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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과 혐오

문명과 혐오

: 젠더·계급·생태를 관통하는 혐오의 문화

[ 개정판 ]
리뷰 총점10.0 리뷰 2건 | 판매지수 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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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비평/비판 top100 1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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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책은『거짓된 진실』(2008)의 개정판 도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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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0년 06월 22일
쪽수, 무게, 크기 544쪽 | 706g | 152*225*35mm
ISBN13 9788992055765
ISBN10 89920557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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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책소개 보이기/감추기

목차 목차 보이기/감추기

서문
개정판 서문

드러내기
유용성
비가시성
경멸
땅 되돌려주기
보기 시작하기
있는 그대로 보기
어둠의 저편
범죄자들
권력의 대가
동화
생산
허위 계약
거리
기업, 경찰, 그리고 아귀들
전쟁
저항
개척지 넓히기
철창 닫기
홀로코스트
집으로

감사의 말
옮기고 나서

책 속으로 책속으로 보이기/감추기

이 책은 하나의 무기다. 잔학 행위에 반대하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손에 쥐어진 총이고, 그 총을 어떻게 써야 하는지 알려주는 매뉴얼이다. 이 책은 우리의 인식을 묶어두고 지금 같은 세상에 우리를 묶어두는 밧줄을 자르는 칼이다. 도화선에 불을 붙이는 성냥이다.
---「서문」중에서

내가 깊이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를 옮기게 되어서, 그리고 이 책의 전생이었을 나무들에게 보람을 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번역을 했다. 이 책에서 인종차별, 포르노, 아동 학대, 환경 파괴, 노동 착취 등 많은 잔학 행위를 꿰뚫는 분석의 명쾌함이 무척 인상적이지만, 개인의 문제로 돌아올 때 마음에 오래 남는 것은 ‘착한 독일인’ 이야기였다. 명령을 충실히 따르는 군인,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는 기술자였던 평범하고 선량한 독일인들이 유대인 학살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옮긴이 후기」중에서

신문 발행인에 불과했던 율리우스 슈트라이허도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검사 중 한 명은 법정에서 이렇게 말했다. “피고인은 반유대인 범죄의 물리적인 범행에 직접 관여한 정도는 비교적 낮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이유에서 피고는 직접적인 범죄보다 더 큰 죄를 지은 것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정부도 그들의 정책을 지지하는 국민들이 없다면 대량학살 정책을 시작하고 실행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들을 교육하고 살인자들을 만들어내고 혐오를 가르치고 혐오를 주입하는 것 …… 그것이 슈트라이허의 일이었다. …… 일찍이 그는 박해를 주장했다. 그리고 박해가 벌어지자 그는 몰살과 절멸을 이야기했다. …… 이런 범죄들은 피고나 그와 비슷한 사람들이 없었다면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 그가 없었다면, 헤르만 괴링, 칼텐브룬너, 히틀러 같은 자들의 명령을 따를 사람이 없었을 것이다.”
---「드러내기」중에서

평균적으로 볼 때 아동 매춘의 고객이 되는 남자는 1년에 2,000명이 넘는다. 매년 최소한 100만 명의 새로운 소녀들이 강제로 매춘을 하게 된다. 물론 아이들에게 손상을 입히는 것이 성적 착취만은 아니다. 50만 명의 아이들이 매년 기아 등으로 죽는다. 제3세계 국가들이 제1세계에서 얻어 쓴 빚―그 나라 자원과 인프라를 담보로 해서 얻은 빚―을 갚느라 경제 사정이 어려워진 직접적인 결과로 많은 아이들이 죽기도 한다. 21세기 제국주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매년 1,100만 명의 어린이가 쉽게 치료할 수 있는 질병으로 목숨을 잃는다. 세계보건기구 사무총장은 이것이 “소리 없는 제노사이드”라고 말한 적도 있다.
맞는 아이들도 있다.
---「비가시성」중에서

그들은 나더러 나쁜 사람, 멍청한 고집쟁이라고 말한다. 내 삶의 방식이 어떤 것에 대한 착취에 기초한다는 것을 보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에는 권리나 지각이 없어 보이는 어떤 것을 착취해서 살고 있다고 말이다. 아직도 화가 가라앉지 않는가? 그렇다면 이건 어떤가? 내 컴퓨터의 하드드라이브 제조 과정이 태국 여성들을 죽게 만들었다는 이유로 외부인들이 내 컴퓨터를 가지고 가버린다. 내 옷은 착취 공장에서 만들어졌기 때문에, 내 고기는 공장형 축산시설에서 온 것이기 때문에 빼앗아가고, 내가 먹는 값싼 채소는 가족농을 몰아내는 농업기업이 공급하는 것이기 때문에 압수한다.
---「땅 되돌려주기」중에서

