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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할아버지와 꿀벌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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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19년 11월 05일
쪽수, 무게, 크기 460쪽 | 520g | 140*210*25mm
ISBN13 9788965963509
ISBN10 8965963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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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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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흘러 꿀벌 세계의 내면에 관해 더 많은 것을 알게 될수록 인간 세계의 외면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가 더 깊은 절망 속으로 빠져들수록 나와 자연의 관계는 더 깊어졌다. 나는 꿀벌들이 ‘서로를 얼마나 살뜰히 보살피는지, 얼마나 열심히 일하는지, 언제 무리를 지어 어디로 갈 것인지 같은 문제를 얼마나 민주적으로 결정하는지, 또 미래 계획을 어떻게 세우는 지’ 등을 배워나갔다. 심지어 벌에 쏘인 경험조차 내게 용감해지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 p.18

내 직관이 내게 동생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비행시간 내내 나는 엄마가 우리에게서 멀어지고 있다는 걸 느꼈다. 말로 표현할 수는 없지만 분명히 뭔가 사라지고 있었다. 그것은 키가 자라는 것처럼 다 일어나고 난 뒤에야 알아볼 수 있는 그런 변화였다. 착륙할 즈음이 되었을 때 엄마의 눈은 더욱 멍해 보였고 그저 앞만 향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보이지 않는 것처럼. 엄마는 미국 중서부 3만 피트 상공 어디엔가 부모의 역할을 버리고 온 것 같았다.
--- p.42~43

마치 로드아일랜드에서 살았던 우리 가족의 삶은 그저 한 편의 영화였고 이제 그 영화는 끝났다고, 그걸로 끝일뿐이라고 세상이 내게 말하는 것 같았다. 무엇이든 시간이 흐르면 잊히게 마련이 다. 이런 식으로 모두가 아빠를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여긴다면 아빠도 언젠가 기억에서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 p.74

할아버지는 벌터 근처로 나무 그루터기 두 개를 가져왔고, 우리는 거기에 앉아서 벌들이 날아드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마치 다른 사람들이 모닥불이나 바다를 바라보는 것처럼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는 각각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벌들의 행동 양식을 해석하는 일은 참 재미있었다. (...)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지 않았다면 나는 벌통이 여성의 공간일 거라고는, 왕은 없고 여왕만 존재하는 성일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약 6만 마리의 딸들이 어머니를 먹이고 물방울을 나르고, 밤에는 따뜻하게 온도를 유지하며 어머니를 돌본다. 어머니인 여왕벌이 알을 낳지 않으면 봉군은 시들어 죽게 되겠지만 딸들이 어머니를 돌보지 않는다면 여왕벌 역시 굶어 죽거나 얼어 죽을 것이다. 서로를 필요로 하는 요소가 꿀벌들을 강하게 유지해주고 있었다.
--- p.100~101

유칼립투스에서 풍기는 박하 향을 들이마시자 내 몸의 윤곽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윙윙거리는 소리로 가득한 곳에 있는데 어쩐지 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곳에 있으면 아무도 나를 볼 수 없었고 또 누구도 나를 불쌍하게 여길 일이 없었다. 이 위에서 나는 더 이상 아빠 없는 아이가 아니었다. 침대에 누워 있기만 하는 엄마를 둔 아이도 아니었다. 꿀벌들은 나를 투명인 간으로 만들어주었다. 나는 눈을 감고 벌들이 불러주는 노랫소리에 편안히 몸을 맡겼다.
--- p.119

할아버지가 내게 이것저것 가르쳐주자 꿀벌의 세계가 점점 더 재미있어졌다. 할아버지처럼 나도 벌의 모든 행동을 이해하고 싶었다. 꿀벌의 세계에 푹 빠져 있을 때만큼은 마음이 어지럽지 않았다. 그저 가만히 벌집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음이 느긋해지고 편안해졌다. 근심을 내려놓고 벌들과 그들의 행동에 정신을 쏟고 있으면 마음에 평온이 찾아왔다. 보이지 않던 온갖 생명이 주변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또 그런 생명들을 지켜보다 보면 웬일인지 내 문제가 별일 아닌 것처럼 느껴졌고 위로받는 것 같기도 했다.
--- p.144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꽁꽁 싸맨 버스 안에 있을 때면 할아버지가 다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날 동등한 한 인간으로 대해주며 말을 건네는 할아버지 모습에 적응하기 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할아버지는 자신이 내가 속상해할 것 같거나 내가 감당할 수 없을 만한 이야기를 하지 않도록 단어를 신중히 골라가며 중요한 이야기를 하려고 애쓰는 것 같았다. 할아버지는 다시 밀랍을 긁어내기 시작하면서도 이 새롭고 어른스러운 방식으로 계속해서 내게 이야기를 건넸다.
--- p.226

