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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4
머리말 7 치유 세상 모든 타마르에게 건네고 싶은 말 - 타마르와 나아만의 어린 여종 14 위로하여라 나의 백성을 - 제2 이사야 22 손바닥에 새겨진 이름 - 제2 이사야 31 불안의 시대에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가 - 하바쿡 40 바로 지금, 오늘 여기 - 코헬렛 49 선택 새 생명의 거름이 되어 준 엘리 - 엘리와 사무엘 60 자신을 지키지 못한 힘 - 삼손 68 압살롬의 고장 난 나침반 - 압살롬 77 수많은 선택과 포기 앞에서 - 오니아스 3세 85 참된 힘의 주인을 알아본 이 - 오니아스 3세 94 불편과 고통을 기도로 만드는 법 -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 103 용기 진실을 좇아 미움받을 용기 - 미카야 114 자신의 자리에서 삶에 충실한 이 - 엘리사와 수넴 여인 123 인간의 계획, 하느님의 계획 - 발락과 발라암 132 사탄의 수사학 - 욥 141 하느님으로 충만한 삶 - 엘아자르 150 연대 인간이란 무엇인가? - 카인, 파라오, 아합 160 착한 사마리아 사람들 - 구약 성경의 사마리아인들 168 글릴롯의 제단과 갈등의 해소 - 광야의 이스라엘 열두 지파 177 내 안의 장벽 걷어 내기 - 히즈키야 186 어두운 역사의 골짜기를 비추는 빛 - 느헤미야 194 네 몫도 소중하고 귀하다 - 엘닷과 메닷 203 자연 우리가 놓친 것은 무엇인가? - 에제키엘 214 회귀가 아닌 더 나은 세상으로 - 에제키엘 223 어디서 멈춰야 하는가? - 안식일에 대한 제안 232 |
저김영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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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치유하는 25가지 지혜』는 구약 성경을 독자들이 재미있고 친근하게 느낄 수 있도록 안내합니다. 무심히 읽고 지나쳤던 구절이나 사건 속에 담긴 하느님의 깊은 뜻을 독자들에게 자상하게 꺼내어 풀어 줍니다. 그래서 읽다 보면 구약 성경의 맛을 새롭게 발견하게 됩니다. 수천 년 전에 기록되었던 구약 성경의 말씀이 오늘을 살고 있는 나를 위한 말씀으로 생생하게 깨어남을 느끼게 해 줍니다.
--- p.5 이 글들이 구약 성경 시대의 인물들이 품었던 치유와 선택, 용기와 연대, 자연관을 알리고, 그것이 오늘 우리 시대의 아픔을 보듬어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며, 우리의 선택에 빛을 던져 줄 수 있음을 증언하기를 바랍니다. 부디 이 글들을 통하여 구약 성경 속의 인물들이 되살아나 우리의 할머니, 할아버지, 스승과 선배, 동료가 되어 그들이 간직한 세상을 치유하는 지혜를 전해 줄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 p.8-9 하바쿡서의 흥미로운 점은 예언서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전언 양식’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바쿡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서 전해 주는 예언자라기보다는 오히려 그가 살던 시대의 부정의와 폭력에 대해 하느님께 항의하는 예언자입니다. 부정의를 징벌하지 않고 고통받는 이들의 울부짖음을 외면하는 듯 보이는 하느님께 제발 무언가를 하시라고 그는 호소합니다. 이런 예언자의 불평과 그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이 예언서의 주된 내용입니다. --- p.41-42 바이러스로부터 우리를 지키려는 고투苦鬪가 장기화되면서 그동안 인간이 신뢰해 왔던 온갖 종류의 첨단 기술과 장비들로도 제어할 수 없는 삶의 영역이 엄연히 자리하고 있음이 부정할 수 없는 현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노력으로 제어할 수 없는 삶의 현실이 지속되면서 무력감과 우울감이 삶을 지배하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감정들에 굴복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누려 왔던 소소한 일상들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이라 하더라도 이 현실에 담긴 삶의 의미를 찾고 이 시간들을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지혜를 발견하고 싶습니다. --- p.49 삶은 선택의 연속이며 선택은 포기를 수반합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인생 여정에서 우리가 해 왔던 수많은 선택과 포기의 결과입니다. 무엇을 포기하고,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 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닙니다. 오죽하면 ‘결정 늘보(느림보)’라는 말이 생겨났을까요? 선택을 위한 뚜렷한 기준과 방법이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는 종종 인생의 기로에서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또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지 고민하게 됩니다. --- p.85 언제 어디서 나타날지 알 수 없는 적군처럼 우리를 위협하는 코로나19로 긴장과 피로는 누적되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폭염과 폭우, 태풍까지 밀어닥칩니다. 사는 일이 쉬운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처럼 힘들었던 적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시편 시인은 잠시도 편안히 숨 돌릴 길 없는 자신의 삶의 상태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나는 사자들 가운데, 사람을 잡아 먹는 그들 가운데 누워 있사오니, 그들의 이빨은 창들과 화살들, 그들의 혀는 서슬 진 칼이니이다”(최민순 역 시편 57,5). --- p.105 진실을 직면하기란 고통스러울지 모르지만 드러난 진실은 거짓과 위선, 무질서한 탐욕과 비리의 사슬에서 우리를 풀어 주어 더 자유로운 삶을 살게 합니다. 그래서 미카야의 후계자들은 오늘도 미움받을 용기를 낼 것입니다. 