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자. 규칙을 지키는 이성적인 사람들이 있는 곳에 머무르자.’
내가 내린 결론은 그거였다. 물론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해서 다 착한 사람들만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제일 마주치기 싫은 ‘양아치’, ‘건달’, ‘일진’들과 부대끼고 지낼 일은 없을 것이다. 그들의 능력으로는 쫓아올 수 없는 곳이니까. 그래서 난 이 악물고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 p.22
검시는 사람이 어떻게 죽었는지 파헤치는 과정이다. 하지만 수많은 영안실을 드나들며 내가 깨달은 건, 정작 어떻게 죽었는지보다는 어떻게 살았는지가 훨씬 중요하다는 것이다.
--- p.74~75
“엄마, 오늘 나 숙제 안 해갔더라고.”
“그랬어? 어제 한결이가 잘 챙겼어야지.”
“엄마가 챙겼어야지.”
“왜 엄마가 챙겨야 해? 한결이 숙제잖아.”
“엄마는 검사하는 사람이라며. 내 숙제 검사했어야지.”
그렇다. 아이들이 알고 있는 단어 수준에서의 검사는 숙제 ‘검사’ 정도에 그친다.
--- p.79
윤호는 엄지손가락에 인주를 묻혀 날인과 간인을 하면서 쑥스럽게 웃었다. 이런 거 처음 해본다고. 신기
하다고. 난 속으로 대답했다. ‘나도 처음 해봐. 완전 신기해.’
--- p.96
한번은 근무하고 있는데 친정 오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 누가 나한테 전화해서 ○○지검 직원이라는데, 이거 보이스피싱인가 싶어서.
드디어 올 게 왔구나. 난 주먹을 불끈 쥐었다. 감히 검사 가족을 노려? 내가 네놈들을 영혼까지 탈탈 털어주마.
--- p.120~121
더구나 성폭력 사건은 피의자에게 엄청난 사회적 낙인을 찍는다. 단순히 형사처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범죄자로 신상정보가 관리·공개되고 전자발찌를 착용하게 되는 등 피의자가 감내해야 하는 불이익이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성폭력 무고는 다른 무고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 엄중함을 알기에 더욱더 고심하고 또 고심하며 샅샅이 보아야 하는 사건이 성폭력 사건이다.
--- p.178~179
외롭기 그지없는 타향 생활에서 우리가 의지할 곳은 결국 다른 동료들의 품이었다. 그 시절 나는 밤 8~9시가 되면 강냉이와 함께 그 주에 새로 득템한 신상 과자를 들고 옆방 선배의 집무실에 놀러 갔고, 우리는 서로를 향해 업무의 피로감과 애환, 가족에 대한 한없는 그리움을 하염없이 털어놓곤 했다. 선배와 나는 각자 ‘시발비용’으로 질러버린 신상 립스틱과 화장품들을 구경하거나 핫딜, 깜짝 쿠폰, 신상, 핫 아이템을 추천해주며 수다를 떨었다. 선배 아이들이 다니는 어린이집에서 보내준 그날그날의 활동사진들을 함께 보면서 고달픈 서로의 두뇌와 육신을 충전하기도 했다.
--- p.183
많은 여성들이 엄마의 이름으로, 아내의 이름으로, 여자친구의 이름으로 피의자 또는 피고인을 위해 반성문을 쓴다. 자신들의 불찰로 범죄가 발생했다면서 스스로를 탓한다. 남편에 대한 애틋한 사랑 때문일 수도 있고, 끔찍한 모성애 때문일 수도 있다. 내 가족이 감옥에 가게 되면 나 또는 내 자식들이 사회에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을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다. 어쩌면 그들이 감옥에 갈지 말지는 그녀들의 생존이 걸려 있는 문제일 수도 있다.
그들의 선처를 호소하는 마음까지, 동기까지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그녀들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닌 일로 자책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 p.201~202
아이를 살해한 죄가 결코 가볍지는 않다. 하지만 피임에 실패한 어린 여성 앞에 놓인 가혹한 현실을 생각해보면, 정말이지 집도 절도 없는 20대 초반의 그녀가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을 오로지 그녀의 잘못만으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미친 삼신할미 같으니라고! 달라는 곳에는 안 주고 왜 이런 곳에 애를 주고 ××이야, 이게 다 당신 때문이야, 이 할망구야!”
--- p.216~217
“중고나라 사기꾼한테 낚였었다고? 검산데?”
내가 이 얘기를 하면 지금도 다른 엄마들은 배꼽을 잡고 웃는다. 고스톱 쳐서 검사를 따낸 게 틀림없다면서. 어허, 얕보지 마라. 중고나라 사기꾼들의 정교한 물품 선별 능력과 문학에 가까운 게시글 작성 능력, 정말로 선물받은 물건을 팔려고 내놓은 아기 엄마인 듯 상대방과 대화하는 연기력은 가히 대종상 감이니까.
--- p.227
─ 야 이 미친×아, 너같이 어린것이 무슨 검사냐. 니가 검사면 나는 대통령이다. 어디 할 짓이 없어서!
─ 내가 또 속을 줄 알아! 어디서 어린×이 어른을 등쳐먹으려 들어!
억울한 마음을 가다듬고 친절하게 검찰청 대표번호를 안내한다. 이리로 전화를 걸어 김은수 검사를 연결해달라고 하라고, 그럼 제가 검사인 거 믿으실 수 있지 않느냐고 설명을 하고 나면 2~3분 뒤에 확인 전화가 온다. 그럴 때면 여지없이 “여자 검사가 흔하지 않잖아요. 게다가 목소리가 이렇게 어린데 제가 어떻게 믿겠어요”라는 변명 섞인 사과가 돌아온다.
--- p.231
나도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아이와 관련된 사건들의 의미를 깨닫는다. 엄마의 눈앞에서, 또는 엄마의 눈을 피해 도움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다 ‘같은’ 피해자가 아니라는 것을.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는 작은 천사들이 문턱을 넘지 못하게 하는 것은 모든 어른들의 책임임을.
--- p.343
아마 내가 배운 엄마는 그런 존재인 것 같다. 꼭 너 같은 딸 낳아서 키우라고 바락바락 소리치다가도, 내가 위기에 처하면 짜잔 나타나 구해주는 원더우먼. 검사도 비슷하지 않을까. 범죄에 희생당한 누군가가 아파하며 울고 있을 때, 도움이 필요할 때, 우리는 그곳으로 달려간다. 때로는 조금 늦기도 하고 때로는 기대에 못 미치기도 하지만, 그래도 달려가는 걸 멈추지 않는다. 그런 존재들이 있기에,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이 무서운 세상을 우린 용기 내어 살아갈 수 있는 거겠지. 난 아직 1인분의 엄마도, 1인분의 검사도 되지 못했지만, 언젠가 꼭 그렇게 되고 싶다. 오늘의 이 글은, 더 사랑하고 더 열심히 살겠다는 나의 다짐이고 약속이다.
--- p.383~3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