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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그리트의 껍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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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2년 12월 12일
쪽수, 무게, 크기 276쪽 | 352g | 134*200*17mm
ISBN13 9791165346614
ISBN10 1165346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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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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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 복도 벽에 걸린 전신 거울을 빤히 바라보았다. 담당 의사는 기적이라고 말했다. 한강 하류의 갈대가 무성한 기슭에서 발견돼 응급실에 실려 왔을 땐 거의 죽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왼쪽 무릎 관절과 9번, 10번 갈비뼈 골절, 뒤통수의 깊은 상처, 저체 온에 의한 쇼크, 의식 불명. 최악의 상태였다. 눈을 떴을 때 제일 먼저 본 것은 천장의 하얀 형광등이었다. 너덜너덜해진 몸뚱이는 정육점에 전시된 포장육처럼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몸은 예상보다 빠르게 회복되어 갔다. 뼈는 붙었고 근육은 다시 탄탄하게 힘을 얻었다. 뒤통수의 수술 자국도 잘 아물었 다. 오늘은 다리 깁스를 풀었다. 다음 주면 퇴원이다. 모든 것은 산책하는 절름발이 철학자처럼 천천히, 하지만 견고하게 제자리로 돌아왔다. 한 가지만 빼고는…….

사고가 있기 전 기억은 칼로 도려내진 것처럼 깨끗이 사라졌다. 두개골 속 말랑말랑한 대뇌피질이 마치 해면처럼 군데군데 구멍이 뚫린 것만 같다. 서른둘 인생에서 2년이 송두리째 지워져 버렸다. 사라진 기억 속에 소중한 것이 있지는 않았을까. 날 지탱하던 무엇이 있었던 것은 아닐까. 햇볕이 따듯하게 데워놓은 병원 벤치에 앉아 온종일 생각했다. 기억이 있었을 자리에 온갖 상상과 추측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
불행 중 다행으로 일상의 기억은 그대로 남았다. 몇 년째 계속 사는 투룸, 다니던 직장, 하던 업무, 동료들, 늘 들르는 편의점, 주말이면 산책을 하는 공원과 뒷산, 출근 때마다 마주치는 옆집 여자 얼굴, 사고가 나기 전 구매한 노트북의 가격과 판매점 사장의 얼굴까지도 또렷이 생각났다.
---「1장. 기억의 흔적」중에서

말을 잠시 멈춘 그가 ‘기억 노트’라고 적힌 노트 한 권을 내앞으로 내밀었다.
“일상 중에 뭔가 머릿속에 떠오르면 여기에 메모하세요. 사소한 것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날의 날씨, 출근할 때의 기분, 읽은 책, 본 것, 우연히 만난 사람에 대한 느낌, 어디선가 본 듯한 데자뷔, 갑자기 기억나는 것. 뭐든 자유롭게 쓰세요. 매일 쓰면 좋지만 꼭 그렇게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툭툭 떠오르는 단편적 기억들을 편하게 적으세요. 그런 것들이 한데 어우러져 온전한 단서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그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미술 화법 중 포인티지라는 것이 있어요. 프랑스 화가 쇠라 (Georges Seurat) 가 창시한 것이에요. 화가가 팔레트에 색을 혼합해 원하는 색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색깔 점을 직접 캔버스에 찍어 대상을 표현하는 방법이에요. 가까이에서 보면 그저 알록달록한 의미 없는 점들의 집합이지만 멀리서 보면 완성된 하나의 그림이 되죠.”
“…….”
“정신의학에서도 이런 방법을 이용합니다. 전문용어로 항시적 관찰 기록 기법이라고 해요. 소소한 일상의 변화를 계속 적다 보면 거기서 사라진 기억의 흔적을 발견할 수도 있거든요.
의미 없어 보이는 무수한 점들이 그림을 만드는 것처럼.”
기억 노트는 주머니에 넣기 좋은 크기였다. 표지에는 푸른 사과가 그려져 있다. 배경이 파란 하늘과 구름이라 허공에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과는 반쯤 벗겨진 상태로, 껍질이 공중 에서 지상으로 흘러내렸다. 드러난 사과 속살은 노란 과육이 아니었다. 안은 텅 빈 상태였다. 노트를 펼쳤다. 흰 바탕에 줄만 그려져 있는 평범한 것이었다.
---「1장. 기억의 흔적」중에서

“기억이라는 것, 참 재밌어요. 왜곡된 기억은 사람을 슬픔에 젖은 개그맨처럼 만들거든요. 한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요양원에 온 지 6개월 정도 된 70대 할아버지 환자가 있었어요.
신체 건강은 비교적 좋았지만 독특한 이상 증상을 보였죠. 아침에는 어린아이, 점심에는 청년, 저녁에는 중년으로 지내다가 자기 직전에는 노인이라고 믿는 증상. 그걸 스핑크스 증후군이 라고 하더군요.”
스핑크스 증후군이라. 누가 처음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보다 더 적절한 명칭은 없을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전직 대기업 부장이었는데 사고로 일가족을 한꺼번에 잃었어요. 누군가가 집으로 들어와 잠든 가족들을 칼로 찔러 죽이고 현장을 은폐하기 위해 불까지 질러버렸대요. 남겨진 할아버지는 고통스러운 기억 속에서 하루하루를 견디다 결국 정신이상자가 되어버렸고 요양원까지 오게 된 거죠.”
“참 기구한 삶이군요.”

