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우가 서둘러 집에 들어갔을 때, 불 꺼진 거실엔 찬바람이 감돌고 있었다. 집 안엔 묘하게 낯선 공기가 가득했다.
“여…보?”
온몸에 한기가 돌면서 왠지 모를 소름이 끼쳤다. 그는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작은방에서는 딸 수아가 제일 좋아하는 만화인 〈시크릿 쥬쥬〉 배경 음악이 흘러나왔다.
♬ 우리 함께 노래하면 꿈의 나라로 갈 수 있어. 세상이 이렇게 빛나는 건 함께 있기 때문이야. 나쁜 마녀도 우리 함께라면 두렵지 않아. ♬
그때였다.
-탕.
누군가 뒤에서 그의 머리를 둔기로 내리쳤다. 완벽한 홈런이었다. 둔기는 복도 장식장에 있던 야구 방망이였다. 정우는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지만, 괴한은 방심하지 않고 쓰러진 정우의 머리를 또 한 번 가격했다. 그 두 번째 가격으로 그는 완전히 정신을 잃었다.
--- 「1장. 아내의 죽음」
정우는 아내가 죽은 후, 교수직을 내려놓고 동네에 작은 병원을 개업했다. 겉으로는 평범한 정신의학과 의원이었지만 그는 트라우마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기억 삭제술’을 시행하고 있었다.
그가 맨 처음으로 기억을 지운 것은 딸 수아였다. 사고 이후 수아는 계속 잠만 자려고 했고, 깨어 있는 동안에는 극심한 불안 증세를 보였다. 범인은 당시 9살 아이의 입에 무자비하게 청테이프를 둘러 감았다.
수아는 범인과 대면한 유일한 목격자였지만 증언을 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아이는 누군가 사건 당시를 떠오르게 하는 말이나 행동을 하면 무조건 귀를 막은 채 몇 시간이고 소리를 질렀다.
‘범인을 목격했다고는 하지만 아직 9살 아이에겐 너무 큰 충격이라 아직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것은 힘들어요. 범인을 잡는 게 아무리 급해도 아이가 천천히 마음을 추스를 수 있도록 도와야 해요. 그럼 점차 아이도 안정을 찾을 겁니다.’ 혜수의 말은 틀렸다. 수아는 사고 이후 반년이 지나도록 말을 하지도, 일상생활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그는 딸을 위해 뭐라도 해야만 했고, 결국 수술을 감행했다.
--- 「1장. 아내의 죽음」
30분 정도가 지나자, 수진이 이동식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환자용 엘리베이터를 이용해 데리고 왔다. 진료실에서 대기 중인 환자 몇 명이 보긴 했지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정말 이 사람이 지수를 죽였다고? 정말이지 상상이 안 간다.
그렇게는 안 봤는데…. 너무 끔찍하잖아.”
“기억을 확인해 보면 알겠지.”
“아! 맞다. 기억 이식이 정말 가능하다는 거지? 세상에 말도안 돼.”
“원래는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상담을 통해 특정 기억을 활성화하는 과정이 필요한데, 잠든 상태여서 내가 원하는 기억을 바로 알 수 있을진 모르겠어. 뭐든 해 봐야지.”
“기억 이식을 마치면 내가 다시 2층으로 데려갈게. 그래야 남자가 정신이 들었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치 못 챌 거 아냐.”
기억 이식을 마치자마자 수진은 그를 2층 내과로 데려갔고, 정우는 혼자 남았다.
서두원은 링거를 맞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고 생각할 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그는 일어나서 기지개를쭉 켜더니 개운한 얼굴로 병원을 나갔다.
수진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정우에게 물었다.
“그냥 저대로 가게 둬도 괜찮아?”
“이미 어디에 사는 누군지 다 알고 있어. 상관없어.”
두어 시간이 지났지만 끔찍한 두통과 메슥거림 외에는 딱히 변화가 없었다.
‘왜 아무 기억도 나질 않지? 수면 중에 이식을 해서 그런가.
(…)
“무슨 일 있어요? 혹시 또 기억 이식한 거예요?”
“너도 알고 있었어? 이 자식 뭐야, 정말.”
“조금만 기다려요. 금방 갈게요.”
인욱이 도착할 때쯤 정우는 축 처진 몸을 맨바닥에 누인 채겨우 지탱하고 있었다.
“형!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그가 정우의 어깨를 감싸며 간이침대 위로 올렸다. 정우는 더이상 나올 토사물이 없는지 큰 소리를 내며 헛구역질만 하고 있었다.
“사아리이자아….”