얼마나 많은 중국인들이 센트럴퍼시픽 철도를 건설하다 죽었는지 아무도 모를 것이다. 1870년에는 철로를 따라 늘어선 야트막한 무덤들에서 유골 2만 파운드를 모아 죽은 사람들의 고국으로 보냈다. 그러나 서쪽으로 죽 이어지는, 표시도 없는 무덤에 수천 명의 유골이 더 묻혀 있었다.
철로 완성의 대가로 돌아온 것은 실직이었다. 그리고 그 전에는 백인 미국인들이 중국인들에게 상당히 분개하는 정도였지만 이제는 그것이 혐오로 바뀌어 있었다. 이미 노동 시장은 경쟁이 심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수만 명의 노동자들, 특히 심한 육체 노동을 하는 사람들이 일자리를 두고 경쟁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오늘날 후기산업사회 자유무역 시대에는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친숙한 시나리오다.
---「동화」중에서

“우리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동물이 아니고 우리는 바이러스가 아니고 우리는 쓰레기가 아닙니다. 우리는 살과 뼈, 피부가 있고, 심장이 있으며, 우리는 어떤 이의 누이이고 딸이고 손녀입니다. 우리는 사람입니다. 우리는 여자입니다. 존중과 품위로써 대우받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누리는 권리를 우리도 가지고 싶습니다. 나는 인신매매를 당했고, 강간을 당하고 구타당한 후 억지로 남자들을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모욕을 당하고 물건처럼 취급되어 남자들이, 그래요, 남자들이 쾌락을 느끼게 해야 했습니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돈을 벌어다주었고 또 다른 많은 사람들에게는 쾌락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내게 남은 것은 수치심, 고통, 모멸감뿐이었습니다.” 나는 그녀의 연설을 여러 번 읽었는데, 그때마다 경제와 혐오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혐오라는 이름보다 경제라는 이름으로 더 많은 잔학 행위가 저질러지는 사회에 산다는 것, 모든 생명에 대한 혐오, 멸시, 무시가 우리 경제의 단단한 기초인 사회에 산다는 것.
---「허위 계약」중에서

사람들은 KKK가 대변하는 가치를 좋아했다. 유명한 신문 기자 멘켄은 이렇게 썼다. “KKK를 해체해야 할 확실한 이유가 아직 단 하나도 제시되지 않았다. KKK가 유대인을 싫어한다면, 공화국의 좋은 호텔의 절반, 좋은 클럽의 4분의 3도 유대인을 싫어한다. KKK가 외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나 외국계 사람을 싫어한다면, 미국예술가협회도 외국계를 싫어하기는 마찬가지다. KKK가 흑인들을 싫어한다면, 메이슨 딕슨 선(미국 펜실베니아?메릴랜드?델라웨어 세 주의 경계선ㅡ옮긴이) 이남의 주들도 모두 흑인을 싫어한다. KKK가 저주와 처형에 찬성한다면, 감리교 교회도 그렇다. …… KKK가 잘 속아 넘어가는 사람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우편물을 이용한다면, 적십자도 그렇다. KKK가 자기 도덕성을 스스로 검열한다면, 미국 의회도 그렇다.
---「개척지 넓히기」중에서

“문제는 언제나 누가 이익을 보느냐로 좁혀지는 듯합니다.”
그가 대답했다. “자본주의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그 문제를 다룰 수 없지요.”
나는 마음속으로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문명으로 대체했다.
“대안들이 점차 사라지는 것과 동시에 자본주의는 가진 자들에게 더욱더 유리하게 되어가고 있어요. 어떤 이들은 우리의 경제 제도가 세계 역사에서 가장 성공적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이익을 주는 체제예요. 세계 사람들 절대 다수는 이 제도에서 이익을 전혀, 또는 거의 얻지 못해요.”
“이익을 얻기는 고사하고 죽임을 당하는 사람도 많지요.”
---「철창 닫기」중에서

