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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월의 청포도

칠월의 청포도

: 이육사 이야기

역사인물도서관-04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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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품목정보
발행일 2021년 12월 10일
쪽수, 무게, 크기 304쪽 | 444g | 145*210*17mm
ISBN13 9788963194448
ISBN10 8963194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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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촌을 떠나 대구로 오면서 원록은 다짐했다. 선진 학문을 배우겠노라고. 그래서 백학학원을 다니며 고집스럽게 일본어를 익혀 물리와 화학 그리고 철학을 공부했다. 빅토르 위고를 읽고 마르크스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비슷한 생각을 지닌 친구들도 여럿 사귀면서 자연스럽게 청춘의 고민도 나누었다. 조재만, 강신묵, 서흑파 같은 친구들은 최신 학문을 간절히 원하던 원록의 갈증을 달래 주던 진실한 벗이었다. 하지만 원록은 여전히 공부가 모자라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 p.22

김묵은 무사할까? 원록의 마음에 두려움이 일었다. 그러나 원록도 그 자리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 누군가가 또다시 맞은편 쪽에서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원록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그러자 상대편도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원록은 골목이 마주치는 교차로에 이를 때마다 서둘러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움직임을 따돌렸다는 생각이 들자 빗길을 마구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다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기를 반복했다.
그날 밤 원록은 어딘가로 들어가지 못하고 한밤 내내 도쿄 거리를 헤매었다. 쫓아오는 이들을 따돌리기 위해 하숙집으로 바로 들어갈 수가 없었다. 비는 그치지 않고 쏟아졌다. 초겨울의 비는 밤바다처럼 차가웠다. --- p.64

“264번! 식사다! 5분 후에 취조실로 갈 테니 서두르도록!”
바닥 근처에 있던 조그만 철문이 열리고 희멀건한 국물이 담긴 나무 그릇과 함께 신경질적인 목소리가 감방 안으로 들려왔다.
“264번?”
‘264번. 그래 나는 264였지. 이백육십사, 2, 6, 4, 이육사라. 너 희가 부르는 혐오와 멸시의 수인 번호 이육사. 그래 그렇다면 기꺼이 이육사가 되어 주지.’
문득 원록은 도쿄 시절 불령사가 떠올랐다. 불량한 조선인이 라며 일본인들이 부르던 불령선인이라는 말을 본떠 불령사라는 이름을 지었던 아나키스트들. --- p.112

“이분은 루쉰 선생입니다. 더 소개가 필요 없겠지요. 그리고 선생님! 여기는 큰 뜻을 품고 상하이까지 온 조선 청년입니다. 인사드리세요.”
“이육사입니다. 뵙게 되어 정말 영광입니다.”
“반갑소.”
루쉰은 공손히 인사를 드리는 육사의 두 손을 뜨겁게 붙잡았다. 마치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절친한 친구라도 본 것처럼 루쉰은 낯선 이방인의 손을 정답게 붙잡았다.
“앞으로 글을 쓸 거라고 하던데요. 민중을 위한 글을 잘 부탁 하오. 핍박받는 민중을 위한 글이라면 중국어든, 조선어든 무슨 관계가 있겠소.”
루쉰은 국민당 정부로부터 쫓기는 신세고, 양싱포의 죽음으로 큰 충격을 받았을 터인데도 따뜻한 목소리로 젊은 육사를 격려 해 주었다. --- p.177

석초는 육사의 말이 평소와 다르게 무겁게 느껴졌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았다.
“자, 이제 눈길 한번 걸어 봅시다. 나는 아무도 걷지 않은 눈 쌓인 길을 걷는 게 가장 행복하다오. 게다가 오늘은 새해 첫날이지 않습니까?”
“육사 형을 보면 흰 눈길보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가 더 잘 어 울리던데요. 〈청포도〉의 한 구절이 생각나기도 하고요.”
“그것도 좋죠. 하지만 하얀 눈을 대신하지는 못합니다. 눈은 세상의 시간을 되돌려 놓는 것 같습니다. 앞을 보세요. 어디가 식민지고, 어디가 제국인가요? 누가 약하고, 누가 강한가요? 인간이 자기 소유라고 땅 위에 그어 놓은 선들이 흰 눈 아래 사라지고, 차별도, 억압도, 다툼과 미움도, 그 모든 경계심도 눈 속에 파묻히죠. 모든 게 정화되고, 모든 게 평등하지 않습니까? 눈이 야말로 자연 속에 존재하는 진정한 아나키스트답지요.”
“육사 형! 그럼 눈길을 밟으면 안 되는 거 아닌가요?”
--- p.2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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