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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

기억을 잃어버린 앨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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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6년 06월 13일
쪽수, 무게, 크기 536쪽 | 626g | 140*210*28mm
ISBN13 9788947541053
ISBN10 894754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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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봐요, 이름이 뭔가요?”
조지 클루니가 앨리스의 손목을 부드럽게 잡고 두 손가락으로 맥박을 쟀다.
“앨리스 메리 러브.”
“쓰러졌나요?”
“그랬나봐요. 기억나진 않지만.”
앨리스는 왠지 눈물이 날 것처럼 먹먹해졌다. 건강 전문가와 이야기할 때는 거의 늘 이런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약사와 이야기할 때도 그랬다. 어렸을 때 앨리스가 아플 때마다 엄마가 너무 야단법석을 떨어서 그럴 것이다. 앨리스도 엘리자베스 언니도 심각한 건강염려증 환자였다.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조지가 물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요. 체육관이라고 하던데요.” (……)
“좋아요, 앨리스. 유명하신 우리나라 수상 이름이 뭐죠?”
“존 하워드죠.” 앨리스가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 정치에 대해서는 더 이상 질문하지 않기를 바랐다. 아는 게 없었다. 정치만큼 끔찍한 화제도 없을 것이다. 제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하워드가 아직 수상 맞잖아요? 아, 아닌가?”
앨리스는 굴욕감을 느꼈다. 앞으로 몇 년 동안 사람들이 놀려댈 것이다. 저런, 앨리스, 수상도 몰라? 자기 투표 안 했구나! “하지만, 확실히 그 사람이 맞는 것 같은데……!”
“올해가 몇 년도죠?” 조지 클루니가 문제 될 것 없다는 듯이 덤덤하게 물었다.
“1998년이요.” 앨리스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아기가 내년에, 그러니까 1999년에 태어날 테니까.
제인이 손으로 입을 막았다. 조지 클루니가 무슨 말인가 하려고 했지만 제인이 그를 막았다. 제인은 앨리스 어깨에 손을 얹고 앨리스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흥분으로 두 눈이 한껏 커져 있었다.
“지금 몇 살이야, 앨리스?”
“스물아홉 살이지. 왜 그래?”
잔뜩 힘을 준 제인의 목소리가 신경에 거슬렸다. 얘가 대체 왜 이러는 걸까? “자기랑 동갑이잖아.”
제인이 살짝 뒤로 물러나면서, 이거 보라는 듯이 조지 클루니를 쳐다보았다.
“얼마 전 앨리스가 곧 있을 마흔 번째 생일 파티에 날 초대했어요.”
이날, 앨리스 메리 러브는 체육관에 갔고, 어처구니없게도 10년을 통째로 잃어버리고 말았다. --- p. 19~23

닉이었다. 브랜디를 단숨에 들이마신 것처럼, 행복한 안도감이 혈관을 타고 앨리스의 온몸으로 퍼져나갔다. “무슨 일이야? 아이들한테 무슨 문제 있어?”
감기라도 걸린 것처럼 낮고 거친 목소리였다. 그러니까 닉도 아이들을 아는 게 분명했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안절부절못하고 펄쩍펄쩍 뛰면서 전화를 자기에게 달라는 몸짓을 했다.
“아니, 나한테 문제가 있어. 내가 쓰러졌어. 그러니까, 체육관에서. 제인 터너랑 있었는데, 머리를 세게 부딪혔어. 의식을 잃었지 뭐야. 구급차에 실려 왔어. 들것에 누워 있다가 구급요원 신발에 토했어. 얼마나 당황했는지 몰라. 근데 포르투갈이라며? 세상에, 포르투갈이라니. 믿어지지 않아. 거긴 어때?” (……)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닉이 충격을 받은 것이 분명했다.
앨리스는 닉을 안심시켰다. “근데, 나 괜찮아. 심각하지는 않아. 괜찮은 거 같아.”
닉이 말했다. “그럼 도대체 왜 그깟 일로 전화하라고 한 거야?”
앨리스는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 들었다. 고개가 뒤로 홱 젖혀지는 것 같았다. 닉은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앨리스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심지어 싸울 때조차도. 닉은 상황이 나빠지지 않도록 악몽까지도 바로잡는 사람이었다. 앨리스는 닉의 태도에 큰 상처를 받았다. “왜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
엘리자베스 언니가 일어섰다. “전화기, 이리 줘.”
명령이었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앨리스의 떨리는 손에서 전화기를 뺏어 들었다. 전화기를 귀에 대고 한 손가락으로 다른 쪽 귀를 막았다. 앨리스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고개를 숙였다.
“닉, 엘리자베스예요. 상황이 심각해요. 앨리스가 머리를 크게 다쳤는데, 기억을 잃었어요. 1998년 이후로는 전혀 기억하지 못해요.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네, 전부요.”
앨리스는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얕은 숨을 내쉬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지? (……) 온몸이 쿡쿡 찔리는 것처럼 아파왔다. 길고 심술궂은 손가락이 온몸을 잔인하게 찔러대는 것 같았다. 엘리자베스 언니는 전화기를 닫고 앨리스의 팔을 잡았다. 언니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곧 기억날 거야. 아무 일 아니야. 그냥, 너하고 닉이 더 이상 같이 살지 않는 것뿐이야.”
앨리스는 엘리자베스 언니의 입술 움직임에 모든 감각이 쏠리는 것을 느꼈다. “뭐라고?”
엘리자베스 언니가 다시 대답했다. “너희는 이혼하는 중이야.”
세상에, 그게 무슨 말이야? --- p. 97~101

