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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의 말과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그 누구도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신의 주관대로 타인을 판단하여 말한다. 문제는, 자신의 잣대로 타인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는 것이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로 남겨질 수 있다는 것이다. 직접 입 밖으로 내지 않더라도, 사회 제도와 구조가 이를 만나게 되면 상처는 굳은 고정관념과 차별로 남게 된다. 그것이 오늘날 우리 문화 속 깊게 자리 잡은 혐오의 문화이고, 혐오의 군상이다. 미국의 사회 변혁 운동가인 데릭 젠슨이 펴 낸 「문명과 혐오」는 그러한 혐오의 양상을 경제, 정치, 범죄, 역사 등 다양한 사회 측면에서 살핀 다음 우리 인류가 앞으로 걸어가야 할 방향을 제시해주고 있는 책이었다.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나의 진로 방향에 확신을 서게 해 준 책이었다. 지금부터 그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책 내용을 나열식으로 언급하게 되면 나만의 글이 나타나지 않을 것이기에 나의 그간 경험, 진로와 관련한 부분(인종, 학살, 차별)을 책과 연관 지어 이야기하겠다.
나는 중학교 때부터 과거 사람들의 삶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보통 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친구들의 경우 민중의 삶보다는 정치·외교, 전쟁사에 많은 관심을 가지곤 하는데, 나의 경우엔 하층민들의 삶에 더욱 더 정감이 갔고 애정이 갔다. 아마도 그들의 삶에 관심이 갔던 이유는 그들이 느꼈던 고통에 공감이 갔다, 라고 이야기해야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차별받고, 억압받아 온 사람들. 사회가 혐오(넓은 의미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고정관념과 프레임 속에 박혀 살아 온 사람들. 어떻게 보면 우리들 누구도 애써 의식하려 하지 않아서, 애써 그들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려 하지 않아서 사회가 형성한 이미지(image)가 전부 인 양 믿어왔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런 그들이 궁금했다.
한 번 형성된 이미지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정말 그렇다. 내가 고등학교에 올라와서 느낀 바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형성한 이미지를 그 사람의 전부인 양 믿어버린다는 것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진정한 이해 없이 말이다. 사실 그럴 만도 하다. 사람에 대한 진정한 이해는 귀찮기도 하고, 시간도 많이 걸린다. 그래서 다들 타인에 대한 이미지를 만든다면 그 틀에서 모든 것을 판단해버린다. 근데 이것이 옳은 일일까?
16세기 대항해 시대 이후 동양은 물론 오늘날 제3세계에 해당하는 모든 지역으로 뻗어나간 유럽 국가들은 세계 곳곳을 정복하며 식민지를 형성하였다. 그들은 식민지를 개척(그들 입장에선 개척이겠지)한다는 명분 아래 원주민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고 그들을 탄압하고 학살하며 억압해왔다. 문제는, 물리적·직접적 폭력이 차츰 희미해져가는 오늘날, 간접적·구조적·문화적 폭력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로 이미지를 형성하면서 말이다.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우수한 근대 문명을 발달시켰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본인들이 하필 백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그들은 유색인종을 열등한 존재로 만들었고, 타자로 만들어버렸다. 하늘이 부여한 인권이 모두 평등하다고 주장하는 천부인권은 백인들 내에서만 해당되었다.
그들은 영화, 드라마, 광고 등의 미디어 매체를 통해 은연중으로 흑인들과 동양인들을 차별함으로써 백인들 자신들의 우월성을 드러내었다. 이것 또한 옳은 일일까?
