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쟁이 중요한 것은 논쟁을 통해 쟁점을 분명히 하고 더 나은 해법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 70여 년 동안 진행된 논쟁들이 광복 이후 우리 사회를 이끌어왔듯, 생산적인 논쟁들을 통해 우리 사회의 미래를 열어갈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산업화와 민주화를 넘어서 새로운 국가, 새로운 사회를 향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두고 앞으로 논쟁들이 더욱 활기차게 이뤄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프롤로그」중에서
전쟁범죄자들이 제대로 처리됐던 지역과 그러지 못했던 지역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다. 전범들이 처리된 지역에는 극우가 존재하지 않는다. 극우가 없으면 극좌도 공존이 불가능하다. 좌와 우, 중도만이 있다. 그러나 전범이 부활한 지역에서는 극우와 극좌가 적대적으로 공존하고 있다. 진정한 좌우나 중도가 힘을 얻기 어려운 구도다.
---「1장 분단 원인 논쟁」중에서
문학 논쟁은 새로운 국가와 사회의 건설이라는 정치 과정과 긴밀히 결합될 수밖에 없었다. 광복 직후 문학 논쟁에 대한 뛰어난 연구 업적을 남긴 국문학자 김윤식이 날카롭게 지적했듯 해방 공간은 ‘역사를 선택할 수 있는 참으로 희귀한 공간’이었고, 이러한 시대적 특징은 문학의 이념적 대결을 격화시킨 셈이었다.
---「3장 좌우파 문학 논쟁」중에서
친일 세력의 맥을 잇고 있는 한국 사회의 주류는 비주류에 의한 청산작업을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제때 해결되지 못함으로 인해서 과거사 문제가 정치적 문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남남갈등의 가장 중요한 이슈 중 하나가 됐다.
---「5장 친일파 논쟁」중에서
《해방 전후사의 인식》과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을 둘러싼 논쟁은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임을 새삼 깨닫게 한다. (…) 어느 나라건 역사 해석에서 하나의 시각만이 존재하지는 않는다. 역사적 사실의 복원과 평가 또한 고정돼 있지 않다. 요컨대, 역사는 새로운 사실의 발견과 기억의 복원으로 재구성되며 재해석된다.
---「6장 해방전후사 해석 논쟁」중에서
박명림의 연구는 전쟁의 구조적 기원과 행위적 원인을 포괄적이며 미세하게 추적했다는 점에서 주목받아 마땅하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2]는 한국전쟁의 국제 논쟁에서 우리 학계의 자존심을 세워준 연구라고 평가할 수 있다.
---「9장 한국전쟁 해석 논쟁」중에서
4·19 정신은 앞으로도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를 지키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100년 후의 역사학자들이 지금의 역사를 돌아본다면, 어쩌면 5·18과 6·10, 그리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 광우병 파동, 세월호 사건을 거쳐 지금도 4·19 혁명이 계속되고 있다고 서술할지도 모른다.
---「11장 4·19 평가 논쟁」중에서
그러나 혁명적 목표를 제시했다고 해서 쿠데타가 ‘혁명’이 되는 것은 아니다. 주도 세력이 추구했던 이념, 주도 세력의 구성 그리고 쿠데타 이후에 실시된 정책과 결과가 ‘혁명’적 성격을 갖고 있었는가를 검토해야 한다.
---「12장 5·16 성격 논쟁」중에서
조약 해석에 대한 한·일 정부 사이의 논쟁에서 기가 막힌 묘수가 나왔다. 양국 정부가 각각 자신의 의견대로 해석하기로 한 것이다. (…) 그래서 일본은 배상금 대신 독립축하금을 주었고, 한국은 ‘청구권 자금’이라고 명명하면서 배상금의 성격을 포함하고 있다고 해석했다. (…) 그러나 눈앞의 긴급한 사안을 해결하기 위해 정작 한국과 일본 정부 사이에 논쟁이 되는 이슈들에 대해 합의하지 못함으로써 결국 50년이 지난 최근 한·일관계는 최악의 상태에 도달해 있고 후유증도 계속되고 있다.
---「14장 한일 국교정상화 청구권 자금 논쟁」중에서
베트남 파병에 대한 논의는 다른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 베트남 파병을 결정했던 원래의 목적, 즉 한·미동맹과 안보를 위한 목적은 달성됐는가? (…) 전쟁특수와 유신 선포, 고엽제 문제에 대해서도 신중한 접근이 필요하다. 전쟁특수가 그렇게 컸다면 왜 1960년대 후반 외환위기와 부실기업 위기가 발생했을까? (…) 한국에서는 참전군인과 고엽제 환자들에 대한 조사와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가?
---「15장 베트남 파병 논쟁」중에서
그러나 중등교육 평준화가 실시된 시점이 왜 1960년대 말이었는가에 대한 질문은 아직도 유효하다. 1968년은 한반도 안보위기의 정점에 있었던 시기였고, 1969년은 3선개헌이 있었던 해였다. 평준화 정책은 1968년 11월에 발표된 국민교육헌장과 함께 시행됐다. 모든 사람들이 평준화된 교육을 통해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발전을 위해’ 헌신할 국민이 돼야 했기 때문이었는가?
---「16장 교육 평준화 논쟁」중에서
경제 성장과 개발독재라는 차원에서 유신 체제가 필요했는가의 문제였다. 필요했다는 주장은 1960년대의 경공업 중심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경제구조 개편이 필요한 상황과 주한미군 감축과 데탕트로 인한 위협이라는 상황에 근거하고 있다. 반면 필요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유신은 개인적 장기집권욕에 의해 만들어진 체제였으며, 만약 민주주의 체제에서 경제 성장이 이뤄졌다면 더 바람직했을 것이라는 주장으로 대부분의 역사학자들과 진보적 사회과학 연구자들은 이러한 부정적 입장을 갖고 있다.
