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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비 온 뒤를 걷는다

우리는 비 온 뒤를 걷는다

: 눅눅한 마음을 대하는 정신과 의사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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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4월 21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420g | 135*200*30mm
ISBN13 9788925569390
ISBN10 89255693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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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개 (1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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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나 조현병 같은 만성질환을 앓는다는 것 그리고 그런 환자의 가족이 된다는 것은 끝날 기약이 없는 장기전에 동원된 병사의 삶과 닮았다. 시간이 흐르고 그들 중 더러는 잡고 있던 손을 놓아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또 많은 가족과 환자는 서운하더라도, 다들 제 갈 길 따라가기 마련이라며 그 시간들을 버텨낸다. 그래도 누군가가 먼저 손 내밀어 주길 내심 바라며.
---「그래도 먼저 손 내밀어 주길」중에서

정신과 밥을 먹은 지도 얼추 20년. 이제는 나도 경청이나 공감, 해석 같은 것은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방법으로 이뤄져야지 의미가 있다는 것 정도는 안다. 환자의 감정이 격동한다고 해서 꼭 치료적인 의미가 있는 게 아니란 것도, 더군다나 그것이 내 능력과는 별 연관이 없다는 것도 안다. 하지만 누군가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일이 이 직업의 가장 기본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를 찾는 사람들에게 가장 흔히 결핍되어 있는 것이 자기 이야기를 할 기회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 이야기를 하며 울어볼 기회 한 번이 없었던 사람들이, 참 많은 세상이라는 것도.
---「이야기할 시간, 울어볼 기회」중에서

소수자에 대한 다른 표현과는 달리, 사용하면서 거의 아무런 감수성의 저해도 받지 않는 ‘미쳤다’라는 표현을 볼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하다. 갑자기 내 차 앞을 끼어드는 운전자에게, 말도 안 되는 지시를 내리는 상사에게, 나를 버리고 떠난 전 애인에게 우리는 너무 쉽게 ‘미친’이라는 수식어를 붙인다. 그 말은 누군가에겐 배냇병신, 귀머거리, 앉은뱅이, 곰배팔이, 사팔뜨기, 애꾸, 벙어리, 청맹과니, 문둥이, 언청이, 곰보 같은 말처럼 너무 당연하게도 상처가 된다.
---「듣는 마음을 미루어 짐작건대」중에서

환청이니 세계의 지도자니 하는 우리 눈에 낯설어 보이는 기이한 것들을 제외한다면, 조현병에 걸리지 않은 우리 삶이 그녀와 그렇게 많이 다를까 싶다. 젊어서 우리는 자신에게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믿고, 자기는 남들보다 나은 삶을 살 것이라고 믿고, 그런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세상에 대해 때로는 분노하고 때로는 절망하며 젊은 날을 보낸다. 그리고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으며 점차 자신의 한계를 인식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중년의 호르몬이 마음을 흔들어 놓는 날이 오기도 하고, 점차 둔해지는 정서를 통해 예전 같으면 기쁘고 슬펐을 모든 자극들을 무덤덤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도 한다.
---「우리는 모두 그럴 거라고 믿었지」중에서

자신과 같은 트라우마를 공유하는 사람들이 도처에 널려 있어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당당하고 쉽게 분노할 수 있었고, 또 그 분노를 쉽게 용인받을 수 있는 시대를 살아온 것이 우리 윗세대다. 이남에서는 ‘빨갱이를 몰아내자’라는 구호로, 이북에서는 ‘미제의 각을 뜨자’라는 구호로. 하지만 그 시절을 그렇게 분노로 살아오지 않았던 사람들 또한 우리 곁에 있음을 우리는 안다. 그들이 있어서 어쩌면 우리 세대는 아버지 세대가 겪었던 그 참화를 피할 수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음에 생긴 분노는 때로는 살풀이처럼 풀어야 하지만, 때로는 승화시킬 필요도 있다. 그 승화의 방어기제를, 정신과 교과서에서는 ‘성숙한 방어기제’라고 부른다.
---「성숙한 사람은 화를 익힌다」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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