이처럼 오늘 내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역사 속 사회가 형성해 온 이미지로 인해 차별과 편견을 받아 온 이들. 다른 하나는 권력의 팽팽한 줄다리기 속 이유 없이 희생되어 온 사람들. 결국 전자와 후자 둘 모두, 우리 사회가 혐오의 대상으로 간주하여 억압해 온 대상들이다. 나는 오늘 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그동안 나는 학교 여러 활동 속에서 역사 속 소수자(소수민족, 여성, 학살 피해자들 등.)에 대한 많은 관심을 가지면서 그들을 기억해주고, 생각해주고, 존중해져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하지만 과연 어떻게 하는 것이 소수자에 대한 관심과 기억을 불러일으키는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이 없었다. 막연하게 그들을 기억해야 한다고만 말하였지, 어떻게 하면 심연 깊이 침전한 그들의 기억을 현대인들의 기억의 수면 위로 끌어올릴 수 있을까, 에 대한 의문이 들었었던 것 같다. 나는 우연히도 읽은 이 책에서 그에 대한 해답을 얻었다. 데릭 젠슨이 텔레비전 비판가 조지 거브너(George Gerbner)와 나눈 대화(‘땅 되돌려주기’ 챕터 참고.)를 참고하여 힌트를 얻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조지는 데릭에게 텔레비전이야말로 권력 구조의 한 행위자로, 권력자들이 자신들의 판타지를 텔레비전으로 나타나게 함으로써 그 판타지가 우리들 각각의 의식에 스며들게 하게끔 한다고 말하였다. 텔레비전에 직접적으로 폭력이 얼마나 묘사되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스토리가 주된 행위자라고 말한다. 만약 텔레비전에서 자신과 비슷하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이 갈등 상황에서 우세하게 그려지는 이야기를 보고 들으면 그 사람은 더 공격적이게 된다고 말한다. 또한 텔레비전에서 한 문화 내 집단 혹은 성별이 더 피해를 입기 쉽게 묘사된다면, 그 집단에 속하는 사람들은 더 불안해하고 더 의존적이 되고, 갈등상황에 처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면서 말이다.
정말로 텔레비전은 그런 식으로 우리를 강자 혹은 약자라는 이미지를 아무 생각 없이 만들어 사회에 전파시킨다. 물론 권력자들의 의도가 다분하겠지만 말이다. 똑같이 만약에 그들을 혐오의 대상으로 간주하도록 이미지를 형상화한다면, 혐오의 문화는 단 한 번의 네모난 검정 박스를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형성되는 것이다. 내 생각에 오늘날의 소수자
(내가 이 글에서 말하는 소수자는 단순히 수적 열세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 문화적으로 소외받아가며 열세에 있는 사람들을 칭한다.)는 이런 식으로 더욱 더 견고해지는 것 같다. 여성과 성소수자, 소수민족 등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 부조리한 차별을 받고 있는 대상들의 경우 미디어에서 생산하는 매체물이 소수자로 낙인찍혀 많은 착취와 차별을 받아왔다. 최근 ‘복학왕’ 웹툰으로 많은 인기를 끌었던 웹툰 작가 기안84가 빚은 여혐논란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유명 작가의 웹툰의 경우 많은 사람들이 소비를 하며 수용하게 되는데, 이때 아무런 비판적 사고 없이 미디어를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게 진실인 양 믿어버릴 수 있다. 그렇게 혐오의 문화가 고착화되면서 혐오 대상의 이미지로 굳어버리는 것이다.