모순처럼 보이는 이러한 현상은 유럽의 많은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소사업가 역할을 했고 귀족과 빈민 사이의 ‘중간층’으로 살아왔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부자들에게 고용되어 임대료 수금 같은 인기 없는 일을 했던 것이다. 그 결과 귀족계급에게는 멸시와 천대를 받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원성을 들었다.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을 멸시하고 가난한 자들은 부자들을 미워하지만, 유럽 많은 지역의 유대인들은 양쪽 모두에게 증오의 대상이 되는 난처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바우만은 이렇게 말한다. 그들은 “서로 적대하고 갈등하는 계급 대립의 목표물”이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중간에 끼인 것이다. 이러한 증오가 독일에서 폭발한 주요 이유는 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이 패한 결과, 연합국이 제시한 굴욕적이고 파괴적인 협약을 맺어야 했고 그로 인해 독일 사람들이 매우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홀로코스트」중에서

우리 체제의 무척 많은 부분의 특징을 이루는 혐오―이 책에서 설명하고 분석해온 혐오―는 신체적 조건의 산물이 아니다.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혐오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혐오는 수억 년간의 자연선택의 결과가 아니다. 우리들 각자를 키운, 우리의 틀을 만든 조건의 결과물이다. 우리에게 주입된 의문시된 적 없는 가정들의 결과다. 혐오를 멈추게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그 틀을 만드는 조건을 제거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전에는 성공할 수 없다. 그러니, 맞다. 그게 바로 내 해법이다. 우리는 문명을 제거해야 한다.
---「집으로」중에서

출판사 리뷰 출판사 리뷰 보이기/감추기

이유 없이 죽어간 사람들

“에드워드 앤토니 앤더슨, 1996년 1월 15일, 바닥에 엎드린 채 수갑을 찬 상태에서 총에 맞다. 프랭키 아르주에가, 15세, 1996년 1월 12일, 머리 뒤쪽에 총을 맞다. 그 다음 날인 어머니날, 그의 가족은 알 수 없는 사람에게서 비아냥거리는 전화를 받았다. 회신 다이얼을 누르니 경찰이 나왔다. 앤토니 바에즈, 1994년 12월 22일, 뉴욕 시 길거리에서 축구를 했다는 이유로 질식사당하다. 르니 캠포스, 수감 중이던 그가 자기 목에 티셔츠를 절반 이상 쑤셔넣어서 자살했다고 경찰은 발표했다. 폐에 이르는 기관의 4분의 3까지 티셔츠가 쑤셔넣어져 있었다.”

이들의 공통점은 경찰의 지시를 순순히 따랐다는 것, 그리고 흑인이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 등장하는 많은 죽음들은 ‘묻지 마’ 살인이다. 이 다양하고 끔찍한 사례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우리 사회가 타자를 이해하는 보편적인 방식이다. 너무 오래되어 ‘혐오’라고 인식되지도 않는 수많은 혐오들 앞에서 데릭 젠슨은 고백한다. “내가 백인으로 태어난 것이 다행이다.” “내가 남자로 태어난 것이 참 다행스럽다.”

유대인들이 민족 외에 다른 이유 없이 학살당했듯이, 많은 여자들은 ‘여자라는 이유’로 강간의 대상이 된다. 제3세계 아동 매춘은 세계의 거시 경제정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고, 미국 땅 어디에도 인디언의 피가 스며 있지 않은 곳이 없다. 1페니짜리 수분 보충제가 없어서 죽은 50만 명의 이라크 어린이들, ‘게으르다’는 이유로 땅을 빼앗기고 노예가 된 아프리카 원주민들, 휴지처럼 쓰고 버려진 수백만 중국인 이주노동자들, 전쟁에 반대하다 맞아 죽은 시민들……. 이유는커녕 이름도 없이 죽어간 이 수많은 목숨들 앞에서 데릭 젠슨은 눈물을 펜 삼아 글을 써야 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많은 살인들을 저지른 이들은 누구일까? “피가 흘러내리는 심술궂은 입에 뼛조각과 살덩어리를 물고 있는 미치광이들”일까? 데릭 젠슨의 말에 따르자면, 그들은 “우리 자신의 마음과 훨씬 더 가까운 무엇이었고 그것은 현재에도 마찬가지다.”