---「18장 유신 체제 논쟁」중에서
그렇다고 모든 논란이 해명된 것은 아니다. 지금도 광주에서 발포의 최종 책임자가 누구인지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당사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고 있다. (…) 최근 ‘일간베스트저장소’ 회원들에 의해 광주항쟁의 진실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 있었다. (…) 이러한 주장들이 근거가 없는 주장임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이슈가 됐던 점을 감안한다면, 광주는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22장 광주항쟁 논쟁」중에서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특정 지역의 정서였다. 운동권의 계파 내에서도 후보와 지역에 따라 헤쳐 모이는 현상이 나타났다. (…) 단일화를 통한 이벤트를 통해 선거에서 이기려 하는 꼼수는 통하지 않는 것이 1987년 대통령선거가 주는 진정한 교훈이 아닐까.
---「25장 대선 후보 단일화 논쟁」중에서
박 총장 발언 파동이 갖는 의미는 주사파 존재 여부가 아니었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그의 발언이 여론을 흔들어 놓았다는 점이었다. 이후 진보 인사들을 북한 추종세력으로 모는 사회 분위기가 만연했다. 사회적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갖고 있는 보수 언론들은 박 총장 방식의 여론몰이를 시작했다. 그때부터 한국 사회에서 매카시즘(극단적 반공주의)이 횡행하기 시작했다. 증거는 필요하지 않았다. ‘친북 좌파’, ‘좌빨(좌익 빨갱이)’, ‘종북(북한 추종)’이란 용어가 남발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한국 사회에서는 ‘상식’이 사라졌다.
---「29장 주사파 발언 논쟁」중에서
2015년 시점에서 돌아보면 지난 민주화시대에 우리 사회에선 1987년의 ‘민주화의 시간’과 1997년의 ‘세계화의 시간’이라는 두 개의 시간이 동시에 흘러왔다. 1987년 이후 우리 사회는 민주화라는 새로운 변화를 갈망해 왔지만 그 변화는 어느덧 우리 손아귀에서 벗어나 세계화라는 타율적 변화를 강제해 왔다. 민주화의 시간을 특징지어 온 사회개혁의 구심력이 세계화의 시간을 특징지어 온 구조적 강제라는 원심력에 의해 서서히 압도된 것이 1997년 이후 우리 사회의 풍경이었다.
---「31장 87년 체제냐 97년 체제냐 논쟁」중에서
현재 상황에서 더 큰 문제는 대북정책이 정권에 따라 조령모개(朝令暮改)한다는 점, 그리고 심지어는 한 정부가 계속되는 상황 속에서도 계속 바뀐다는 점이다. 대북정책은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수 있을 만큼 중대한 사안이기에 정권 교체와 관계없이 지속성을 가져야 한다. (…) 또한 대북정책에는 충분한 사회적 공감대가 필요하다는 점 역시 햇볕정책이 주는 교훈이라고 할 수 있다.
---「33장 햇볕정책 논쟁」중에서
2001년 9·11테러 이후 미국 정부는 다시 한번 해외주둔 미군재배치계획을 통해 주한미군의 감축 및 신속기동군으로의 전환을 추진했다. (…) 그리고 이는 2000년대 중반 한국군에 전시작전통제권 이양을 추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의 요구보다 빠른 2009년 전시작전통제권을 이양하겠다고 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37장 전시작전통제권 환수 논쟁」중에서
무상급식 논쟁에 담긴 중요한 정책적 함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고 사회 양극화를 해소할 복지국가 구축을 어떻게 현실화할 수 있는지에 있었다. 어떤 복지정책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추진하기 위해선 국가 발전전략에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 강제와 경로의존성을 고려한 상태에서 정부의 전략적 선택을 극대화해야 한다. 이러한 전략적 선택에서 재정정책과 복지정책 간의 균형을 어떻게 이룰 것인지를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복지정책에서 정치적 리더십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38장 무상급식 논쟁」중에서
‘안철수의 도전은 현재진행형이지만 ‘2011~2012년 안철수 현상’은 쇠퇴한 것으로 보인다. 그 원인은 안철수 개인의 취약했던 정치적 역량과 기성 정치사회가 갖는 구심력이 안철수 현상의 정치적 세력화를 허용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주목할 것은 안철수 현상이 쇠퇴했다고 해서 국가와 시장을 개혁하려는 시민사회의 열망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39장 안철수 현상 논쟁」중에서
세대사회학의 관점에서 기성세대의 ‘노력’과 청년세대의 ‘노오력’ 간 인식의 거리는 한국 사회의 세대 단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계급이동의 사다리가 갈수록 사라져가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다. 점증하는 불평등을 해소하지 않고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 없고 선진국에 도달하기 어렵다. 불평등을 해소할 수 있는 방안들은 이미 제시돼 왔다.
---「40장 수저계급론 논쟁」중에서
흥미로운 것은 뭉크가 한국 사례를 다룬다는 점이다. 뭉크는 한국이 촛불집회를 통해 권위주의로의 후퇴를 막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켰다고 평가한다. 국민 위에 군림하려는 지도자를 거부하고 국민주권의 민주주의를 사수하려는 게 촛불집회의 원동력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을 통해 아시아의 민주화를 선도했던 한국은 촛불시민혁명을 통해 위기에 처한 민주주의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었다.
---「에필로그: 촛불시민혁명과 한국 민주주의」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