정우가 침으로 범벅된 입가를 닦으면서 힘겹게 말을 뱉었다.
인욱과 수진이 그의 말을 잘 알아듣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뭐라고? 정우야, 못 들었어. 살리자고?”
“살인자.”
“뭐라고? 사, 살인자?”
--- 「2장. 추적」
정우는 속으로 지금 저 목을 조르면 어떨까, 바동거리는 놈에게 왜 그랬냐고 소리라도 지르면 속이 시원해질까 생각했다.
그는 모든 진실을 알게 됐을 때 사적 보복의 유혹을 이겨 낼 수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수진은 모든 준비가 끝마쳐질 때까지 적당한 거리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정우는 그녀가 놈에게서 자신을 지키는 것인지, 자신에게서 놈을 지키는 것인지 모호하다고 생각했다.
‘대체 이놈은 무슨 생각인 거야….’ 두 눈을 감고 곤히 잠든 그를 바라보았다. 평온한 표정이 좋은 꿈을 꾸는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의심을 살 만한 구석이 없는 선량한 모습이 그는 더욱 거북했다. 정우는 놈의 머리에 전극을 붙이고 전자기 헬멧을 씌우면서, 이번엔 놈의 어떤 기억을 보게 될지 온갖 의문과 감정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수술이 끝나자 수진이 놈을 데리고 떠났고 방에는 정우 혼자만 남았다. 인욱에게서 계속 전화가 걸려 왔지만 받지 않았다.
정우는 아직 아무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으니 딱히 할 말도 없었다.
그때 누군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그는 숨을 죽였다.
--- 「3장. 기억 삭제술」
강가에 도착한 그는 굵은 통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진 배 근처로 가방을 끌고 갔다. 실제 사람들이 타는 배라기보다는 관상 용에 가까웠다. 그는 배에 가방을 먼저 올린 후 덤벨을 하나씩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도 조심스럽게 올라탄 후 기다란 노로 강바닥을 밀어냈다. 일렁이는 강물이 진득한 검은색 기름처럼 보였다. 그는 노를 저었지만 배는 가는 건지 마는 건지 모를 정도로 아주 천천히 강 한가운데를 향해 흘러갔다.
강 한가운데는 달빛을 받아 제법 밝았다. 강에 반사된 달빛이 은은하게 빛을 냈다. 소름 끼치게 공포스러우면서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그는 손으로 더듬거리며 지퍼를 찾더니 가방을 열었다. 열린 가방 사이로 가장 먼저 털이 듬성듬성 난 발가락이 보였다. 정확히는 엉덩이 허벅다리서부터 발가락까지였다. 가방 안에는 역시나 토막 난 시체가 들어 있었다. 굵은 종아리에 얼핏 문신이 보였는데 검은색 집이 붉은 화염에 사로잡힌 특이한 그림이 었다. 그는 고개를 숙여 통나무 사이에 두었던 덤벨을 하나씩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가방 안에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는 마지막 덤벨을 가방 귀퉁이로 넣으려다가 안에 있던 목이 잘린 남자와 정면으로 눈이 마주쳤다. 목이 잘린 남자는 공포에 질린 것인지, 죽기 직전에 느낀 분노 때문인지 두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죽은 남자의 눈에 달빛이 비치자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반짝거렸다. 당장이라도 가방에서 튀어나와 그를 강가로 떠밀어 버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피해자는 머리숱이 많고 콧수염이 있었다. 40대 중후반 정도 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살인자 앞에서 지은 마지막 표정이어서 그런진 모르겠지만 인상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다. 그는 덤벨 다섯 개를 가방 안에 고루 넣고는 가방을 닫기 전 잠시 머뭇거 리더니, 손바닥으로 남자의 얼굴을 쓸어내렸다. 시퍼렇게 뜨고 있던 남자의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딴엔 그게 일종의 배려라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지퍼를 닫고 가방을 강 속으로 밀어 넣었다.
그는 가벼운 몸으로 되돌아왔다. 이제 어둠에 완벽히 적응한두 눈은 주변 사물을 더 명확하게 볼 수 있었다. 차 트렁크를 닫으며 얼핏 보이는 차량 번호를 정우는 놓치지 않고 기억해 두었다. ‘01 나 6594’, 차종은 검은색 스포티지였 다. 그는 차를 타고 그곳을 유유히 벗어났다. 마음에 드는 노래가 나올 때까지 라디오 채널을 돌린 것을 보면 유유히 떠났다는 표현이 적당했다.
방금까진 몰랐는데 차를 운전해서 나오다 보니 정우에게도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어? 여기는….’
--- 「4장. 살인자의 기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