이 챕터를 읽으면서 생각난 키워드는 바로 ‘오리엔탈리즘’이었다. 오리엔탈리즘이라는 용어는 서구 열강들이 자신들의 침략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동양의 이미지이다. 원래 오리엔탈리즘은 단순히 유럽에서 동방의 예술문화를 지칭하기 위한 용어에 불과했지만, 서구 열강이 제국주의 팽창 정책으로 동양과 제3세계 국가로 뻗어나가면서 자신들을 우월한 존재로, 동양 등은 열등한 존재로 규정한 것이다. 동양은 열등하고, 향락적이고, 미개하며, 야마적인 문화를 지닌 것으로 말이다. 학계, 문화예술계, 정치·언론을 통해 은연 중 동양에 대한 차별이 있어 왔다. 특히나 오늘날은 미디어의 발달로 이러한 오리엔탈리즘이 더욱 더 가속화되고 있는데, 책에서 이야기한 텔레비전의 역할과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내가 얼마 전 본 애니메이션 ‘개들의 섬’의 경우, 독일 감독이 스톱모션으로 만든 2040년 일본을 배경으로 한 영화였다. 대충 줄거리를 소개하자면, 일본의 한 시장이 차기 대선을 위해 일부러 개 전염병을 퍼뜨려 개들을 쓰레기 섬으로 전부 보내버리며 국민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위선적인 면모를 보인다. 이에 문제제기를 한 학생이 있었는데, 하필이면 일본에 유학 온 미국 유학생이 비판의 목소리를 제기하여 일본 학생들을 계몽시키는 설정이었다. 굳이 서양인이 아니었어도 될 역할에 서양인을 배치하여 부패권력의 타도를 할 정의로운 인물군으로 설정한 것이다. 일본인, 동양인들은 그러한 서양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동조되는 인물들로 말이다. 어찌 보면 감독은 그저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계몽가로서의 역할을 서양인으로 설정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감독이 가지고 있는 오리엔탈리즘에 대한 비판은 피해갈 수 없을 듯 해 보인다.
이처럼 미디어는 동양에 대한 차별적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를 수용하는 소비자들은 그게 단순히 진실인 양 믿어버릴 수 있다. 이러한 오리엔탈리즘뿐만 아니라 앞서 언급한, 소수민족, 제3세계인들, 흑인들, 여성과 같이 여태껏 소외되고 억압받아온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그들에 대한 이미지를 형성한 이들이 그들에 대해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에 대한 깊은 이해를 하기 귀찮아서, 혹은 본인들과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열등한 타자로 규정하여 본인들 입맛대로 해석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을 객관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 어느 문화도 결코 타문화보다 우월하거나 열등하지 않다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서. 그런데 솔직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를 포함한 이 세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가? 정말 주관적 판단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가능한가? 불가능하다. 왜냐고 묻는다면, 우린 인간이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있겠다. 나와 다른 사람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어느 한 사람을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 각각 역사가 있고, 각자 좋아하는 것이 있고, 각자의 취미, 선호가 있음을 완전히 아는 상태를 계속해서 유지해야 한다. 하지만 오늘날 내가 접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정보를 다 머릿속에 넣었다가는 과부하 상태에 걸려 버릴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된다. 객관성을 유지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예의와 정직의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우리가 오늘날 형성한 혐오의 문화는 권력자들에 의해, 혹은 우리들 스스로에 의해 심어진 사고와 태도, 시각이다. 즉, 인간이 만들어내고 인간에 의해 주입된 산물이라는 얘긴데,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희망을 얻을 수 있다.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이야기를 통해 보고 자랐다면, 우린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냄으로써 우리 스스로를 가르칠 수 있다. 그동안의 우리 주위를 맴돌았던 담론과 매체가 소수자, 소외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열등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느끼게 만들었고, 우월한 집단으로 보이는 것들에 비교되어 자신들의 빛을 꽁꽁 감추어두었던 것을 기억하라. 담론과 같은 이야기가 우리로 하여금 열등한 타자로 느끼게끔 만들었다면, 그 반대의 이야기도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이야기가 우리를 다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즉, 인간이 만든 이야기에 의해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도록 되었다면, 인간이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듦으로써 모두가 주체가 되는 이야기 또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더 이상의 소수자들에 대한 편견, 주체가 가지는 우월성 등은 우리들의 담론으로부터 희미해져 갈 것이고, 빛을 바랠 것이다. 그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이고,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역사 속 타자에 관한 인식을 재고시킴으로써 달성될 수 있다. 이렇게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때 중요한 것은 앞서 말했듯이 우리 모두 정직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가끔은 자기중심적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황을 직시하고 있는 그대로 보려는 노력은 멈춰서는 안 된다.