앨리스는 옷장 문을 닫고 천천히 침실을 둘러봤다. 새삼 침실이 여자의 공간이라는 게 느껴졌다. 침대는 깃털 누비이불로 덮여 있었고, 작고 빛나는 푸른 쿠션들이 쭉 놓여 있었다. 정말 아름다웠다. 앨리스가 그리던 꿈의 침대였다. 하지만 닉은 언제나 자기는 예쁜 것만 보면 발기불능이 될지도 모른다고 했다. 앨리스가 원한다면 침대를 그렇게 꾸며도 되지만, 아무튼 경고하는 거라고. 침대 위에는 마가렛 올리의 작품이 프린트된 잼 병에 꽃이 꽂혀 있었다. 닉이 봤으면 구역질을 하려고 했을 텐데. 화장대에는 여러 색깔 유리병이 늘어서 있었고(닉이라면 “그건 왜 놓는 건데?”라고 물었을 것이다) 크리스털 꽃병에는 장미가 잔뜩 꽂혀 있었다.
그러니까 이 침실은 앨리스가 혼자 살려고 자신만을 위해 꾸민 것이었다. 앨리스는 실제로 그럴 수는 없겠지만 침실을 아름다운 병으로 장식하고 싶다는 꿈을 늘 꿨었다. 장미 생각은 안 했지만. 갑자기 어제 구급차에 실려 가면서 장미를 떠올렸다는 것이 생각났다. 앨리스는 화장대 위로 몸을 숙여 장미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누가 준 걸까? 이런 식으로 꽃을 꽂는 건 정말 질색인데, 왜 침실에 장미를 둔 걸까?
꽃병 옆에 작은 카드가 있었다. 닉이 보낸 걸까? 화해하려고? 장미를 싫어하는 건 잊어버리고? 아니 싫어하는 걸 아니까 일부러 보낸 걸까? 앨리스는 카드를 열어 보았다.

앨리스, 또 만나고 싶어요. 다음에는 햇살 아래에서 볼까요? -도미니크

맙소사, 앨리스는 데이트를 했던 거였다. 앨리스는 떨리는 손으로 카드를 움켜쥔 채 침대 끝에 털썩 주저앉았다. 데이트라니, 앨리스에게는 과거의 것이지 미래의 것은 아니어야 했다. (……)
닉이 아닌 다른 남자와 데이트라니, 낯설고 어색하고 바보 같아. 도미니크라고? 대체 그런 이름은 누가 쓰는 거지? 갑자기 분노가 밀려왔다. 카드를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어떻게 장미를 침실에 두고 닉을 배반할 수 있지? 잠깐, 또 다른 남자도 있지 않나? 멜버른에 있는 물리치료사? ‘즐거웠던 시간’이라고 했지? 그 남자는 뭐지? 닉이 나간 뒤에 벌써 두 번째 남자를 만난 걸까? 새 앨리스는 제멋대로 사는 여자일까? 체육관에 나가고 사랑하는 언니를 화나게 하고 유치원 학부모 칵테일파티를 여는? 예전의 앨리스가 싫어하던 부류의 여자가 된 걸까? 새 앨리스에게 좋은 점이라고는 옷밖에 없었다. --- p. 189~191

앨리스는 욕실로 들어갔다. 병원에서 썼던 향수병이 있었다. 향수를 왕창 뿌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기억의 소용돌이 속으로 껑충 뛰어 들어가고 싶었다. 콧속으로 향수 입자가 밀려들어오자 속이 미식거렸다. 앨리스는 지난 10년의 기억이 머릿속을 채우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은 오늘 저녁 파티에서 보았던 낯선 얼굴들, 도미니크의 촉촉한 갈색 눈, 시아버지를 보고 수줍게 웃던 엄마 얼굴, 엘리자베스 언니 입가에 머물던 우울한 선들뿐이었다. 이런 최근 기억들은 너무 생생했고 혼란스러웠다. 그것이 문제였다. 새 기억은 옛 기억이 들어설 자리를 마련해주지 않았다. (……)
닉은 지금쯤 지나와 누워 있을까?
파티에서도 지나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어색해졌다. 끔찍했다. 닉이 지나와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을 모두 아는 거야? 이 이상한 파벌 모임 사람들 모두 알고 있다는 말이야? (……)
“기분은 어때? 기억은?” 엘리자베스 언니가 물었다.
“새로운 건 없어. 아이들이나 이혼에 대해서는 기억나는 게 없어. 지나에 대해서는 조금 알겠지만.”
엘리자베스 언니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앨리스를 보았다.
“무슨 소리야?”
“괜찮아. 날 보호하려고 할 필요 없어. 닉이 지나랑 바람이 난 거잖아.”
“닉이 지나랑 바람을?”
“아니야? 모두 아는 거 같던데.”
“아니, 난 몰랐는데.”
언니는 정말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지금쯤 지나랑 누워 있을 걸.”
앨리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전자레인지가 ‘땡’ 소리를 내며 멈췄지만, 엘리자베스 언니는 신경 쓰지 않았다.
“절대 그럴 리 없어, 앨리스.”
“어째서?”
“지나는 죽었거든.”
--- p. 243~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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