그들을 좇아 진실이 가져다주는 해방을 체험하는 이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아무도 아합과 같은 비참한 최후를 맞지 않았으면 합니다. --- p.122 성경 저자는 그의 이름조차 소개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느 지방 출신이라는 것만 알 뿐입니다. 그러니 그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한 사람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수넴이라는 지방에 살았던 여인이므로, 우리는 그를 ‘수넴 여인’이라 부를 것입니다. 열왕기 하권 4장 8-37절 그리고 8장 1-6절에 소개되는 수넴 여인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알든 말든 자기다움을 성실하고 진지하게 살아 낸 한 여인의 삶을 만나게 됩니다. --- p.124 생각 없이 쏟아 내는 말과 무심코 저지른 행위가 세상에 회자되면서 어떤 열매를 맺고 있는지, 그것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를 전혀 고려할 줄 모르는 이들, 개인의 욕구에 대한 극단적인 숭배를 다른 사람의 인권에 대한 배려나 존중과 맞바꾼 이들. 이런 이들을 마주치는 일이 드문 현상이 아니게 된 오늘, 저는 더 이상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지켜보기만 할 수 없음을 느낍니다. --- p.151-152 인간의 삶에는 다양한 아픔들이 존재합니다. 자신의 한계로 인하여 겪는 고통도 있지만 분명히 다른 이들로 인하여 빚어지는 고통도 있습니다. 사회의 구조적 모순으로 인하여 지속적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겪어야만 하는 고통도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착취와 억압, 압제에 의한 고통의 숱한 사례들을 제시합니다. 부당한 압제의 희생자가 된 이들이 등장하고, 또 그러한 억압을 가하는 자들과 그들의 하수인들이 등장합니다. 이들 모두 치유를 필요로 합니다. --- p.161 우리에게 볼 수 있는 눈이 있다면 순간순간의 삶이 모두 누군가 덕분에 사는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런 인식은 내 삶의 태도를 바꾸게 합니다. 너의 관대함으로 나 의 삶이 가능하다면 이제는 나의 관대함을 나눌 차례입니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몰라주든 세상이 지속 가능하도록 우리의 관대함을 나누는 것입니다. 인색함의 자리에서 꼭 한 발자국만 더 나아가 보는 것입니다. 매일 하루만큼만 더 착한 사마리아인이 되는 것입니다. --- p.175-176 성숙한 사람이란 절대로 왜곡된 해석을 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라 나의 해석이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기에 자신이 내리는 판단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습니다. 객관적인 시각을 갖기 위해서는 사실 확인이 필요하며, 다른 이들의 해석을 들어보아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피느하스 사제와 서편의 열 지파 수장 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피력한 후 이제 동편 지파들의 말을 듣습니다. --- p.182 모두가 좋은 것을 함께 나누는 세상이 하느님께서 꿈꾸시는 세상이라면 저 역시 그런 세상을 꿈꿀 것입니다. 내 편과 네 편을 나누는 편 가름이 쳐 놓은 장벽은 이제 저의 비전에서 말끔히 치워 버리겠습니다. 우리는 본래 하나였고, 하나여야 하며, 하나가 될 것입니다. 이것이 단순히 주의나 주장으로 머물지 않으려면 하나가 되는 비전을 현실에서 구체화하는 작업이 요구됩니다. 저는 그 한 예를 히즈키야 임금이 보여 준 모범에서 발견하고자 합니다. --- p.188 저는 요즘 매일같이 어지럼증을 겪고 있습니다. 어느 쪽에 발을 디뎌야 할지 날마다 헷갈리기 때문입니다. 도대체 어디에다 삶의 무게 중심을 두어야 할까요? 이 편이나 저 편에 서야 할까요? 그래서 저 편을 비난하는 소리에 가세해야 할까요? 저처럼 삶의 중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고민하고 계신 분들께 아래에 소개하는 일화는 하느님의 길이 분열과 소외를 부추기는 세상의 길과 얼마나 다른지를 잘 보여 줍니다. 흔들리는 세상의 길이 아니라 주님의 길 위에 삶의 중심을 둘 수 있다면 우리가 앓는 어지럼증도 사라지리라 생각합니다. --- p.203-204 에제키엘이 멸망의 원인으로 꼽은 우상 숭배는 우리 시대의 언어로 바꾸면 물신 숭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적정 수준을 넘어서는 안락함과 편리함을 가져다주는 물신을 숭배하느라 우리는 자연을 착취하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자연은 파괴된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지금껏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흉포한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 전에 우리가 주님을 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모색해야 할 것은 어쩌면 코로나 이전으로의 회복이 아니라 코로나 이후 어떻게 거듭날 것인가 하는 문제입니다. 물신을 숭배하느라 놓쳐 버린 것이 무엇인지 돌이켜보고 그것을 되살리고 회복시키기 위해 지금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어야 할 때입니다. --- p.221-222 그동안 우리는 행복을 얻기 위해 앞만 보고 달렸지만 과연 그 목표가 우리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진지하게 반성하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성장과 발전에도 한계가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지 못하였고 그 결과가 바로 환경 오염과 자원의 고갈, 휴식을 잃은 자연과 쉼을 잊어버린 사회입니다. 이제 우리는 시공간이 주는 한계를 인정하고, 그 한계와 더불어 사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안식일의 정신을 회복하고, 그것을 실행에 옮길 필요가 있습니다. --- p.2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