온갖 사회 운동을 통해, 그들에 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한 목소리를 사회에 내면서.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내가 학살 피해자들을 위해(아니면 역사 속 소수자들을 위해)할 수 있는 역할은 무엇일지에 대해서도 깊게 고민을 했던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스스로 늘 고민했다. 내가 과연 어떻게 해서 역사라는 학문을 가지고 세상에 가치 있는 일을 할 수 있을지에 대해. 책에서 언급된 유럽 여러 지역에서 일어난 학살, 정복 전쟁, 불태워진 마을, 못 먹게 된 농작물 등이 이제는 거의 완전히 기억에서 지워졌다는 작가의 말에 나는 주목했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 위치한 욘토켓의 경우, 그곳에서 백인들에 의해 일어난 원주민 학살에 대해 아무도 관심이 없다는 것에 주목했다. 책에선 데릭과 그의 또 다른 환경운동가 친구인 존(이런 친구들이 많이 있다는 것 또한 참 행운이지 않나 싶다.)이 함께 욘토켓을 걸으면서 그곳에서 일어난 학살에 대해 이야기하는 장면이 나온다. 500페이지의 분량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구절을 그들의 대화 속에서 찾았다.
“그들에게 가장 최악은 백인 무리들이 그들의 슬픔을 제멋대로 가져가 버리는 거야. 우리는 그들의 땅, 그들의 전통을 빼앗았는데, 이제는 그들의 슬픔까지 빼앗으면 안 되지…….”
“독일 레지스탕스 구성원들이 추모에 참여하고 싶어한다면? 그들이 자기네 민족이 저지른 잔학 행위를 인정하는 것이 나쁠까? 그게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지? 물론 우리는 희생된 부족들의 주도하에 따라가야만 해.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없는 것 중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우리가 해야만 하는 것도 있어. 우리 문화가 그런 짓을 저질렀으니까 우리가 그 책임을 지기 시작해야 해.”
그렇다. 사실 역사적으로 많은 학살 피해자들이 존재해왔지만,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기가 쉽지는 않다. 사회적으로도 관심도가 떨어질뿐더러, 학살을 저지른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본인들이 저지른 잔혹 행위를 떠올리고 싶지 않아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우리가 저지르지 않은 일일지라도, 또 우리와 전혀 관련 없는 먼 지역의 일일지라도, 그들에 대한 관심과 기억을 놓지 말아야 한다. 나 역시도 비슷한 일을 학교에서 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에 관한 일이었다. 1학년 때부터 같은 반 친구와 함께 한국군에 의해 행해진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에 관한 고등학생들의 인식을 연구하기 위해 연구를 도맡아 줄 선생님과 계획을 하였다. 2학년 때는 1층 로비에 판넬을 설치하여 베트남전 피해자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느냐를 스티커를 붙이는 형식으로 진행하여 조사하였고, 뒤이어 설문지를 제작하여 각 반에 배부하기도 하면서 우리가 분석한 연구결과를 과제연구 결과보고서에 활용하였던 적이 있는 것이다. 나와 그 친구(홍준이^^)가 이 프로젝트를 2년 간 함께 하면서 얻었던 결과는 우리의 논문에 있지 않았음을 안 것이다. 하면서 정말 보람을 느꼈던 바는 우리가 써내려간 50페이지의 논문이 아니라, 청원고 학생들과 교직원분들에게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1학년 때 과제연구 계획서 발표 대회를 통해 친구들, 선배들, 선생님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2학년 때는 특히 1층 로비를 활용함으로써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흥미를 가지고 지켜볼 수 있게끔 하였다. 또 설문지와 최종 발표 대회에서도 우리는 꾸준히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에 대해 상기시켜주었다. 결국 우리가 청원고라는 비록 작은 집단에 기여한 일은, ‘우리 논문과 활동을 봐주세요,’ 라며 외쳤던 것이 아닌,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들을 조금이라도 기억해주세요,’에 있었던 것이다. 나는 내가 받은 상과는 상관없이, 우리가 처음으로 사회에 역사적 소수자들에 대한 관심을 끼칠 수 있다는 것에 큰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이처럼 데릭과 그의 친구 존의 대화에서도 알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소수자로 규정하여 학살하고 탄압한 이들에 대한 꾸준한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었고, 이것이 나는 내가 앞으로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막중한 책임과 의무라는 것을 인식하였다. 물론 아직 명확한 답은 없다. 하지만 사회운동가인 저자처럼, 사람들의 사고와 인식에 좋은 영향을 줄 수 있는 다양한 활동들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다. 그것은 사소한 일일 수 있다. 그저 학살 장소에 기념비 혹은 팻말을 세운다든지, 아니면 플랫폼을 활용한 콘텐츠를 제작하여 사람들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킨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아니면 아래 사진과 같이 할 수도 있겠다.
