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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슬픔의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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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4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628쪽 | 662g | 128*188*35mm
ISBN13 9788932923086
ISBN10 89329230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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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곧 시작되리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시들해져 있었고, 누구보다도 쥘 씨가 그랬다.
---「첫 문장」중에서

그런데 갑자기 4주 전, 루이즈가 살짝 구운 아니스크렘을 가져다주는데, 그가 미소를 짓더니 그녀 쪽으로 슬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한 가지 부탁을 하는 거였다. 만일 그가 동침을 제안했다면 루이즈는 접시를 내려놓고 따귀를 한 대 갈기고는 차분하게 다시 서빙을 시작했을 거고, 쥘 씨는 가장 오래된 단골 하나를 잃고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물론 그것은 성적인 부탁이 맞기는 했지만, 그것은…… 글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당신의 벗은 모습을 보고 싶소.」 그가 말했다. 「딱 한 번만. 그냥 보기만 하고 다른 것은 안 해요.」
--- p.16

발전기들의 끊임없는 소음, 그러니까 그 철판들이 마치 미친놈이 울부짖는 것처럼 진동하며 내는 소리와 만성적인 습기에 섞인 경유 냄새 속에서, 9백 명이 넘는 병사들은 수만 세제곱미터의 콘크리트 아래에 묻힌 수 킬로미터의 지하 통로를 쥐새끼처럼 돌아다니며 살고 있었다. 르 마얭베르그에 들어서면 몇 미터 앞부터 낮의 빛은 사라졌고, 대대로 내려오는 프랑스의 오랜 적이 출현할 경우 반경 25킬로미터 주변에 145밀리미터 포탄을 발사할 준비가 되어 있는 벙커들로 통하는 궤도차가 끔찍한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 길고 컴컴한 통로만이 희미하게 분간되었다.
--- p.40

「그래서 젊은이, 자넨 이 부서에서 자네가 하는 일을 어떻게 생각하나?」
「A, E, I, O, U라고 생각합니다.」 데지레가 대답했다.
알파벳을 잘 알고 있는 과장은 〈무슨 뜻이지?〉라고 묻는 눈빛을 던졌다. 데지레는 말을 이었다.
「분석하고, 기록하고, 영향을 주고, 관찰하고, 이용하는 것입니다(Analyser, Enregistrer, Influencer, Observer, Utiliser). 시간적 순서에 따라 말하자면, 저는 여기서 관찰하고, 기록하고, 분석하고, 영향을 주기 위해 정보를 이용합니다. 프랑스 국민의 사기에 영향을 주기 위해 정보를 이용하는 것입니다. 사기를 최대한도로 높이기 위해서 말이죠.」
과장은 자기 밑에 알짜 중의 알짜가 들어왔음을 곧바로 깨달았다.
--- pp.149~150

기동 헌병대원인 그가 속한 조(組)는 대성당 앞 광장의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파견되었다. 엄숙한 얼굴로 센강의 다리들에까지 빽빽이 모여 있는 군중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메시아 대신 그들 앞에 나타난 것은 금빛 제의(祭衣)에 주교관을 쓰고 손에는 주교장을 들고서 국무 장관, 각국 대사, 각부 장관, 그리고 달라디에를 영접하는 파리 교구 참사회장이었다. 페르낭으로서는 급진주의자, 사회주의자, 그리고 프리메이슨파를 망라한 이 정치 지도자들이 그들이 믿지 않는 신에게 기도하기 위해 이 노트르담 대성당에 몰려왔다는 사실부터가 너무나 놀라웠지만, 가장 불안하게 느껴지는 것은 화려한 제복 차림의 군 장성들이 상당수 나와 있다는 점이었다. 페탱 원수, 카스텔노 장군, 구로 장군 같은 참모부의 핵심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본 그는, 나라가 수백 년 동안 내려온 적에게 짓밟히고 있는 시기에 이 양반들은 이따위 미사에 참석하는 것 말고는 다른 할 일이 없는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 p.298

「난 뚱보였어. 무슨 말인지 알겠냐? 뚱보라는 것은 아주 특별한 거지. 사람들은 뚱보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 것은 너무나 좋아하면서도, 뚱보에게 사랑에 빠지는 일은 결코 없거든.」
--- pp.449~450

부유한 이들의 탈출은 이미 며칠 전에 끝났고, 지금은 그렇지 못한 이들이 군복 차림의 병사, 농부, 민간인, 장애인 들이 뒤섞인 잡다한 무리를 이루어 힘겹게 걷고 있었다. 한 시청 차량에 탄 어느 유곽의 매춘부들, 그리고 양 세 마리를 몰고 가는 목동 등 도로 위엔 그야말로 온 백성이 모여 있었다. 갈가리 찢기고 버려진 이 나라의 모습 자체인 이 피란민의 물결 속에서 자동차는 천천히 덜컹거렸다. 어디에나 얼굴들, 얼굴들이 있었다. 어떤 거대한 장례 행렬 같다고 루이즈는 생각했다. 우리의 슬픔과 우리의 패배의 가혹한 거울이 된 거대한 장례 행렬이었다.
--- pp.458~449

「보제르푀유 대령이 날 이틀간 빌려주었어. 하지만 일이 돌아가는 꼴을 보아 하건대, 나도 자네들과 같은 신세가 될 것 같아…….」
「우리와 같은 신세라뇨?」
「그걸 말이라고 해? 독일 놈들 포로지 뭐야? 자, 됐어. 이제 일어나 봐!」
그는 책상을 대신하는 테이블로 가서 앉은 다음, 가브리엘을 쳐다보았다.
「결국 자네와 난 언제나 포로 아니었어? 전에는 르 마얭베르그에서 포로였고, 지금은 여기에서 포로 신세지. 그리고 세 번째로 감옥을 바꿔서 독일 놈들 포로가 될 거야. 난 앞의 두 곳이 더 나을 것 같지만 뭐,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잖아.」
--- p.5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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