나와 세상의 관계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책

데릭 젠슨은 그 모든 문제들의 배후에 생산이 자리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생산성이 향상될수록 추상성 또한 커지면서 개인들 간의 유대의 끈이 사라진다는 점을 지적한다. 심리적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살인도 용이해진다. 홀로코스트를 저지른 기술자는 스스로를 어떻게 정당화하든 코앞에서 죽어가는 사람을 보아야만 했다. 인디언들의 머리 가죽을 벗겨내던 정복자들은 숨넘어가는 소리와 식어가는 체온을 직접 느껴야만 했다. 그러나 지금은 단추 하나만 누르면 수많은 생명을 살상할 수 있다. 또는 거시경제 정책 하나로도 충분하다.

데릭 젠슨은 생산을 불교의 ‘아귀 개념’이 현실에서 구현된 것으로 본다. 먹을수록 채워지지 않는, 영원히 만족할 수 없기에 스스로가 소멸할 때까지 멈출 수 없는 허깨비라는 것이다. 실제로 돈은 만져지지 않는다. 우리가 만지는 것은 종이지 돈이 아니다. 돈은 숫자다. 그렇기에 내가 얼마나 배불리 먹었는지를 느낄 수가 없다. 그 끝이 정해질 수 없는 숫자이기에 채우고 또 채워도 만족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숫자에 비례하여 실제로 불어나는 것도 있다. 그것은 인간적인 소외감과 소통 부재, 매년 수십만 명의 아이들을 죽이는 기아, 값이 너무 싸서 쓰고 버려도 되는 노예들, 그리고 천문학적인 수치로 높아져가는 생태 파괴에 대한 빚이다.

차별과 배제, 혐오는 문명의 형성과 함께 시작되었다. 데릭 젠슨은 문명의 시작과 함께 탄생한 노예제를 그 근거로 든다. 고대 문화의 꽃, 헬레니즘은 노예제를 통해서만 가능했고 노예제가 없었다면 그리스 국가도, 그리스 예술과 과학도 없었을 것이다. 나아가 유럽 국가도 없었을 것이고, 문명이 주는 고상함과 안락함도 존재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명의 기본 조건은 바로 타인을 착취하고, 자연을 착취하는 것이다.

새로운 변화를 상상하는 방법을 일러주는 매뉴얼

이 책은 2008년에 『거짓된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판된 바 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이 선정한 이 달의 책, 여러 언론사와 포털사이트의 추천 도서로 선정되는 등 국내에서도 주목받았으나 본 출판사의 사정으로 절판되었다가, 재출간을 원하는 독자들의 요구에 의해 새로운 제목, 새로운 디자인으로 다시 탄생하게 되었다.

10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므로 이 책의 문제의식은 빛이 바랬을까? 아니, 한국어 개정판 서문에서 저자는 혐오와 갈등이 오히려 더 격화되었다고 지적한다. 책이 처음 출간된 후 시간이 지나는 동안 세계적으로 중산층이 붕괴하고 빈부 격차가 심화되었으며, 경기가 나쁠 때나 경제가 몰락하는 지금 같은 시기야말로 사다리 아래로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한 혐오와 충돌이 극심해진다는 것이다.

데릭 젠슨이 제시하는 해법은 ‘구체로 돌아가자’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리고 “짙은 어둠의 시대에도” “혐오와 자기합리화의 문화를 극복하는 변화를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필연적으로 혐오를 양산해내는 우리 문화의 끔찍한 조건들을 되짚어보고 진정한 삶의 가치를 일깨워주는 이 책은, ‘살 만한 삶’을 꿈꾸는 독자들에게 뼈저린 절망에 이어 단단하고 순수한 희망을 안겨줄 것이다.

회원리뷰 (2건) 리뷰 총점10.0

혜택 및 유의사항?
제국을 지탱하는 힘은 신화다.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플래티넘 x***2 | 2020.10.18 | 추천0 | 댓글0 리뷰제목
대략 세상과 사회의 본질에 대해 알아가던 대학생 시절부터 귀가 따갑게 듣던 소리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이것이다.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인종차별을 가장 심하게 한다,한국의 인종차별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나쁘다,그에 반해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인종차별이 없다,한국은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인종차별이 없는 모습을 보고부끄러워하면서 본받아야 한다......;
리뷰제목

대략 세상과 사회의 본질에 대해 알아가던 대학생 시절부터 

귀가 따갑게 듣던 소리들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문구는 이것이다.

 

한국인이 전 세계에서 인종차별을 가장 심하게 한다,

한국의 인종차별이 전 세계에서 가장 나쁘다,

그에 반해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는 인종차별이 없다,

한국은 미국 같은 선진국에서 인종차별이 없는 모습을 보고

부끄러워하면서 본받아야 한다...................................