위의 사진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에 있는 다뉴브 강 강가를 촬영한 사진이다. 강둑위에 있는 것은 신발과 꽃, 캔들인데,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가 유대인들을 다뉴브 강으로 몰고 가 그들에게 신발을 벗고 집단 자결을 강요한 사건을 기억하기 위해 신발을 전시해둔 것이다. 매일같이 다뉴브 강을 걷는 사람들은 이 신발을 바라보며 그들이 겪었던 고통과 슬픔, 아픔에 대해 추모하며 기억한다.
이처럼 사소한 움직임에서부터 시작하여, 우리는 차별과 억압의 대상들을 기억해주고, 다시는 그러한 일이 벌어지지 않을 수 있도록 사람들의 인식을 바꿀 수 있다. 물론 우리가 형성해 온 혐오의 문화는 생각보다 견고할 테지만, 그래도 우리는 꾸준히 시도해야 한다. 소수민족, 여성, 성소수자, 유색인종 등 여전히 많은 매체와 미디어는 그들에 대한 타자화를 행하고 있으며, 우리는 결여된 미디어 리터러시 능력과 함께 그것이 사실인 양 믿기 시작한다. 그렇게 우리가 형성한 이미지는 우리의 사고와 태도를 지배하고 사람들에게 상처를 남겨왔다. 아무 이유 없이 사람들에게 편견을 받고, 차별적인 시선을 받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는 경험해봐야 알 듯하다. 물론 나도 고등학교 생활하는 동안 이러한 것들 때문에 힘들었지만, 세상에는 생존의 오가는 고통을 겪은 수많은 사람들이 더 많이 있었을 것이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 어떤 물리적 폭력보다 무섭게, 우리의 생활 속 깊이 침전하여 사고와 태도를 지배하는 문화적 폭력을 물리치는 것이다.
복잡다원한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결국 타인에 대한 애(愛)타심을 바탕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소통이 단절되고 점점 더 개인화되는 요즘일수록 우리는 타인에 대한 사랑을 지녀야 한다. 그래도 사람인데, 세상 사람들만큼은 사랑하고 살아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의 인생을 깊게 짓누르는 혐오, 억압, 차별 등은 더 이상 우리에게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나 역시 역사 속에서 억압받고, 혐오의 시선을 받으며 타자로 전락한 소수자, 소외자들에 대한 사랑과 관심을 바탕으로, 그들이 더 이상 아프지 않도록, 더 이상의 고통이 없도록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며 살아갈 것이다. 물론 이미 이 세상을 멀리 떠난 이들에게는 소리 없는 외침이겠지만 그래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차별받고 억압받아온 당신들을 잊지 않았다는 것을, 잊지 않겠다는 것을 다짐한다면, 그들에게도 많은 위로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나의 일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책임과 의무이기도 하다. 더 이상의 타자화, 차별이 없을 때까지, 끝까지 그들을 기억하며.
마지막으로, 영겁의 역사의 시간 속에서 힘들게 살아온 이들을 위로하며 아이유(IU)의 Love Poem 가사를 적으며 글을 마치겠다.
“
Here i am 지켜봐 나를, 난 절대
Singing till the end 멈추지 않아 이 노래
너의 긴 밤이 끝나는 그날
고개를 들어 바라본 그곳에 있을게
”
-아이유(IU) Love Poem(2019) 中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