“그분을 돌보게 되면서 난 하루를 70년처럼 지냈어요. 어린 아이로 사는 아침에는 함께 그림도 그리고 장난도 치면서 놀아 드리고, 낮에는 젊은이로 변한 할아버지와 청춘의 고민을 나눴 어요. 취업 상담이나 첫사랑의 열병에 관한 것들을요. 그러다 저녁 무렵에는 자식들의 사춘기 고민과 새파란 직장 후배가 어떻게 자기한테 이럴 수 있느냐 같은 하소연을 들어야만 했죠.”
“희로애락이 하루면 끝나니 그나마 다행이네요.”
“하지만 다음 날이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것이 문제지요. 잠들기 전, 할아버지가 했던 말이 기억나요. ‘ 내 삶은늘 고통뿐이야. 자고 일어나면 아픈 기억이 깨끗이 지워졌으면 좋겠어. ’ 소원대로 아침이면 할아버지는 다시 태어났어요.
순수하고 깨끗한 상태로. 영원히 끝나지 않는 고민이 기다리는 시작점에서.”
“…….”
“우리 모두 선택적으로 기억을 지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난 종종 그런 공상을 해요.”
---「1장. 타인과 그의 뱀 그림자」중에서

“아, 규호 씨. 성실하고 열심인 강규호 씨. 회사에서 제일 실력 있는 필드 엔지니어, 우리 회사의 보배. 자네 같은 사람을 어디서 또 만나겠어?”
사장의 혀는 많이 꼬였다.
“받으시오, 받으시오.”
그는 장단이 맞지 않는 노래를 흥얼거리며 내 앞 빈 소주잔에 양주를 채웠다. 이병우 팀장이 끼어들었다.
“강규호 씨는 술 못 한답니다.”
사장은 날 빤히 바라보았다. 충혈된 두 개의 눈동자는 호기심 많은 강아지의 혓바닥처럼 내 얼굴 구석구석을 핥았다. 그러다 그가 왼쪽 귀 뒤를 긁적이며 말했다.
“이거 뜻밖인걸.”
“…….”
“술을 못 마셔?”
“…….”
“자네 같은, 껍질이?”
‘ 껍질? ’ “그거 뭐라 그랬지? 사과 껍질, 그거.”
‘ 사과 껍질? ’ “마그……. 뭐더라. 마가린? 마그릿? 마그리트. 그래, 마그 리트의 껍질.”
‘ 마그리트의 껍질? ’ 3초? 길어야 5초를 넘지 않았을 것이다. 깊은 이마 주름, 꽉다문 입술, 일그러진 눈매. 이병우 팀장의 얼굴이 얼음처럼 경직됐다.
찰나였을 뿐이지만, 난 모든 것을 보았고 기억했다. 망막에 맺힌 이미지는 내 시신경에 의해 정보로 바뀌었다.
---「1장. 타인과 그의 뱀 그림자」중에서

차수림은 내 손을 잡았다. 건물과 건물 담벼락 사이 사람 하나 지나갈 정도의 좁은 틈으로 끌고 갔다. 마주 보고 섰다. 서로의 몸이 가까이 붙었다. 그녀의 입술이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여긴 CCTV 사각지대예요.”
포도 냄새, 알코올 냄새, 구운 감자 냄새가 났다. 숨기척이 귓바퀴를 간지럽혔다. 그녀의 숨결은 뺨과 목을 타고 허벅지까지 따라 내려갔다. 내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웠다. 축축했다.
뜨거웠다. 풍만한 젖가슴이 상체를 묵직하게 눌렀다.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나와 사귀고 싶으면 두 가지를 약속해 줘요.”
“…….”
“콜라를 마시지 말 것.”
“…….”
“어떤 상황에서도 화내지 말 것.”
다시 키스했다. 함께 우리 집으로 갔다. 우린 격정적인 정사를 치렀다. 비밀스러운 사내 연애는 그렇게 시작됐다.
---「2장. CCTV」중에서

“세상에서 제일 위험한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그건 자기가 사이코패스인 줄 아는 사이코패스래요. MRI로 찍은 자기 뇌 사진을 보고 자신이 사이코패스의 뇌를 가졌다는 걸 알게 된 어느 뇌 과학자의 말이에요.”
(중략)
“사이코패스의 뇌를 가지고 태어난 자는 애초에 타인의 감정이란 것을 이해하지 못해요. 왜 슬퍼하는지, 왜 기뻐하는지, 왜 아파하는지, 왜 그리워하는지, 그런 것들을요. 대신 내겐 똑똑한 뇌가 있죠. 학창 시절부터 한 번도 1등을 놓쳐본 적 없고 언제나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어요. 난 끊임없이 관찰하고 학습해 왔어요. 타인의 감정을 말이죠. 자원봉사는 내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어요. 어느 때 인간의 감정이 바뀌는지, 어떻게 반응을 보이고 행동해야 하는지, 언제 슬퍼하고 분노하고 기뻐해야 하는지. 미술도 그런 것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됐고요.”
---「4장. 마그리트의 껍질」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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