 

저런 소리들을 대략 10년 정도 진실이라고 믿고서 살아왔다.

 

그런데 이 책, <문명과 혐오>를 읽고 나서

그런 선입견이 산산히 박살나 버렸다.

 

<문명과 혐오>는 미국 사회의 수많은 병폐와 부조리를 

적나라하게 폭로하면서 

미국의 병든 모습들을 숨김없이 보여주고 있다.

 

미국 역사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서부개척이

사실은 미국 땅의 원주민인 인디언들을 학살하고

그들의 땅을 빼앗는 일이었다는 것을 비롯하여

아직도 벌어지고 있는 흑인들에 대한 집단 폭력과 인종 차별을 비롯하여

지구 환경을 오염시키는 대기업들의 횡포에 이르기까지,

미국의 민낯이 이 책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특히 2020년 현재에도 미국 사회에서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경찰들의 흑인 사살이나 과잉 진압이

비단 지금에 와서 불거진 일이 아니라

이미 100년도 넘게 오랫동안 계속 이어지고 있는

미국 사회의 전통이라는 점도

이 책을 읽으며 알게 되었다.

 

세계사 관련 책들을 오랫동안 읽으면서 하나 깨달은 점은

제국을 지탱하는 힘은 바로 신화라는 것이다.

 

과거 일제 강점기 시절,

2차 대전의 막바지에 이르기까지

조선의 친일파들이

일제에 충성을 바쳤던 이유는

그들이 일제는 무적이라는 신화를 믿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들은 일제의 동맹국 수장인 히틀러가 자살하고

나치 독일이 항복했다는 사실을

일본 신문을 통해 보았으면서도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그 신화는 소련군의 만주작전으로 인한

만주국의 붕괴와 관동군의 항복 및

일제의 패망으로 인해 비로소 깨어졌고,

그제야 조선은 해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2008년 미국발 국제 금융위기에 이어

2016년 트럼프 같은 극단적인 국수주의자의 집권과

그로 인해 플로이드 사망 사건 같은

미국 내 인종 갈등이 다시 재점화되면서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믿어왔던

미국은 인종차별이 없고 정의와 공정한 나라라는

신화에 금이 가고 있다.