내가 나라는 게 애처로웠다. 남편이 없어서 멍청한 볼링 파티에 가야 했던 엄마가 애처로웠다. 싸우기 싫어해서 항상 놀림의 대상이 되는 동생이 애처로웠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모든 게 잘못 돼버린 지금 이 상황이 애처로웠다. 오늘 엄마는 몇 년 전 침대로 기어들어갔던 때와는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생쥐 같았던 엄마가 퓨마로 돌변해 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서 캘리포니아에 오기 전에 엄마가 어땠는지 떠올려보았다. 그러나 그걸 기억해내는 건 쉽지 않았다. (...) 너무 많은 시간이 흘러버린 탓에 비틀스의 노랫말이나 겨울의 눈, 무더기로 쌓인 낙엽을 밟으며 뛰어가는 느낌 같은 로드아일랜드에서의 추억을 거의 다 잊어버린 뒤였다.
--- p.310

나는 이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어쩔 수 없다고 포기한 채 몸에 힘을 빼고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내 몸이 엄마에게서 점점 더 멀어져 어두운 바다 밑바닥으로 가라앉는 상상을 했다. 더 깊이 내려갈수록 주변이 점점 조용해지더니 이내 엄마의 고함 소리도 흩어져버렸다. 그렇게 내 몸은 보이는 것도 들리는 것도 없는 해저를 향해 서서히 가라앉았다. 마침내 부드러운 모래에 등이 닿자 눈앞에 철문이 나타나 내 몸 전체를 에워싸며 엄마가 두 번 다시 내게 손댈 수 없도록 나를 가둬버렸다.
--- p.353

할아버지는 너무 티 내지 않으면서 우리에게 삶을 기꺼이 받아들이라고 용기를 돋워주었다. 그리고 벌들은 개별적인 작은 노력이 한데 모여 집단적 힘을 만들어내면서 자기 존재보다 훨씬 더 웅대한 목적을 품고 살아간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상기시켜주었다. 꿀벌은 엄마처럼 벅찬 임무를 손에서 놔버리지 않고 어떤 상황에서든 대범하게 맞서 일어나 스스로를 꼭 필요한 존재로 만들었다. 꿀벌은 받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내어줌으로써 자신의 생존을 보장받고 은총의 상태라고 부를 만한 단계에 도달했다.
--- p.374

엄마는 다른 사람을 결코 사랑할 수 없게끔 철벽을 치고서 자기 자신을 혐오하는 훈련을,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버지로부터 받으며 자랐던 것이다. 엄마도 혼란에 빠져 있는 보호자였다. 엄마는 우리에게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나는 굉장히 많은 것들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엄마는 끊임없이 다이어트에 집착했고 극심하게 불안해했다. 친구들을 쉽게 사귀며 고등학교 생활을 즐거워하는 나를 부러워했다. 어째서 엄마가 이혼을 동화 속 유리구두가 산산조각 난 것처럼 생각했는지, 어째서 엄마가 항상 삶이 자신을 기만한다고 여기고 숨어들기만 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는 피해의식에 길들여진 것이었다. 숱하게 쓰러지다보니 그저 시도하지 않는 편이 더 안전하다고 느끼게 된 것과 같았다.
--- p.411

나도 엄마처럼 내 인생에 결여된 많은 것들로 삶을 정의내리며 불행하게 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혹은 가장 심오한 방식으로 구원받았다는 데 감사하며 사는 길을 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꿀벌들은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었고, 내게 좋은 사람으로 자라는 방법을 가르쳐주었으며, 길을 잃고 헤매던 내 어린 시절을 이끌어주었다. 할아버지는 내게 벌들이 얼마나 성실하고 용감한지, 그들이 얼마나 서로 협력하고 분투하며 살아가는지, 그 밖에도 내가 혼자 살아가면서 필요할 모든 자질을 벌을 통해 보여주었다. 내 주변에 살아 숨 쉬는 모든 것들이 가족이라는 사실을 내게 묵묵히 가르쳐주고 있었던 것이다.
--- p.425~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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