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는 멀지 않다. 다녀오기 힘든 곳도 아니다. 대단한 곳도, 진기한 곳도 아니다. 그저 남들이 다 가는, 이웃나라 일본의 관광명소일 뿐이다. 그런 교토를 나는 나의 도시로 만들었다. 아마 교토는 나 말고도 수십만, 또는 수백만의 자신의 도시일 것이다. 서울이, 파리가, 리스본이, 뉴욕이, 델리가 그런 것처럼.
생각해보면 이 세상의 어느 한구석에 내가 살지는 않지만 나의 도시가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꽤 든든한 일이 아닌가 싶다.--- p.15
친구의 방으로 돌아와 우리는 바닥에 대충 맥주와 안주를 펼쳐놓았다. 친구의 방에는 식탁뿐만 아니라 이제 피아노도 없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인천에 있는 방보다 어른스러워진 느낌이었다. 그리고 어른스러워진다는 건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었다. --- p.121
친구는 종종 말한다. “나 같은 사람이 그때 그 고생을 해보지 않았더라면 지금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거야.” 투자해도 종종 아무것도 얻지 못하거나 때로는 손해마저 보기 십상인 이 인생에서 우리는 쓰라린 경험에도 의미가 있다고 믿는 친구들이다. 어쨌든 친구는 인생의 3년을 원하는 곳에서 보냈다. 환상이 환상으로만 남지 않도록 용기를 내었다. 그리고 그 용기가 불러온 모든 결과들을, 외로움과 비참함까지도 감내했다. 이제 친구는 스스로에게 떳떳하다. 그걸로도 충분하다.--- p.125
그해에 나는 엄마와 함께 교토에 갔다. 여러 가지로 무리해서 간 여행이었다. 문득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할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결혼하기 전 내가 스물여섯 살이던 해에, 엄마가 건강하던 때에, 우리는 함께 태국을 여행한 적이 있다. 나는 엄마를 미워하는 사춘기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했고 어느 밤 엄마는 그런 나 때문에 울음을 터뜨렸다.
이제 나는 서른아홉 살이고 결혼도 했고, 아이도 둘이다. 이번에도 엄마를 미워할까? 엄마는 나 때문에 울까? 다행히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애증의 모녀 사이가 아닌, 두 명의 아주머니가 되어 교토를 누볐다. … 우리는 매일 매일 교토의 골목들을 산책했다. 교토라는 도시에는 이야기를 끌어내는 재능이라도 있는 것 같았다. --- p.130
내가 몰랐던 일들. 어른의 일들. 그런 것에 관해서 엄마는 이제 나에게 이야기해준다. 그럴 때 나는 ‘아아, 내가 어른이 되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에게는 그 시절 교실 한구석에서 나의 한계에 쓰라려 하던 열일곱 열여덟의 내가 남아 있는데, 이제는 이런 일을 알아도 되는 나이가 되었구나. --- p.139
나에게 엄마는 그저 엄마일 뿐이었지만, 너무 어린 나이에 엄마가 된 엄마는 어떤 여자가 되어야 할지도 정하지 못한 채로 나이 들었겠구나. 지금의 나보다 더 젊은 엄마가 반장의 엄마를 바라보며 느꼈을 감정을 생각하니 나는 신기하기도 했고 슬퍼지기도 했다. 나는 그 시절 나와 반장과 반장의 엄마와 우리 엄마의 사이에 엇갈린 선들을 긋는다. 그 선들은 운명이라는 이름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 p.141
그러므로 내가 쓴 여행기는 모두 나에 관한 이야기다. 그곳에서 발견한 나 자신, 내가 미처 몰랐거나 또는 모르는 체 하고 싶던 나 자신에 관한 이야기다. 그것을 빼놓고서 여행에 대해 쓸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모든 여행기는 나 자신에게서 출발해 나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마치 여행이 그러하듯이. --- p.147
“카페를 열고 처음 3년간은 암흑의 터널이었습니다.”
호두나무 카페의 주인은 어느 인터뷰에서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이해한다. 3년의 시간이 농축되어 있는 저 문장의 무게를 이해하고, 암흑의 터널이 어떤 장소인지를 이해한다.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이해한다. 3년이라는 긴 시간을 손님 없는 카페에 앉아 마음 졸이며 보내야 했을, 하루에도 몇 번씩 포기해야 할지 계속 버텨야 할지를 가늠했을 시간을 이해한다. … 하지만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나라에서 돌아오고 몇 년 후에 나는 카페를 차렸다가 2년이 채 못 되어서 문을 닫았다.--- p.177
꼭 장사가 아니더라도, 어떤 일을 하건 그 일은 처음에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초라할 것이다. 가끔은, 아니 꽤 자주 그만 두고 싶은 마음을 느낄 것이고, 아무리 해도 만족스럽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그 시간들을 견뎌내야 한다. 아니, 무언가를 한다는 건 그런 일의 연속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p.180
아이는 자라면서 마음속에 여러 개의 상자를 만들어 둔다. 그 상자들은 대개 열쇠로 굳게 잠겨 있다. 상자에 든 건 어른의 눈에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당사자인 아이에게는 존재를 뒤흔들 정도로 비밀스럽고 고통스러운 경험과 감정들이다. 차마 다시 열어보지 못하고 열쇠로 잠가 꽁꽁 묶어둘 수밖에 없는 것들. 나는 나쁜 아이일까. 나는 구제불능일까. 나는 태어나서는 안 됐던 걸까. 그 상자는 자라서 어른이 된 뒤에도 마음 속 깊은 곳에 여전히 남아 있다. 난파한 배에서 그대로 수장된 바닷속 보물들처럼.
엄마가 한 그 말 한 마디에 상자 하나가 열리더니 이내 사라져버렸다. 무려 30년이나 묵은 상자였다.--- p.194
나의 아이들은 나를 어떤 식으로 미워하게 될까. 두려운 동시에 기대도 된다. 그 아이들이 우리를 미워할 수 있다면, 그 미움을 건강하게 처리하는 법을 스스로 터득할 수 있다면, 그 아이들은 비로소 부모를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이들은 다들 그런 식으로 어른이 되는 법이니까.
--- p.1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