이런 현상은 머지않아 미국이라는 제국도 무너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징조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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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매 Singing till the end 내용 평점5점   편집/디자인 평점5점 YES마니아 : 로얄 d********2 | 2020.08.27 | 추천1 | 댓글0 리뷰제목
──────────────────────────────우리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말과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누구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대로 타인을 판단하여 말한다. 문제는, 자신의 잣대로 타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이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직접 입 밖으로 내지 않더라;
리뷰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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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말과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누구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대로 타인을 판단하여 말한다. 문제는, 자신의 잣대로 타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이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직접 입 밖으로 내지 않더라도, 사회 제도와 구조가 이를 만나게 되면 상처는 굳은 고정관념과 차별로 남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문화 속 깊게 자리 잡은 혐오의 문화이고, 혐오의 군상이다. 미국의 사회 변혁 운동가인 데릭 젠슨이 펴 낸 「문명과 혐오」는 그러한 혐오의 양상을 경제, 정치, 범죄, 역사 등 다양한 사회 측면에서 살핀 다음 우리 인류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책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의 진로 방향에 확신을 서게 해 준 책이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책 내용을 나열식으로 언급하게 되면 나만의 글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에 나의 그간 경험, 진로와 관련한 부분(인종, 학살, 차별)을 책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겠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과거 사람들의 삶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보통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의 경우 민중의 삶보다는 정치·외교, 전쟁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곤 하는데, 나의 경우엔 하층민들의 삶에 더욱 더 정감이 갔고 애정이 갔다. 아마도 그들의 삶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그들이 느꼈던 고통에 공감이 갔다, 라고 이야기해야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차별받고, 억압받아 온 사람들. 사회가 혐오(넓은 의미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고정관념과 프레임 속에 박혀 살아 온 사람들. 어떻게 보면 우리들 누구도 애써 의식하려 하지 않아서, 애써 그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아서 사회가 형성한 이미지(image)가 전부 인 양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그들이 궁금했다.
한 번 형성된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느낀 바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형성한 이미지를 그 사람의 전부인 양 믿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진정한 이해 없이 말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사람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래서 다들 타인에 대한 이미지를 만든다면 그 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해버린다. 근데 이것이 옳은 일일까?
16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동양은 물론 오늘날 제3세계에 해당하는 모든 지역으로 뻗어나간 유럽 국가들은 세계 곳곳을 정복하며 식민지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식민지를 개척(그들 입장에선 개척이겠지)한다는 명분 아래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그들을 탄압하고 학살하며 억압해왔다. 문제는, 물리적·직접적 폭력이 차츰 희미해져가는 오늘날, 간접적·구조적·문화적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말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우수한 근대 문명을 발달시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본인들이 하필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유색인종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었고, 타자로 만들어버렸다. 하늘이 부여한 인권이 모두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천부인권은 백인들 내에서만 해당되었다.
그들은 영화, 드라마, 광고 등의 미디어 매체를 통해 은연중으로 흑인들과 동양인들을 차별함으로써 백인들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었다. 이것 또한 옳은 일일까?
이처럼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역사 속 사회가 형성해 온 이미지로 인해 차별과 편견을 받아 온 이들. 다른 하나는 권력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 이유 없이 희생되어 온 사람들. 결국 전자와 후자 둘 모두, 우리 사회가 혐오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억압해 온 대상들이다. 나는 오늘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동안 나는 학교 여러 활동 속에서 역사 속 소수자(소수민족, 여성, 학살 피해자들 등.)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그들을 기억해주고, 생각해주고, 존중해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기억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없었다. 막연하게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고만 말하였지, 어떻게 하면 심연 깊이 침전한 그들의 기억을 현대인들의 기억의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에 대한 의문이 들었었던 것 같다. 나는 우연히도 읽은 이 책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데릭 젠슨이 텔레비전 비판가 조지 거브너(George Gerbner)와 나눈 대화(‘땅 되돌려주기’ 챕터 참고.)를 참고하여 힌트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조지는 데릭에게 텔레비전이야말로 권력 구조의 한 행위자로,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판타지를 텔레비전으로 나타나게 함으로써 그 판타지가 우리들 각각의 의식에 스며들게 하게끔 한다고 말하였다. 텔레비전에 직접적으로 폭력이 얼마나 묘사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스토리가 주된 행위자라고 말한다. 만약 텔레비전에서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갈등 상황에서 우세하게 그려지는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 그 사람은 더 공격적이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텔레비전에서 한 문화 내 집단 혹은 성별이 더 피해를 입기 쉽게 묘사된다면, 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더 불안해하고 더 의존적이 되고, 갈등상황에 처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면서 말이다.
정말로 텔레비전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강자 혹은 약자라는 이미지를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 사회에 전파시킨다. 물론 권력자들의 의도가 다분하겠지만 말이다. 똑같이 만약에 그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간주하도록 이미지를 형상화한다면, 혐오의 문화는 단 한 번의 네모난 검정 박스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형성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오늘날의 소수자
