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오늘도 꿈을 꿔. 어제도 꾸었고, 아마 내일도 똑같은 꿈을 꿀 거야. 꿈속에서만 만날 수 있는 그 세계를 실제로 본적은 없어. 현실 속 그곳에 무엇이 있는지 나는 몰라. 그곳에선 어떤 냄새가 나는지, 그곳의 생명들은 어떻게 숨을 쉬는지도 몰라. 하지만 분명 여기와는 다를 것 같아.
기운이 없지만 몸을 일으켜 움직여야 해. 그리고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려야 해. 어쩌면 영원히 꿈으로만 남게 될 그 세계를 만나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이야. 지금까지 몇 번의 시도는 있었지만 번번이 좌절 되었어. 인간들은 나에게 호기심을 보이다가도 결정의 순간에는 다른 고양이를 데리고 갔어.
오늘도 한 고양이가 인간의 품에 안겨 이곳을 떠났어. 정해진 순번이라도 있는 것 같아. 하지만 그 순번표에 나는 빠져 있어. 인간들은 나 같은 고양이는 거들떠보지도 않거든. ---「나만 빠진 순번표」중에서
홀로 갇힌 철창 안으로 찾아오는 계절만이 내 유일한 손님이야. 여름에 태어난 나를 기다리고 있던 건 숨 막히도록 텁텁한 공기였어. 펫숍의 여름은 잔인하도록 무더웠지. 힘겹게 버텨내고 나니까 열린 창문으로 선선한 바람이 들어왔어. 바람은 산들산들 내 목덜미 털을 흔들었어. 하지만 바람은 내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았어. 바람과 함께 사라진 가을을 따라 나도 저 창을 넘고 싶었어. 하지만 내 앞은 늘 철창이 가로막고 서 있어. 순번에 맞춰 이곳을 나간 고양이들처럼, 그렇게 가을은 떠났고, 또다시 나만 남겨졌어. 그리고 이번엔 찬 공기가 내 코끝을 시리게 하고 있어. ---「손님」중에서
아빠는 아침마다 사냥을 하러 나가. 그리곤 저녁이 되어서야 들어오는데, 항상 빈손이야. 아빠는 집에 오면 녹초가 되어서 쓰러져 자다가 다음날 아침이면 또 나가. 낮에 뭐하고 돌아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냥에 소질이 없다는 것만은 확실해. ---「숨바꼭질」중에서
엄마 아빠는 오랫동안 집을 비울 생각으로 나간 것 같아. 기다려도, 기다려도 돌아오지 않아. 어제는 울다 지쳐 잠들었지만, 오늘은 기다림에 지쳐 잠이 들 것 같아. 그만 포기하고 싶어. 하지만 엄마 아빠가 없는 집에서 나 혼자 살아간다는 건 상상할 수 없어. ---「이제 그만 돌아와 줘」중에서
겨우내 엄마 아빠는 나와 함께 집 안에서만 지내고 있어. 사쿠라 할머니도 외출을 하지 않고 집에만 있는 것 같아. 엄마 아빠는 이 겨울만은 상추를 먹지 않아서 행복하대.
아빠는 도시에서 살 때처럼 아침에 일을 하러 나가지 않아. 저녁때면 썩은 표정으로 들어와 지친 몸을 침대에 던져 눕지도 않아. 엄마도 하루 종일 방에 들어가서 일을 하지 않아. 그냥 아무 것도 안 해.
겨울은 고양이와 닮았어. 쓸쓸하고, 차갑고, 고립되기 쉬운 겨울처럼, 고양이는 스스로 고독을 즐기며 살고 있어. 그리고 지금 엄마 아빠도 그렇게 ‘고양이의 시간’을 보내는 중이야. ---「고양이의 시간」중에서
난 매일 인간들의 쓰레기통을 뒤져. 거기에는 먹을 것이 있어. 플라스틱과 유리병 더미 속에서 음식물을 찾아내는 건 별로 어렵지 않아. 그걸 버린 인간들조차도 맡기 역겨운 냄새가 솔솔 풍기거든.
냄새는 항상 꽁꽁 묶인 봉지 속에서 풍겨져 나와. 다행히 봉지는 내 여린 발톱으로도 쉽게 찢어져. 그 틈을 헤집어서 찾아낸 음식물 쓰레기만이 내 배를 채워줄 유일한 음식이야.
새끼 길고양이에게 여유 있는 식사는 허락되지 않아. 인간의 돌팔매를 피하려면 신경을 곤두세우고 먹어야 해. 그리고 이 냄새는 나만 맡을 수 있는 게 아니야. 다른 길고양이가 언제 나타날지 몰라. 덩치 큰 길고양이가 나타나기 전에 서둘러 이곳을 떠나야 해. 허겁지겁, 닥치는 대로, 그리고 미친 듯이. 그것만이 나에게 허락된 식사법이야. ---「새끼 길고양이의 식사법」중에서
나는 이 추위를 견뎌내고 다시 봄을 맞이할 수 있을까? 하늘조차 외면한 길고양이의 겨울은 춥고 배고파. 오직 인간만을 위해 내려주는 저 하얀 눈이 길고양이에겐 저주나 다름없어. 쥐와 도마뱀은 어딘가에 몸을 숨기고 눈이 녹기만을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그것들을 잡아먹을 수 없는 우리들을 위해 하늘은 어떤 은총도 내려주지 않아. ---「하늘에서 사료가 내린다면」중에서
고양이를 키운다는 게 마치 집사와도 같은 삶이라는 걸 몰랐었다. 소파에는 백두산 금강송에 새겨져 있을 것 같은 호랑이 발톱자국과 똑같은 것이 새겨졌고, 거실 한복판에는 고양이 장난감들이 나뒹굴었다. 그 덕분에 우리는 북유럽, 스칸디나비아, 모던, 앤틱 중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는 인테리어 정체성의 집에 살게 되었다. 이불과 옷, 수건과 발 매트에 붙은 고양이 털, 매일 깨끗하게 비워줘야 하는 화장실도 집사로서 감수해야 할 것들이었다.
여행을 갈 때도 고양이가 걸렸다. 우리들의 일시적 부재를 영원한 이별로 착각하면 어떡할까? 여행을 계획하는 것이 마냥 즐겁지 않았다.
길고양이는 도시에서도 자주 봤다. 그때는 그들이 내 삶에 들어오진 않았다. 초췌한 모습이 마음 아팠지만 내 발길을 붙들지는 않았다. 도시는 바쁜 곳이었고, 내 몸 건사하기에도 숨이 차는 곳이었다. 이곳 제주에서도 아슬아슬하게 도로를 건너는 길고양이를 매일 본다. 그리고 아스팔트에 말라붙어 있는 고양이 사체 앞에서 나의 행복에 자격이 있는지를 생각한다. 인간으로 태어난 것 말고 나에겐 무슨 자격이 있나? 고양이로 태어난 것 말고 저들에겐 무슨 죄가 있나?
길 위의 고양이도 모두 행복하기를.
---「에필로그」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