품목정보
출간일 | 2020년 06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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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76쪽 | 202g | 120*200*20mm |
ISBN13 | 9791196517199 |
ISBN10 | 1196517193 |
출간일 | 2020년 06월 30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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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수, 무게, 크기 | 176쪽 | 202g | 120*200*20mm |
ISBN13 | 9791196517199 |
ISBN10 | 1196517193 |
“산책에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된다.” 시가 산책이 될 때, 산책이 시가 될 때… 시를 읽는다는 건 무엇일까? 그럼, 산책을 한다는 건? 그건 어쩌면 고요한 하강과, 존재의 밑바닥에 고이는 그늘을 외면하지 않는 묵묵함의 다른 말일지도 모른다. 그건 결국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한 질문일 수도 있고, 여기에 내가 살고 있다고 말하는 초록색 신호일 수도 있다.‘말들의 흐름’ 시리즈의 네 번째 책『시와 산책』은 작가 한정원이 시를 읽고, 산책을 하고, 과연 산다는 건 무엇일까에 대해 고민해온 시간들을 담아낸 맑고 단정한 산문집이다. 그리고 놀랍게도 작가의 첫 책이다. 놀라운 이유는 이 책이 너무나 좋아서. 작가가 쓴 스물일곱 개의 짧은 산문에는 그녀가 거쳐온 삶의 표정들이, ‘시’와 ‘산책’을 통해 느꼈던 생활의 빗금들이 캄캄한 침묵 속에서도 의연히 걸어가는 말줄임표처럼 놓여 있다. 한없이 느리게도 보이고, 더없이 끈질기게도 보이고, 지극히 무연하게도 보이는 문장들로 그녀는 ‘시’와 ‘산책’으로 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산문을 완성한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우리는 그녀가 평생 시를 쓰고, 읽고, 보듬고, 도닥이면서도 결국 혼자 꽁꽁 얼려두고 숨겨만 두었던 마음속의 아주 깊은 곳으로 첨벙 뛰어들어, 그녀의 조용한 방관 아래에서 페소아와, 월러스 스티븐즈와, 로베르트 발저와, 파울 첼란과, 세사르 바예호와, 가브리엘라 미스트랄과, 울라브 하우게와, 에밀리 디킨슨과, 안나 마흐마토바와,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포루그 파로흐자드와, 실비아 플라스와, 가네코 미스즈를 만나고야 만다. 그녀와 함께, 그녀가 사랑했던 시인들과 함께, 그녀가 종종 입 밖으로 소리 내던 시어들과 함께, 천천히 너르게 산책을 떠난다. 우리는 그녀를 따라 겨울의 마음이 되었다가, 봄의 소리가 되었다가, 여름의 발자국이 되었다가, 가을의 고양이가 되고, 서로가 서로의 시가 되고, 서로가 서로의 산책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서로를 쓰다듬으며 서로에게 묻기도 한다. “당신은 당신이 낯설지 않나요? 당신이 잘 보이나요?” _본문 중에서 우리는 자신으로 살기 위해 누구처럼 살지 말자고 서로에게 다짐도 한다. 그녀의 문장으로 웅장해진 가슴이 신기하고 자랑스러워 제법 힘껏 펴기도 하고, 왠지 모르게 부끄러워져 감추기도 하면서도, 결국은 그녀의 문장들로 점점 거대하고 성대해지는 우리의 세계를 목격하는 기쁨을 누린다. 아주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처럼『시와 산책』의 문장들은 몇 번을 곱씹으며 기다리고 기다린 끝에야 우리에게 와 곁을 내어준다. 어느 날은 우리를 젊어지게도 하고, 어느 날은 우리를 늙어가게도 하면서. 그러니, 바로 지금이, 우리가 ‘시’와 ‘산책’을 할 바로 그 순간이다. |