(내가 이 글에서 말하는 소수자는 단순히 수적 열세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문화적으로 소외받아가며 열세에 있는 사람들을 칭한다.)는 이런 식으로 더욱 더 견고해지는 것 같다. 여성과 성소수자, 소수민족 등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부조리한 차별을 받고 있는 대상들의 경우 미디어에서 생산하는 매체물이 소수자로 낙인찍혀 많은 착취와 차별을 받아왔다. 최근 ‘복학왕’ 웹툰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웹툰 작가 기안84가 빚은 여혐논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유명 작가의 웹툰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소비를 하며 수용하게 되는데, 이때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미디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게 진실인 양 믿어버릴 수 있다. 그렇게 혐오의 문화가 고착화되면서 혐오 대상의 이미지로 굳어버리는 것이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생각난 키워드는 바로 ‘오리엔탈리즘’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는 서구 열강들이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동양의 이미지이다. 원래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유럽에서 동방의 예술문화를 지칭하기 위한 용어에 불과했지만,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 팽창 정책으로 동양과 제3세계 국가로 뻗어나가면서 자신들을 우월한 존재로, 동양 등은 열등한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동양은 열등하고, 향락적이고, 미개하며, 야마적인 문화를 지닌 것으로 말이다. 학계, 문화예술계, 정치·언론을 통해 은연 중 동양에 대한 차별이 있어 왔다. 특히나 오늘날은 미디어의 발달로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이 더욱 더 가속화되고 있는데, 책에서 이야기한 텔레비전의 역할과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내가 얼마 전 본 애니메이션 ‘개들의 섬’의 경우, 독일 감독이 스톱모션으로 만든 2040년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 대충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일본의 한 시장이 차기 대선을 위해 일부러 개 전염병을 퍼뜨려 개들을 쓰레기 섬으로 전부 보내버리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위선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에 문제제기를 한 학생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일본에 유학 온 미국 유학생이 비판의 목소리를 제기하여 일본 학생들을 계몽시키는 설정이었다. 굳이 서양인이 아니었어도 될 역할에 서양인을 배치하여 부패권력의 타도를 할 정의로운 인물군으로 설정한 것이다. 일본인, 동양인들은 그러한 서양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동조되는 인물들로 말이다. 어찌 보면 감독은 그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계몽가로서의 역할을 서양인으로 설정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감독이 가지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은 피해갈 수 없을 듯 해 보인다.
이처럼 미디어는 동양에 대한 차별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를 수용하는 소비자들은 그게 단순히 진실인 양 믿어버릴 수 있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소수민족, 제3세계인들, 흑인들, 여성과 같이 여태껏 소외되고 억압받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들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 이들이 그들에 대해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기 귀찮아서, 혹은 본인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열등한 타자로 규정하여 본인들 입맛대로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어느 문화도 결코 타문화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그런데 솔직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가? 정말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왜냐고 묻는다면, 우린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각각 역사가 있고, 각자 좋아하는 것이 있고, 각자의 취미, 선호가 있음을 완전히 아는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내가 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보를 다 머릿속에 넣었다가는 과부하 상태에 걸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예의와 정직의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날 형성한 혐오의 문화는 권력자들에 의해, 혹은 우리들 스스로에 의해 심어진 사고와 태도, 시각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내고 인간에 의해 주입된 산물이라는 얘긴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희망을 얻을 수 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보고 자랐다면, 우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다. 그동안의 우리 주위를 맴돌았던 담론과 매체가 소수자, 소외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열등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느끼게 만들었고, 우월한 집단으로 보이는 것들에 비교되어 자신들의 빛을 꽁꽁 감추어두었던 것을 기억하라. 담론과 같은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열등한 타자로 느끼게끔 만들었다면, 그 반대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야기가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인간이 만든 이야기에 의해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도록 되었다면, 인간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모두가 주체가 되는 이야기 또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의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 주체가 가지는 우월성 등은 우리들의 담론으로부터 희미해져 갈 것이고, 빛을 바랠 것이다. 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역사 속 타자에 관한 인식을 재고시킴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이렇게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 모두 정직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자기중심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은 멈춰서는 안 된다.
온갖 사회 운동을 통해, 그들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목소리를 사회에 내면서.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내가 학살 피해자들을 위해(아니면 역사 속 소수자들을 위해)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을 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스스로 늘 고민했다. 내가 과연 어떻게 해서 역사라는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책에서 언급된 유럽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정복 전쟁, 불태워진 마을, 못 먹게 된 농작물 등이 이제는 거의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졌다는 작가의 말에 나는 주목했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욘토켓의 경우, 그곳에서 백인들에 의해 일어난 원주민 학살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것에 주목했다. 책에선 데릭과 그의 또 다른 환경운동가 친구인 존(이런 친구들이 많이 있다는 것 또한 참 행운이지 않나 싶다.)이 함께 욘토켓을 걸으면서 그곳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500페이지의 분량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그들의 대화 속에서 찾았다.

