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는 우리의 근대적 삶에서 가장 강력한 힘인 자본주의도 마찬가지다. 획득하려는 충동, 이윤과 화폐, 가능한 한 많은 양의 화폐에 대한 추구 그 자체는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다. 이 충동은 웨이터, 의사, 마부, 예술가, 창녀, 부패 관리, 군인, 귀족, 십자군, 도박꾼, 거지 등에게도 존재하고 있으며 존재해왔다. 아마도 이 충동은 그 객관적 가능성이 있는 혹은 있었던 곳이라면 지구상의 모든 나라에, 모든 시대에 모든 종류와 조건의 인간들에게 공통된 거라고 말할 수 있다.
--- p.13
이미 스페인 사람들은 ‘이단’(즉 네덜란드의 칼뱅주의)이 ‘상인 정신을 고취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이는 윌리엄 페티 경이 네덜란드에서 자본주의가 비약적으로 발전한 이유를 논하면서 제시한 견해와 완전히 일치한다. 칼뱅주의자들이 퍼져 사는 지역을 ‘자본주의 경제의 묘판(苗板)’이라고 한 고트하인의 지적은 옳다.
--- p.37
근대 자본주의의 추진력은 우선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자본 축적이 아니라 자본주의 정신의 발달이었다. 자본주의 정신이 개화하여 작용하는 곳에서는 축적된 자본을 자신의 힘을 발휘하는 수단으로 변형시켰으며, 그 거꾸로가 아니다.
--- p.61
바로 이런 사실에서 그들이 자신의 행위를 스스로 윤리 외적인 것, 심지어 반윤리적인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다면 기껏해야 윤리적으로 관용받는 것에 불과하던 이러한 태도가 어떻게 벤저민 프랭클린의 의미에서 하나의 ‘직업(소명)’이 되었을까?
--- p.66
이 합리화 과정은 분명히 근대 시민 사회의 ‘생활의 이상’ 중 중요한 부분을 조건 짓는다. 즉 ‘자본주의 정신’의 대표자들은 인간의 물질적 재화의 공급을 합리적으로 형성하기 위한 작업을 자신의 생애 동안 해야 하는 노동의 방향을 제시해주는 목적이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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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정신’의 발달은 합리주의의 전체적 발전의 부분 현상으로 간단히 이해할 수 있고, 또 궁극적인 삶의 문제에 대한 합리주의적 원리의 입장에서 도출되어야 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게 되면 프로테스탄티즘은 단지 순수한 합리주의적 인생관의 ‘설익은 결실’ 따위의 역할을 하는 한에서만 역사적인 고찰 대상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진지하게 탐구해보면, 그처럼 단순한 문제 설정은 합리주의의 역사가 결코 여러 생활 영역에서 평행하며 나아가지 않았기 때문에, 이 이유만으로도 즉시 부적절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 p.68
옛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발전 간의 관계를 탐구할 때 칼뱅, 칼뱅주의, 그 밖의 다른 ‘청교도’ 교파 등의 저작에서 출발하지만, 그렇다고 이러한 종교 공동체의 창시자나 대표자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자본주의 정신’이라 불리는 것의 환기가, 필생의 작업 목적으로 발견될 거라 기대한다는 뜻은 아니다. 세속적 재화에 대한 추구를 그들 중 누군가가 자기 목적으로 생각하고 윤리적 가치로 통용했다고는 결코 생각할 수 없다.
--- p.81
‘자본주의 정신’은 종교 개혁의 일정한 영향에 따른 결과로만 발생할 수 있었다든가, 경제 체계로서 자본주의는 종교 개혁의 산물이라는 등의 마찬가지로 어리석은 공론적 테제 역시 결코 옹호받을 수는 없다. 이미 종교 개혁 훨씬 이전에 몇 가지 중요한 자본주의적 영리 기업의 형태가 있었다는 사실은 그러한 견해를 단적으로 부인한다. 오직 다음과 같은 것만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즉 그 ‘정신’의 질적 규정과 세계로의 양적 팽창에서 종교적 영향이 함께 작용했는지, 작용했다면 어느 정도인지 하는 점과, 자본주의적 토대에 입각하는 문화의 어떤 구체적 측면이 종교적 영향에 소급되는지 하는 점이다.
--- p.83
세계는 (오직) 신의 자기 영광에 봉사하도록 정해져 있고, 선택된 기독교는 (오직) 신의 율법을 집행하여 세계에 신의 영광을 각자의 몫만큼 증대시키도록 정해져 있다. 그러나 신은 기독교도의 사회적 실행을 요구한다. 왜냐하면 신은 삶의 사회적 형성이 자신의 율법에 맞게 이루어져 그 형성이 자신의 목적에 일치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이뤄지는 칼뱅교도들의 사회적 노동은 오직 ‘신의 영광을 더하기 위한’ 노동일 뿐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의 현세적 삶에 봉사하는 직업 노동에도 역시 그러한 성격이 있다.
--- p.100
구약적 합리주의 자체는 본질적으로 소시민적인 전통주의적 성격을 가지며, 선지자나 《시편》의 강력한 열정뿐 아니라 이미 중세의 특정한 정감적 신앙의 발전에 접합점을 제공한 구성 요소와도 병존했다. 따라서 자신의 구미에 맞는 구약적 경건성의 구성 요소를 선택하여 동화시킨 것은 칼뱅주의 자체의 고유한 기본 성격, 특히 금욕적 기본 성격이었다.
--- p.115
‘성도의 영원한 안식’은 내세에 있기 때문에, 현세에서 인간은 자신의 구원을 확신하기 위해 “낮 동안은 자신을 보내신 이의 일을 행해야” 한다. 태만과 향락이 아니라 오직 행위만이 분명하게 계시받은 신의 뜻에 따라 신의 영광을 더하는 데 봉사한다. 따라서 시간 낭비는 모든 죄 가운데 최고의 중죄다. … 시간은 무한히 귀중하다. 왜냐하면 낭비한 모든 시간은 신의 영광에 봉사하는 노동에서 감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비활동적인 명상은 적어도 직업 노동을 희생하고 행해진 한에서 무가치하고 궁극적으로는 단연 배척해야 한다고 한다.
--- p.147
인간은 자신에게 위탁된 재산에 봉사하는 관리자로서, 아니면 아예 ‘영리 기계’로서 복종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사상이 삶을 냉혹한 무게로 짓누르고 있다. 재산이 증가하면 할수록(금욕적 생활 태도가 시련을 이겨내는 경우) 신의 영광을 위해 그 재산이 감소하지 않도록 보존하고 부단한 노동을 통해 증대시켜야 한다는 책임감은 더욱더 무거워진다.
--- p.159
근대적 자본주의 정신뿐 아니라 근대적 문화에 구성적 요소 중 하나인 직업 사상에 입각한 합리적 생활 방식(이 책이 증명하려는 점인데)은 기독교적 금욕의 정신에서 탄생했다. 이 책의 첫머리에서 인용한 프랭클린의 글을 다시 한번 읽어보면, ‘자본주의 정신’이라 표현한 사고방식의 본질적 요소는 방금 전에 청교도적 직업 금욕의 내용으로 말한 것이며 단지 프랭클린의 경우에는 이미 사라져버린 종교적 정초를 제외한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 p.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