별 같은. 모든 노래는 끝이 있기 마련이다. 아무리 재미있고 감동적인 순간도 끝이 있는 것처럼. 우리네 청춘도 그렇겠지. 그걸 알려 주려고 우리는 그 많은 불꽃을 터뜨린 걸까? 뒤돌아보니 불꽃놀이가 남긴 흔적도 어느새 사라지고 없었다.
---「불꽃놀이」중에서
귀찮더라도 제대로 연주하려면 튜닝이 꼭 필요하다. 하물며 내 몸과 마음도 제대로 된 소리를 내려면 튜닝이 필요할 것이다. 나라는 악기는 사계절보다 더욱 변화무쌍한 환경에 노출되어 있으니까. 스스로 연주하려면 매 순간 신중한 튜닝이 필요하다. 음이 높으면 기타줄을 풀어 낮추고 음이 낮으면 기타줄을 조여 올리듯, 쓸데없이 긴장하거나 흥분한 상태여서 평정심을 잃지는 않았는지, 괜한 우울감에 축 처진 건 아닌지 살피고 대처해야 한다. 하지만 조심해야 할 점이 있다. 줄이 끊어지는 사태는 없어야 한다. 기운을 내 보려고 줄이 얼마나 팽팽한지, 얼마나 높은 음인지 모른 채 줄을 계속 감다 보면 툭 끊어지기 마련이니까.
---「기타와 튜닝과 마음」중에서
어린아이는 외로우면 울고 싶어 하는데, 나이 든 사람은 말을 많이 하고 싶어 하는 것 같다.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나타나기도 하는데, 누구나 한 번쯤은 울면서 말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자신이 그러고 싶은 때도 있을 거고. 어젯밤에 비가 내렸는데 나도 그랬다.
---「비와 우쿨렐레」중에서
가끔은 가까운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을 만나기도 하고, 여기까지구나 하며 먼저 선을 그어 버린 사람도 만났다. 친구가 되어 가는 사람도 있고, 친해졌다가 조금은 소원해진 사람도 있다. 인맥은 소멸되지만 친구는 적립된다. 다만 유의할 점은 적립형 친구도 감가상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세월이나 어떤 형태로든 감소가 일어나는 것이다.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러니 좋아할 수 있을 때 좋아하는 게 좋다. 그게 언제인지는 모른다. 아마도 바로 지금이겠지.
---「인맥은 소멸형, 친구는 적립형」중에서
나는 앞으로도 계속 실패할 것이다. 엎어지고 넘어질 것이다. 진흙탕에서 구르다 허우적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다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그래도 온 힘을 다해 일어설 것이다. 어쩌면 품위는 넘어지지 않으려고 버티는 게 아니라 불평 없이 스스로 다시 일어서려는 힘과 의지 아닐까? 어쩌면 품위를 지키는 데 음악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닐지도 모른다. 음악은 그저 내가 삶을 영유하는 방법일 뿐이니까. 정말 중요한 것은 삶의 태도다. 부끄럽지 않은 항해를 계속 이어 가려는 삶의 태도를 품위라 부르고 싶다.
---「품위를 지키며 꾸준히 실패하는 중」중에서
오늘 하루 내 마음대로 되는 일은 청소밖에 없었다. 거창한 계획도 야망도 없이 할 수 있는 일은 딱 그 정도다. 솔직히 그마저도 못 하는 날이 많다. 여하튼 오늘 하루는 대충 수습하면서 보냈다. 내심 ‘마이너스만 아니면 됐지 뭐.’ 하고 안도의 한숨을 쉰다. 망하지 않은 게 어디야.
---「하루」중에서
무슨 이유인지는 기억에 없다. 학교가 늦게 끝난 날이었다. 일몰이 빨라지는 가을이라 춘추복을 입었다. 기울어지는 햇빛을 맞으며 걸었다. 그렇게 소양1교에 들어섰다. 다리를 반쯤 건너다 오른쪽으로 크게 반짝이는 무언가가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자 갑작스레 빛이 쏟아져 내렸다. 황홀한 빛이 나를 가득 안았다.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붉은 석양이 이상하리만큼 또렷하게 반짝이며 불타고 있었다. 나는 한참을 가만히 서서 울었다. 이내 석양은 황금빛으로 변했다. 땀인지 눈물인지, 하얀 교복 와이셔츠를 축축하게 적셨다. 다리를 다 건너자 다시 태어난 기분이 들었다.
---「황홀한 빛」중에서
요즘은 뭐 하며 지내는지, 누구는 어쨌다는데, 그 기타는 어떤지 등의 얘기를 하는 사이 친구는 담배 한 개비를 다 피웠다. 그러고는 뜬금없이 가장 갖고 싶은 게 뭐냐고 물었다. 바로 떠올랐지만 막상 내 입으로 말하기는 좀 어색했다. 딱히 물건은 아니고, 우리 둘에게 없는 거였다. 하지만 그곳에 모인 모두가 꼭 갖고 싶은 것일 테지. 난 3초 정도 망설였다. “뭔데 그렇게 뜸을 들여?”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하려고 노력하며 입을 열었다. “히트곡.” 하지만 히트곡이라는 단어 자체가 지닌 무게감 때문인지 오히려 무척 진지하고 단호하게 말하고 말았다. “하하하. 그게 뭐야.” 친구는 실없는 웃음을 터뜨렸고, 나는 차마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히트곡」중에서
누군가 내가 만든 음악을 소년의 감성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는 모른다. 소년의 감성이 아니라 여름이 준 선물이라는 사실을.
---「여름 노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