온 우주보다 더 큰 추운 계절의 시작을 믿어보자 산책이 시가 될 때 행복을 믿으세요? 11월의 푸가 슬퍼하고 기침하는 존재 과일이 둥근 것은 여름을 닮은 사랑 온 마음을 다해 오느라고 영원 속의 하루 바다에서 바다까지 아무것도 몰라요 잘 걷고 잘 넘어져요 국경을 넘는 일 모두 예쁜데 나만 캥거루 하룻밤 사이에도 겨울은 올 수 있다 꿈과 같은 재료로 만들어졌네 저녁이 왔을 뿐 하나의 창문이면 충분하다 회색의 힘 진실은 차츰 눈부셔야 해 고양이는 꽃 속에 언덕 서너 개 구름 한 점 오늘은 나에게 내일은 너에게 그녀는 아름답게 걸어요(부치지 않은 편지) |
계절은 겨울에서 봄으로 이동했다. 누군가 다시 운동을 시작하고 누군가 조금 더 길고 먼 산책을 시작할 것이다. 정점이 아직 오지 않았다는 코로나 시국에 가끔씩 펼쳐보던 한정원의 『시와 산책』은 마음의 산책으로 충분한 책이었다. 분명 봄인데 겨울의 시간을 보내는 요즘, 위로로 다가오는 문장이 많았다. 말 그대로 제목에 충실한, 저자가 산책하며 마주하고 생각한 시들이 있는 책이다. 내게는 모두 낯선 시였고 이름만 겨우 아는 시인이 있었다. 아무렴 그건 상관없었다. 그저 나는 한정원의 글을 따라 읽고 분위기에 취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득하고도 아득한 어느 시절의 거리를 헤매는 듯했고 반가운 골목과 공원을 만나는 듯했다. 그러니 이 책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하기는 조금 어려울 듯하다. 그냥 나는 이런 문장이 좋아서 그곳에 오래 머물렀을 뿐이다.
방금 지나온 계절이 겨울이라서 그럴까. 나는 한 번도 겨울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지 않았던 것 같다. 어느 계절이든 그 계절을 살기보다는 다음 계절이나 다른 계절을 꿈꾸며 살아온 것이다. 이 겨울이 어떻게 지나갔고 어떻게 지냈는지는 그 계절에는 알지 못하고 지나온 후에야 조금 그 계절의 상처와 아픔을 돌아보았다. 그건 저자의 말처럼 고통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삶에 대해서도 그렇다. 말로는 치열하게 살고 있다고 나는 지금 너무도 아프다고 몸부림을 쳤지만 그 안에서 고요하게 그것과 대면하지는 못한 것이다.
겨울을 겨울의 마음으로 바라보는 것이 당연한 듯해도, 돌이켜보면 그런 시선을 갖지 못한 적이 더 많다. 봄의 마음으로 겨울을 보면, 겨울은 춥고 비참하고 공허하며 어서 사라져야 할 계절이다. 그러나 조급해한들, 겨울은 겨울의 시간을 다 채우고서야 한동안 떠날 것이다. 고통이 그런 것처럼.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고통 위에도 계절이 지나간다. 계절마다 다른 모자를 쓰고 언제나 존재한다. 우리는 어쩌면 바뀌는 모자를 알아채주는 정도의 일만 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19~20쪽)
걷는 일은 그런 마음을 알아보는 일인지도 모른다. 걷는 일은 자동차나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볼 수 없었던 것을 볼 수 있다. 때로는 원하는 방향으로 때로는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향할 수 있다. 아무 곳에서나 멈출 수 있기에 주변을 둘러볼 수 있다. 저자가 고양이를 만나고 밥을 주기 위해 멈추는 것처럼. 매일 보는 풍경도 천천히 걸으면 다르게 보인다. 같은 자리에 있는 사물이 여러 각도에 따라 달리 보이듯 속도는 그만큼 중요하다. 그렇다고 천천히 걷거나 삶의 여유를 가지라는 그런 내용이 있는 건 아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보통의 순간들, 동네를 걷고 물가를 걷고 호수 가장자리를 걷는다. 