“그들에게 가장 최악은 백인 무리들이 그들의 슬픔을 제멋대로 가져가 버리는 거야. 우리는 그들의 땅, 그들의 전통을 빼앗았는데, 이제는 그들의 슬픔까지 빼앗으면 안 되지…….”
“독일 레지스탕스 구성원들이 추모에 참여하고 싶어한다면? 그들이 자기네 민족이 저지른 잔학 행위를 인정하는 것이 나쁠까? 그게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물론 우리는 희생된 부족들의 주도하에 따라가야만 해.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없는 것 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도 있어. 우리 문화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까 우리가 그 책임을 지기 시작해야 해.”

그렇다. 사실 역사적으로 많은 학살 피해자들이 존재해왔지만,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기가 쉽지는 않다. 사회적으로도 관심도가 떨어질뿐더러, 학살을 저지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본인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저지르지 않은 일일지라도, 또 우리와 전혀 관련 없는 먼 지역의 일일지라도, 그들에 대한 관심과 기억을 놓지 말아야 한다. 나 역시도 비슷한 일을 학교에서 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에 관한 일이었다. 1학년 때부터 같은 반 친구와 함께 한국군에 의해 행해진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에 관한 고등학생들의 인식을 연구하기 위해 연구를 도맡아 줄 선생님과 계획을 하였다. 2학년 때는 1층 로비에 판넬을 설치하여 베트남전 피해자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를 스티커를 붙이는 형식으로 진행하여 조사하였고, 뒤이어 설문지를 제작하여 각 반에 배부하기도 하면서 우리가 분석한 연구결과를 과제연구 결과보고서에 활용하였던 적이 있는 것이다. 나와 그 친구(홍준이^^)가 이 프로젝트를 2년 간 함께 하면서 얻었던 결과는 우리의 논문에 있지 않았음을 안 것이다. 하면서 정말 보람을 느꼈던 바는 우리가 써내려간 50페이지의 논문이 아니라, 청원고 학생들과 교직원분들에게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1학년 때 과제연구 계획서 발표 대회를 통해 친구들, 선배들, 선생님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2학년 때는 특히 1층 로비를 활용함으로써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흥미를 가지고 지켜볼 수 있게끔 하였다. 또 설문지와 최종 발표 대회에서도 우리는 꾸준히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에 대해 상기시켜주었다. 결국 우리가 청원고라는 비록 작은 집단에 기여한 일은, ‘우리 논문과 활동을 봐주세요,’ 라며 외쳤던 것이 아닌,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을 조금이라도 기억해주세요,’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받은 상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처음으로 사회에 역사적 소수자들에 대한 관심을 끼칠 수 있다는 것에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이처럼 데릭과 그의 친구 존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소수자로 규정하여 학살하고 탄압한 이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것이 나는 내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의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물론 아직 명확한 답은 없다. 하지만 사회운동가인 저자처럼,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소한 일일 수 있다. 그저 학살 장소에 기념비 혹은 팻말을 세운다든지, 아니면 플랫폼을 활용한 콘텐츠를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니면 아래 사진과 같이 할 수도 있겠다.
위의 사진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다뉴브 강 강가를 촬영한 사진이다. 강둑위에 있는 것은 신발과 꽃, 캔들인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들을 다뉴브 강으로 몰고 가 그들에게 신발을 벗고 집단 자결을 강요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신발을 전시해둔 것이다. 매일같이 다뉴브 강을 걷는 사람들은 이 신발을 바라보며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슬픔, 아픔에 대해 추모하며 기억한다.
이처럼 사소한 움직임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차별과 억압의 대상들을 기억해주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다. 물론 우리가 형성해 온 혐오의 문화는 생각보다 견고할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꾸준히 시도해야 한다. 소수민족, 여성,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 여전히 많은 매체와 미디어는 그들에 대한 타자화를 행하고 있으며, 우리는 결여된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과 함께 그것이 사실인 양 믿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가 형성한 이미지는 우리의 사고와 태도를 지배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겨왔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편견을 받고, 차별적인 시선을 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경험해봐야 알 듯하다. 물론 나도 고등학교 생활하는 동안 이러한 것들 때문에 힘들었지만, 세상에는 생존의 오가는 고통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어떤 물리적 폭력보다 무섭게, 우리의 생활 속 깊이 침전하여 사고와 태도를 지배하는 문화적 폭력을 물리치는 것이다.

복잡다원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타인에 대한 애(愛)타심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소통이 단절되고 점점 더 개인화되는 요즘일수록 우리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지녀야 한다. 그래도 사람인데, 세상 사람들만큼은 사랑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인생을 깊게 짓누르는 혐오, 억압, 차별 등은 더 이상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 역시 역사 속에서 억압받고, 혐오의 시선을 받으며 타자로 전락한 소수자, 소외자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바탕으로, 그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더 이상의 고통이 없도록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갈 것이다. 물론 이미 이 세상을 멀리 떠난 이들에게는 소리 없는 외침이겠지만 그래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차별받고 억압받아온 당신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한다면, 그들에게도 많은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나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하다. 더 이상의 타자화, 차별이 없을 때까지, 끝까지 그들을 기억하며.
마지막으로, 영겁의 역사의 시간 속에서 힘들게 살아온 이들을 위로하며 아이유(IU)의 Love Poem 가사를 적으며 글을 마치겠다.


Here i am 지켜봐 나를, 난 절대
Singing till the end 멈추지 않아 이 노래
너의 긴 밤이 끝나는 그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곳에 있을게

-아이유(IU) Love Poem(2019) 中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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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2 | 2020.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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