우리가 그러한 것처럼. 다만 그가 고른 단어가 아름답고 신비롭다. 시인이라서 그런 걸까. 4월의 한가운데서 호수를 걷다가 호수를 향해 앉아 있는 노인의 등을 보면서 늙음에 대해 생각한다. 벚꽃이 찬연한 봄 속 노인의 모습은 어떤지 외롭게 다가온다.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색이라면, 무엇이든 마음에 들이고 보내며 일생을 살아야 하는 사람에게도 색이 있을 테니까. 어느 물감도 따라잡지 못할 만큼 찬연한 색이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어쩌면 그는 이제 색이 바랬다고, 혹은 아예 색을 잃었다고 느끼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게 늙음일 것이다. (67쪽)
늙음을 색으로 비유한 부분을 읽노라면 나는 지금 선명했던 어떤 색에서 점차 흐려지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니, 내게 색이 존재하기는 했을까 싶다가, 아니 여전히 나는 나란 색으로 여기 있다고 아무나 붙잡고 주장하고 싶다. 모든 게 꽃을 피우기 시작하는 봄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봄을 맞이한 게 감사하면서도 유독 이 봄은 슬프기만 하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한 봄이라는 게 아프다. 어디 하나 반가운 소식이 없으니 이 봄이 고통스러운 이는 나뿐이 아닐 것이다. 무작정 걷던 날이 내게도 있었다는 게 다행일까.
어쩌다 보니 시는 빠지고 산책으로만 다가온 책이다. 저자가 걷는 길을 나도 걷는다. 행간을 따라 무심하고 무감하게 걷는다. 골목에 트럭을 두고 과일을 파는 아저씨를 만나고 집 앞에서 담배를 피우는 아저씨에게 과일을 건네는 길을 걷는다. 발목을 접질러 깁스를 하고 걷지 못하던 순간에는 나도 따라 멈추고 산책을 하며 열매, 나무껍질, 돌멩이를 주우면 나도 같이 춥는다. 책을 읽는 일 역시 산책과 닮았다. 한장한장 읽어가면 나도 어디론가 조금씩 걷고 나가아고 있으니까. 내가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생각들을 만난다. 맑음이 아닌 흐린 날에 다정함을 건네는 이토록 아름다운 생각 앞에 도착한다.
나는 흐린 날을 다정히 맞는 편이다. 침침한 빛, 자욱한 사물들, 묵직하게 흩어지는 향. 흐린 날에는 모든 존재가 자신을 잠잠히 드러낸다. 내 안의 언어와 비언어조차 소란스럽지 않다. 그 세계가 몹시 안온하고 충만해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을 정도이다. 눈이 부시도록 반짝이는 햇빛은 온기를 주는 동시에 대상을 퇴색시킨다. 지나친 빛 속에서는 노출과다 사진 속 피사체가 그러하듯, 내가 배경 속에 희석되거나 본디와 다른 모습이 되고 만다. 그러나 진심이나 맹세는 흐린 날에는 건네져야 할 것 같다. 햇빛은 사랑스럽지만 구름과 비는 믿음직스럽다. (136쪽)
아이들이 맛있는 음식을 두고
싫어하는 것을 먼저 먹는다.
왜 그런지 물어보니
제일 맛있는 것을 마지막에 먹을 거란다.
가장 맛있는 음식을 끝에 먹어야
행복하단다.
나중의 즐거움을 위해
소중한 것을 아껴두듯.
천천히 읽고 싶은 글이 있다.
조금씩 힘들 때 꺼내 보고 싶은 글.
눈처럼 맑은 글들은
흰 눈을 사랑하는 작가의 마음과 똑 닮았다.
작가의 첫 책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문장들의 무게감이 예사롭지 않다.
삶의 흔적이 담긴 시와 같은 산문들.
문장마다 꾹꾹 눌러 담은 작가의 마음이 느껴진다.
시를 읽고 산책을 한다는 것은
일상에서 나만의 공간과 시간을 만드는 것.
작가를 통해 페소아와 세사르 바예흐, 에밀리 디킨슨 등을
만날 수 있다는 것도 큰 기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